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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윤 Apr 23. 2024

책 : 미세 좌절의 시대

2024. 4. 23.

다행히 저는 칼럼 작업에 그 이상의 대단한 야심은 없어서, 마감일 즈음에 떠오른 단상을 정리한다는 기분으로 원고를 썼습니다. 관심사가 그리 넓지 않은 사람이기도 하여 느슨한 일관성이 저절로 생긴 것 같기도 합니다. 한 줄로 정리해보라고 한다면(또 일반화를 하자면) '매사에 회의적인 사람이 점저 불확실해지는 시대 앞에서 스스로에게 던진 막연한 질문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체로 이런 질문들이었습니다. 지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2016년에서 2024년 사이에 저는 세상이 퇴행하고 있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고, 새로운 미디어 기술과 선정적인 구호들(구호와 일반화는 다릅니다)을 퇴행의 배후로 의심합니다. 새로운 기술과 구호들은 서로 대단히 잘 결합하는 듯 보였고 저는 그 단단한 결합을 보면서 무력감을 삼키거나 우울해지곤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제가 의심하지 않는 몇 가지 삶의 원칙이어서 소박한 궁리의 기반이 되어줍니다. 제 원칙들은 개인은 존엄하다, 세상은 복잡하다, 사실은 믿음보다 중요하다 등입니다. (6~7쪽)       

        


이번에는 장강명이 에세이를 썼다. 썼다라기보다는 그동안 여기저기에 써온 것을 모았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다. 장강명은 부지런하고, 그 부지런은 그의 일상인 듯 싶다. 소설로 장안의 지가를 올리고, 방송으로 유명세를 탔다. 그리고도 계속 쓴다. 계속 쓰는 장강명을 응원한다.     

이번의 에세이는 제목이 '미세 좌절의 시대'다. '미세 좌절'이라는 용어는 장강명이 지은 것이다. 책에서 그에 대한 글을 찾아보았다. 있다. 96쪽이다.     

          

"그렇게 '인생 참 계획대로 안 되네'라는 말을 더 자주 하게 된다. 나는 여기에 '미세 좌절'이라는 이름을 붙여본다. 한두 번은 웃어넘길 수 있지만 가랑비에 옷 젖듯, 이게 쌓일수록 제아무리 낙관적인 이도 결국 굴복한다. '시원하게 풀리는 일이 하나도 없네.' 그 원인을 명확히 짚어낼 수 없기에 더 무력감을 느낀다.     

생존 감각이 날카로운 기업계에서는 이제 시나리오 경영이라는 표현도 진부하다. 언젠가부터 '비상 경영'이라는 말리 자주 들린다. 경영인들은 '상시 비상 경영체제'라는 앞뒤 안 맞는 신조어를 웃음기 없이 말한다. 이번에도 개인들은 그 표현이 지시하는 바를 내면화하는 중이다. 늘 비상인 세상, 뜻밖의 긴급한 사태에 힘겨워도 끊임없이 적응해야 하는 시대인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2021)     

          

살아남기 위해. 마지막 말이 계속 맴돈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일을 하고, 밥을 먹고, 잠을 잔다. 작가는 살아남기 위해 글을 쓴다. 나 역시 살아남기 위해 가파도로 왔고, 직장을 구했고, 밥을 짓고, 일을 하고, 고양이를 돌보고 글을 쓴다. 그리고 홀로 살아남지 않기 위해 주변을 돌보고, 인사를 나누고, 힘든 일을 돕고, 같이 일을 도모하고, 술을 마신다.               

장강명의 이번 에세이는 힘든 가운데에서도 아직은 정신줄을 놓지 않고, 불확실한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원칙을 세우고, 회의적인 시선으로 현실을 진단한다. 용기백배한 글은 없지만, 어떻게든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따뜻하게 지내려는 희망의 몸짓을 본다. 온기가 전해지고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래 어떻게든 살아보자. 추락하지 말고, 좀 더 괜찮은 생각과 삶을 가꾸며. 아끼고, 비우고, 나누고, 즐기며!     

     

글을 읽다가 밑줄 친 몇 구절을 나눈다.     

     

"야근에 시달리는 회사원, 육아에 지친 부모, 학원 다니느라 바쁜 학생들을 나는 가슴검은도요새가 지켜보는 물가 갈대숲으로 데려가고 싶다. 때가 되면 산그림자가 내려오고, 종소리가 울려퍼진다. 그 순간 그들이 홀로 됨을 벅차게 느끼도록 하고 싶다. 그런 그윽하고 감미로운 고독을 선사하고 싶다."(2018)      

- <'외로움 담당 장관'이 된다면> 중에서     

     

"사실 무력감으로 귀결되는 이야기의 결말을 바꾸면 고전적인 영웅서사다. 가진 게 없었고, 시련을 겪었으나, 결말은 창대한. 미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같은 소재로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므로 희망이, 목표가 필요하다. 그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과거가 보잘것없고 현재가 힘들수록 더 대단해진다. 그는 실패하더라도 비극적 영웅이 되지, 무력한 존재가 되지는 않는다." (2019)     

- <자존감, 통제력, 그리고 자기 서사> 중에서     


"앞선 세대들은 과업이 분명했다. 산업화 세대의 과업은 산업화였고, 민주화 세대로도 불린 586 세대의 과업은 민주화였다. 적잖이 민망하지만 X 세대는 자유롭게 열심히 노는 것이 과업이었다고, 사회 수준과 대중문화의 질을 높이는 역할이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 MZ세대의 과업은 뭔가? 이 질문 없이 한 세대를 규정할 수 있을까?" (2021)

- <MZ 세대는 분석을 기다리는가?> 중에서


"의로움이 노여움과 한몸이 되기 쉬울수록 우리는 그 사실을 주의하고 조심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단두대에 오른 정적을 보고 박수를 치고 싶어하는 마음을 우리의 본성이라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단속하고 경계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의로움을 의롭게 추구할 수는 없느냐고. 왜 그런 높은 이상을 품지는 못하느냐고. 그 많은 피를 꼭 다 흘려야 했느냐고." (2018)

- <분노는 진보의 필수요소인가> 중에서


이외에도 밑줄 친 부분도 많고 소개해주고 싶은 구절도 많지만 그만 하련다. 구입하여 직접 읽는 재미를 줄이고 싶지는 않으니까. 오늘은 여기서 그만.


<추신>

아, 그리고 장강명이 보수주의자란 사실을 처음 알았다. 하지만 장강명 같은 보수주이자라면 언제든지 환영이다. 어쩌면 나 역시 장강명의 관점에서는 보수주의자로 보일 수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던 만큼, 장강명의 보수주의는 매력적이다. 뭐가 매력적이냐고? 직접 확인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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