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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윤 Apr 10. 2024

책 : 현자들의 죽음

2024. 4. 10.

"인간의 존엄성은 죽음으로 시험받는다. 나는 죽음을 자유라고 생각한다. 보편적 죽음은 없다. 죽음을 넘어 인간의 자유로 대면할 수  있는지에 따라, 다시 말해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에 따라 세상에는 매우 다른 죽음이 있다."

- 토머스 머튼, <칠층산> 중에서


인간은 자유를 추구한다. 자유로운 만큼 존엄하다. 머튼에 따르면, 그 존엄성을 시험받는 가장 큰 과정이 죽음이라는 것. 누구나 밟는 동일한 코스로서의 죽음은 없다. 누구나 홀로 통과해야 한다. 하여 자신만의 방식으로 죽음을 겪을 수밖에 없다. 자, 그렇다면 이제 길은 하나다. 죽는 법을 탐구하면 된다. 죽음의 형식, 죽음의 과정, 그리고 죽음이 삶과 맺는 관계와 의미 등.(22쪽)


연암은 묘비명의 달인이었지만 연암에 대한 묘비명은 없다. 자신은 평생에 걸쳐 묘비명으로 죽은 자를 애도하고 산 자를 위로했는데 정작 그 자신에 대한 묘비명이 없다니. 하지만 그는 별로 애석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죽음은 애도가 필요 없기 때문이다. 일찍부터 수많은 죽음을 겪었고 묘비명을 쓰면서 죽음과 별리에 대한 탐구를 멈추지 않았다. 달리 말하면, 늘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 달리 말하면, 늘 ‘오늘 이 하루’의 삶에 최선을 다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미 오래전 열하로 가는 길에 ‘명심’을 통해 죽음의 도를 깨우쳤던 그가 아니던가. (214쪽)



죽음은 처음 생각한 적은 어느 때였는가? 고2 아버지의 주검을 보면서 처음 죽음을 생각했다. 아버지의 사인은 연탄가스 중독이었다. 원래 심장판막증이라는 지병을 앓고 계셔서 오래 살지는 못하셨겠지만, 연탄가스 중독사는 느닷없는 죽음이라 너무 당혹스러웠다. 준비되지 않은 죽음이었다. 장례식 내내 울지도 못했다. 처음으로 아버지의 죽음으로 울음을 터트린 것은 내가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늦은 저녁 자식을 위해 과자를 사고 귀가할 때였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 가끔 자식들을 위해 과자를 사 오시곤 했다. 그때 그 모습과 내 모습이 겹쳐지며 울음이 터졌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20년도 넘은 세월이 지나서였다.


내가 처음으로 내 죽음을 생각했던 것은 20여 년 전 고양시로 이사 와서 꿈속에서 저승사자를 보았을 때다. 꿈속에 저승사자를 나를 보고 말했다. "잘 잔다. 오늘 죽는 줄도 모르고." 나는 그 소리에 화들짝 깼다. 거실로 나와 냉장고 문을 열고 물을 마셨다. 탁자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오늘 죽는구나. 가족들을 깨워서 이 사실(?)을 말해야 하나? 아내만 깨워 유언을 남겨야 하나? 유서를 쓸까? 이대로 죽어도 되나? 죽어도 괜찮나?.....' 이런저런 생각 끝에 결론은 이것이었다. '호들갑 떨지 말자. 어차피 죽는 거라면 죽자. 후회 없이 살았고 미련 없이 살았다.' 그리고 조용히 안방으로 들어가 누워 잠들었다.


물론 그날 죽지 않았다. 그래서 이 글을 쓸 수 있다. 이후로 아주 친한 친구의 죽음을 여러 번 경험했다. 존경하는 사람들도 차례 없이 죽어갔다. 그리고 나 역시 죽을 것이다. 나는 유서를 썼고, 연명치료거부 의사를 공식적으로 등록했다. 아이들도 다 컸고, 생물학적으로는 죽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나이가 되었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은 죽음의 연습'이라고 말했는데, 동의한다. 나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며 죽음을 숙고했다. 그리고 나에게 어울리는 죽음을 상상하며 받아들였다. 장자의 죽음이 가장 멋졌다. 죽는 순간까지 유머감각을 놓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도 하지 않는다. 내가 어떠한 죽음을 맞이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는 아무런 욕심 없이,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죽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을 감사한다. 그래서 고미숙의 <현자의 죽음>은 나에게 새로운 것이 아니다. 내가 읽고 숙고하고 동의한 죽음의 모습이 겹쳐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소에 죽음을 생각해보지 않은 독자가 있다면 가장 멋진 죽음을 선사한 '현자' 8명을 만나보는 것이 참으로 도움이 될 것이다. 익히 나도 이들의 책을 읽으며 도움이 많이 되었다. 이 책은 고미숙 특유의 통찰력으로 '죽음'을 성찰한다. 익숙한 이야기도 있고, 새로운 이야기들도 많다. 간디, 아인슈타인, 사리뿟따의 죽음은 나에게 낯선 것이다. 나는 장자, 연암의 죽음이 낯익다. 독자들도 읽어가며 자기의 죽음을 상상해 보기 바란다. 그리고 가장 멋진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삶의 모습을 그리며 살아가길 바란다.


출판사에서 소개하는 글의 일부를 마지막으로 인용한다.


죽는 법을 배우라! 그러면 사는 법을 알게 되리라!

죽음을 피하는 한 우리는 죽는 법을 배울 수 없고 그 두려움 때문에 더더욱 삶에 매달리게 된다. 그것 자체가 이미 구속이요, 억압이다. 죽음의 구속을 피하려다 삶 자체가 감옥이 되는 셈이다. 우리는 그 죽음을 홀로 통과해야 한다. 잘 통과하기 위해서는 길은 하나다. 죽는 법을 탐구하면 된다.
현자들은 인류의 스승들이다. 이들은 많은 것을 알려 주었지만, 그 무엇보다 ‘잘 죽는 법’을 알려 주었다. 이런 죽음의 형식이 있다고. 이렇게 죽음을 맞이하면 된다고. 그러면 죽음을 통해 자유와 해방을 만끽할 수 있다고.
독자들은 이 책과 함께 이들이 어떻게 죽음을 아득한 나락 혹은 깜깜한 어둠으로의 침몰이 아니라 ‘빛 혹은 평화’로의 비상으로 만들 수 있었는지 그 지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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