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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윤 Jul 19. 2024

2024 칼럼쓰기 6 : 초복날 풍경

<고양신문> (인터넷판. 2024. 7. 17일자)

가파도에서 초복을 맞습니다. 상황상 홀아비 세 명이 모였습니다. 이장과 사무장과 나. 섬 밖으로 나가면 삼계탕을 사 먹을 수도 있고, 대용으로 치킨이라도 시켜 먹을 수 있지만, 가파도에는 닭을 구할 수 없으니 대략 난감입니다. 그래도 냉장고를 뒤져 뭐라도 먹자고 합의를 본 후, 각자 집으로 가서 초복용 식자재를 가져오기로 합니다. 사무장은 목살과 훈제오리를 가져왔습니다. 나는 냉동만두와 김치를 가지고 왔습니다. 이장은 냉장고가 텅 비어 그냥 입만 왔습니다. 아, 소주를 가져왔네요.


블루오션 민박집 사장님이 출타하여, 그곳 식당을 이용하기로 합니다. 하루 종일 더위를 먹었으니, 에어컨을 빵빵하게 틉니다. 사무장이 불판에 고기를 굽습니다. 식탁은 조촐하게 차려지지만 고기와 술이 있으니 초복날 저녁이 든든합니다. 소주잔을 채우고 오늘 하루 수고했다고, 여름철 더위를 잘 견뎌보자고,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보내자고 건배를 합니다. 목살이 익어갑니다. 두툼한 목살을 먹기 좋게 자르고 잘 익혀 깻잎에 싸서 입안에 넣습니다. 입안 가득 육즙이 터지고 깻잎 향이 퍼집니다. 각 1병씩 먹기로 한 술이 비워져 갑니다.

마무리는 역시 만두라면. 준비해 간 만두를 한 봉지 뜯고, 라면 세 개를 뜯어 냄비에 넣습니다. 바글바글 끓는 물속에서 면발과 만두가 익어갑니다. 라면은 내가 잘 끓입니다. 처음에 물을 부을 때부터 모든 재료를 한꺼번에 넣는 것이 내 비법(?)입니다. 나중에 파와 계란을 첨가하면 좋지만, 남의 식당을 빌려서 벌인 술판이라 기본재료로만 끓입니다. 덜 채워진 배를 라면과 만두로 채웁니다. 소주도 이제 다 떨어져 갑니다.

가파도의 밤이 깊어갑니다. 식당 밖으로 나와 담배 일발 장전한 후, 바다를 바라봅니다. 어두워진 바다 수평선에 갈치잡이배들이 집어등(集魚燈)을 밝히고 조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장은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 나오는 이야기를 합니다. 제주도에는 수많은 별들이 바다에 떠 있다고. 그 별들에 소원을 빌면 하늘이 들어준다고. 그 별이 바로 집어등입니다. 멀리서 보면 별빛처럼 아름답지만, 그 불빛 아래서 일을 하는 어부들은 생의 간난신고(艱難辛苦)를 알리는 불빛입니다. 밤을 새워 잡은 물고기로 풍어를 이루면 좋지만, 그렇지 않으면 밤새 지친 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부들뿐이겠습니까. 인생,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비극입니다. 다들 하루하루 살아내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렇게 해서 하루가 지나면 삼삼오오 술집에 모여듭니다. 하루가 고달프면 술은 달지요. 그 단술에 기대어 다시 하루를 살아갑니다. 다람쥐 쳇바퀴 같지만, 결코 단순 반복이 아닙니다. 그 고된 노동의 나날이 부모를 봉양하고 자식을 살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살립니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만듭니다. 적어도 그렇게 믿고 살아갑니다. 그런저런 생각을 하며 수평선에 깔린 별빛을 바라보다가 담뱃불이 꺼진 줄도 몰랐습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식당을 치우고 어두워진 가파도의 해안도로를 걸어갑니다. 거리의 고양이들이 터벅터벅 걸어가는 나를 쳐다봅니다. 밤 고양이 눈은 빛이 납니다. 나는 고양이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눕니다. 오늘이 복날인데, 너희들은 고기라도 먹었니? 더위 먹지 말고 여름을 잘 지내보자. 고양이들은 내 다정한 인사는 본체만체 휙 지나갑니다. 우리는 그렇게 각자 자신의 길을 다시 걸어갑니다. 집에 가서 마당 고양이 감자와 카레에게 참치캔이라도 따줘야겠습니다. 복날 기념입니다. 삼복더위가 시작되었습니다. 건강하세요.


초복날 풍경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고양신문 (mygoyang.com)


초복날 풍경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고양신문 (mygo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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