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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윤 Apr 17. 2024

책 :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

2024. 4. 17.

날씨가 우리를 만드는 것이지 우리가 날씨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생각 또는 철학도 만들어낸다. 독일의 검은 숲속에 오두막을 짓고 숨기 좋아했던 하이데거는, 오두막에 폭풍이 치고 눈이 오면 그때가 철학자의 시간이라고 말했다. 오두막을 눈으로 덮어 따뜻하게 만드는 날씨는 생각의 알을 암탉의 체온으로 데우는 부화기이다.

중요한 것은 반대 방향에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날씨가 만드는 사상이 아니라 날씨를 만드는 사상은 없는가? 고대 민족이 먼 옛날 마음에 담았던 ‘레인메이커 rainmaker’의 꿈을 철학은 간직하고 있는가? 철학은 오래전부터 날씨의 언저리를 맴돌며 거기에 손을 대고 싶어 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사람들에게 수수께끼처럼 말했다. 당신은 폭우로부터 가뭄을 만들어낼 능력이 있는가? 캄캄한 불빛과도 같다고 모순을 동원해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이 매력적인 철학자는 이렇게 날씨를 만드는 착상을 최초로 사상사에 끌어들인다. 물음의 수신사가 된 그 누구도 그의 진의를 이해하진 못했을지라도 말이다.

니체 역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3부의 <해뜨기 전에>에서 날씨를 바꾸고자 한다. ‘떠도는 구름’으로부터 ‘청명한 하늘’로, 그러니까 구름 뒤에 숨은 인간들을 억압하는 원리들로부터 자유로. 나는 자유와 하늘의 청명함을 푸른색 종처럼 모든 것 위에 펼쳐놓았다고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날씨는 바꿀 수 있다. (7~8쪽)


이 책을 내가 왜 샀는가? 들뢰즈 철학의 대가 서동욱은 에세이를 어떻게 쓰는지 궁금했다. 그 난해한 철학책을 번역하고 소개한 사람이니, 삶의 난해함도 철학적으로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 철학자가 쓴 에세이는 늘 관심사다. 동종업계에 있다는 동지감도 있다. 현실 철학자이자 문학평론가라 그런지 그의 글에는 온갖 철학적 저술과 문학작품들이 종횡무진으로 등장한다. 에세이는 에세이이되 교양서로서도 손색이 없다. 고급스러운 글을 읽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읽고 만족하리라. 게다가 서동욱 자체의 문체도 매력적이다. 오랜만에 읽는 문학적 글쓰기이다. 두 말할 필요 없다. 책을 읽으며, 밑줄 그은 부분을 일부 인용하는 것으로 나머지를 대신한다. 서동욱을 만끽하시길.



"그러나 내 마음은 어둠 속에서도 햇살처럼 커져야 하며, 가뭄 속에서도 그토록 좋아하는 빗소리가 울려 퍼지는 우산 아래의 원형극장을 만들어야 한다. 진정 모든 변화는 생각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생각의 눈은 삶에서 어디에 햇살이 깃들고 어디에 반가운 여름비가 오는지 찾아주어야 한다. 삶의 구석구석을 응시하면서 말이다. 삶에 햇살을 찾아주는 것도, 가뭄 속에 간직된 비 향기를 기억해 내는 것도 생각의 노력에서 시작한다."(9~10쪽)


"이 책은 세계의 탐색자를 재촉하기보다 여기서 그냥 쉬라고 말한다. 보라, 세상은 깨어졌다. 그 파편들이 아름다우니, 이제 조개껍데기들이 빛을 반사해 우주로 돌려보내는 아침이면 하나씩 주워보자. 그리고 조각들을 당신이 원하는 대로 맞추어보자. 하나의 세계가 당신의 손 안에서 꼬리가 아름다운 별처럼 태어나 바람을 타고 움직이며 기분 좋은 궤도를 만들 때까지. 그 별이 궤도를 다 돌면 하루가 지나는 이 세계는 온전히 당신의 것이다. 이것이 내가 당신에게 희망하는 '읽기'이다."(11쪽)

- <프롤로그> 중에서


"천재가 새로운 규칙을 창조해 기존에 없던 것을 만들어낸다면, 바보는 그 순수성으로 세상에 통용되는 규칙과 가치를 무력화해 세상을 텅 비워낸다. 둘 다 세상이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길을 연다. 결국 바보와 천재는 서로 전혀 다른 인물들이고 전혀 다른 길을 가지만, 궁극적으로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111쪽)

- <바보와 천재> 중에서


"진정한 교육이란, 문제에 답안 하나를 공들여 제출하는 길을 일러주는 것이 아니라 , 문제를 창안해내는 소질을 빛나게 해주는 것이다."(131쪽)

- <문제를 만들어내는 능력> 중에서


"산책자는 정처 없이 방랑하지 않으며, 길을 잃는 법이 없고, 명확한 궤도 위에서 움직인다. 산책은 늘 집으로 되돌아오기 위한 산책이며, 그런 점에서 정주민의 지혜로운 거주 방식이다."(174쪽)

- <산책> 중에서


"소세키에게 글쓰기란 글쓰기의 대상을 자식처럼 어루만지고, 심각한 상황에 유머라는 완충제를 집어넣는 일이다. 이런 글쓰기가 달성된다면, 심오한 사상의 전달 여부를 떠나서 글쓰기 자체가 새끼를 핥는 어미의 혀처럼 인간에게 위안이 될 수 있으리라."(197쪽)


"지적인 세계에서는 오로지 삶의 축복처럼 갑작스럽게 닥쳐오는 유머가 우리를 웃게 만든다. 그것은 액면가가 얼마 되지 않을지 모르나 손에 쥐고 무게와 촉감과 광채를 느껴볼 수 있는 진짜 금화이다. 지적인 세계 밖에서는? 아이들이나 강아지들이 우리를 웃게 할 것이다. 그것은 유머와 같은 자유를 보여주지만, 당연히 유머보다 위대하다."(198쪽)

- <유머> 중에서


"사랑한다는 말은 말하는 자에게 사랑에 전념하는 자가 될 것을 약속하라고 강요하는 법이다. 이성에게 사랑의 고백을 할까 망설이다가 포기하고 돌아서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종종 볼 것이다. 그때 포기를 통해 모면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자신을 구속하는 사랑의 법의 지배를 모면하는 것, 사랑의 법으로부터 면책받는 것이다. 면책과 동시에 그는 자유를 얻는데, 그것은 무인도에서 제 맘대로 할 수 있는 자유이다."(201~202쪽)

- <사랑의 말> 중에서


"국가의 목적이 구성원들의 영혼을 돌보는 것 같은 주제넘는 일에 있는 게 아니라면, 그것은 그들의 세속적 행복 외에 무엇이겠는가? 결국 정치적 싸움이란 느려질 권리를 얻는 문제이다. 시간이 느려지지 않는다면, 삶은 그저 노동을 거쳐 사망으로 가는 쾌속 열차일 것이다."(251쪽)

- <느려질 권리> 중에서


"나이 든다는 것은 나의 시간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보낼 시간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질 기회를 얻었다는 뜻일지 모른다. 나이가 든다는 것, 그것은 친지들에게, 젊은이들에게, 학생들에게, 그야말로 가능성 자체로서 자신의 현재를 시험해보는 이들에게 더 큰 관심을 보여줄 기회가 생겼다는 뜻이다. 이제 자신의 가능성이 아닌 타인의 가능성을 돌볼 시간이 오는 것이다. (....)

인간은 수전노처럼 자신만의 시간을 마지막 동전처럼 움켜 잡고 홀로 죽지 않는다. 타인이 누릴 미래를 자기의 미래처럼 돌보기에 인간에게 시간은 무한한 것이다. 이웃에서 이웃으로, 세대에서 세대로, 미래는 불멸의 고리를 만들며 전진한다."(298~299쪽)

- <나이 드는 인간을 위한 철학> 중에서


"그러니 인간에게 축제가 있는 것은 축복이다. 축제는 인간이 하루하루를 잃어가며 늙어가는 운명을 벗어나 매번 새로 태어날 기회이기 때문이다. 축제 속에서 삶은 되찾을 수 없는 시간으로 추억되는 것이 아니라 매번 새롭게 실현된다. 우리가 설레는 마음으로 축제를 기다린다면, 축제가 시작과 삶을 돌려주기 때문이다."(323쪽)

- <축제> 중에서


<추신>

글쓰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인데, 영화평론가 이동진이 2월에 꼽은 최고의 책이 바로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였다. 그래서 이동진의 유튜브 주소를 붙인다. 관심 있으신 분은 보시라고.^^

삶을 흔들어 깨우는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 [2월 최고의 책] (youtub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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