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붓다)란 어디까지나 인간입니다. 인간이, 인간인 채로 부처가 됩니다. 이것을 성불이라고 하죠. 지식으로서 이 점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것을 제대로 곱씹어 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에 집중하고 있는 불교는 신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신 따위는 없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죠. 인간은 신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완벽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신념인 거죠.
이것을 확인하면, 불교는 일신교와 무관합니다. 신을 경배하기만 하는 힌두교와 적대관계이죠. 인민은 정부가 없으면 행복해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유교와도 다릅니다. 신과 인간이 협력하여 행복해지자고 말하는 신도와도 다릅니다. 합리적으로 자립한, 개인주의적 인간중심주의라고 볼 수 있죠. 이렇게 철저하게 합리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인간중심주의는 없다고 봐야 합니다.
여기에 불교의 본질과 붓다의 본성이 있습니다.
- <시초의 불교> 중에서 (43~44쪽)
1.
만약에 기독교나 불교와 같은 세계 종교에 대해 계급장을 떼고 오로지 논리정합성과 추론을 가지고 딴지를 걸어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종교적 신비현상이나 비합리적 교리 등은 무시하고 오로지 인류의 삶에 어떠한 의미와 영향이 있는지 따져 묻는다면 사뭇 재밌을 것이다. 약속대련이 아니고 자유대련의 방식으로, 그 놓인 자리의 힘과 기운에 영향을 받으면서, 최대한 지력을 이용하여 상대방과 토론베틀을 벌인다면, 이런 상상에 어울리는 책이 바로 오사와 마사치와 하시즈메 다이사부로가 대담한 <유쾌한 불교>(북드라망)이다.
2.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대담자는 일본의 대표적인 사회학자들이며, 특히 오사와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철학을 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시즈메는 종교에 대한 내공이 엄청나서 오사마의 짖꿎은 질문을 하나도 비웃거나 회피하지 않고, 진지하게 지혜롭게 쉽게 대답해주고 있다. 이들의 대담집은 <유쾌한 불교>뿐 아니라 전작이라 할 수 있는 <불가사의한 그리스도교>, <불가사의한 아메리카> 등도 있어, 목차를 살펴보고 주문을 했다. (책은 책을 부르니까.)
3.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불교에 대한 역사는 깊다. 특히 일본인은 불교를 더욱 친숙하게 여길 것이다. 하지만 유교적 전통에 깊은 우리가 유교에 대하여 정작 아는 것이 없는 것처럼, 일본인들은 불교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으며, 알아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전제하에 둘은 대담을 나누고 있다. 파격적인 상상력을 동원하여 질문하는 오사와나 그 파격성을 부드럽게 감싸 안으면서 논지를 놓치지 않고 친절하게 대답하는 하시즈메를 보면서 이런 질문과 대답의 향연이라면 아무리 읽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는 믿음이 생겼다. (그들의 대담집을 두 권이나 더 산 이유이기도 하다.)
4.
게다가 이 둘이 다루고 있는 불교의 영역은 참으로 광범위하여 불교의 역사로부터, 핵심 개념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알고 싶지만 차마 묻지 못하는 질문들을 뻔뻔스럽고도 노골적으로 해대는 오사와 덕분에 옅은 교양이 짙어지고 깊어지는 효과도 얻을 수 있다. (흠, 불교가 이렇단 말이지. 흠, 사성제가 본래부터 사성제는 아니었단 말이지. 아니 이렇게 심플하게 출발해도 되나? 깨달음을 뺀 나머지를 모두 빼도 불교란 말이지. 등등)
하두 밑줄을 많이 쳐서 아예 밑줄을 소개하는 것을 포기한다. (그냥 구매해서 보시는 게 빠르겠다.) 그래도 몇 가지 코멘트를 남겨놓자면,
1) 이 책의 백미는 처음을 장식하는 '시초의 불교'편이다. 두 대담자의 자세와 태도, 지식의 방대함과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장이다. 이 장만 읽어도 책값은 한 것이다.
2) 이 둘이 대담 중에 논의를 더 깊게 하거나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쳐놓은 '보조선'은 - 예를 들면, 불교에 유교나, 이슬람교나, 힌두교나, 기독교 등의 보조선 - 불교를 더욱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임과 동시에, 하나의 종교가 아니라 보편종교를 적극적으로 비교 검토할 수 있는 장치이기도 하다. 나로서는 너무 유용했다.
3) 셋째, 정말 이 두 대담자는 '갈 때까지 달려가보자'는 용맹함으로 불교를 낱낱이 해체하고 분석하고 해석하고 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다. 그럼에도 이 둘의 대담을 따라가다 보면 어둠이 걷히고 개활지를 만나는 것만 같은 상쾌함을 얻을 수 있다. 제목이 괜히 <유쾌한 불교>가 아니다. 정말 유쾌, 상쾌, 통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