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13.
자기 구제의 공부가 근년의 주요한 관심사다. 위기지학爲己之學의 이념이 있듯, 외려 ‘근본 이기주의’의 되치기 수법으로 각답실지脚踏實地의 공부를 얻어 안팎으로 유익하고자 한다. 제 앞가림조차 못 하는 학식, 이웃의 아픔에 무력한 고담준론, 평생을 붙들고 있어도 제 존재를 증명하지 못하는 공부, 죄다 목구멍에 들러붙은 독버섯이나 진배없다. 앉은 자리는 오염되어 있고, 시선은 고르지 않으며, 제아무리 많은 지식으로도 지혜는 조각날 수밖에 없다. 불투명해도 깨단할 수 있고, 흔들리면서도 걷고, 조각난 지혜로도 세상을 살고 우주를 건넌다.
- <서언>의 일부
1.
내가 알고 있는 김영민은 두 명이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라는 에세이로 낙양의 지가를 올린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와 <동무론> 3부작으로 그 사상의 깊이를 보여준 시인이자 철학자 김영민. 두 분 다 글쓰기에 진심인지라, 그들의 책을 읽으면 각기 다른 매력에 빠지게 된다. <아침에는~>의 김영민은 위트와 유머가 넘치는 글에 빙긋 웃게 되고, <동무론>의 김영민은 신선한 개념과 숙고된 문장에 머리를 치게 된다.
2.
이번에 내가 읽은 책은 후자 김영민의 신간 <조각난 지혜로 세상을 마주하다>라는 강연집이다. 서울 서촌에 있는 '서숙'에서 열 번에 걸쳐 강의한 것을 정리하여 책으로 내었다. 목차를 보면, 그 강의의 대강을 알 수 있다.
1강 인문학에 대한 네 가지 다른 태도: 정희진, 박문호, 유시민
2강 ‘사랑, 그 환상의 물매’, 혹은 사랑은 왜 실패하는가?
3강 자기 구제로서의 공부길, ‘부분 구원’이란 무엇인가?
4강 쓰기, 읽기, 말하기, 듣기: 공부길의 한 풍경
5강 내가 겪은 자득, 일곱 가지
6강 일본, 혹은 우리가 실패한 자리: ‘일상생활의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7강 누가 이들을 죽였는가: 노무현, 노회찬, 박원순의 자살에 관하여
8강 정신과 표현: 표현주의 존재론과 정신 진화론에 관하여
9강 왜 대화는 실패하는가: 보살행으로서의 듣기와 말하기
10강 저항과 주체: 여자는 어떻게 남자를 만나는가
3.
모두 짤막한 글 모음이지만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일찍이 진리(眞理), 일리(一理), 무리(無理)라는 개념으로 학문의 지향 태도를 구분했던 '일리'의 철학자는, '일리'라는 한자적 개념 대신 '조각난 지혜'라는 문학적 언어로 자신의 학문을 정리한다. 맨 처음에 인용한 부분이 이 책 전체의 서언이다. 그리고 '조각난 체로 구제한다'는 서언의 제목은 어느덧 농익은 철학자 김영민의 현재지형을 읽게 한다.
'탈식민지적 지식인'으로 자신의 철학(읽기, 쓰기, 말하기, 듣기)을 다듬었던 현재의 김영민이 어느 곳에 촉수를 뻗어 철학적 사유를 하고 있는지 읽는 내내 흥미로웠다. 특히 제일 처음에 3명의 유명인을 나름대로 분석평가하는 대목에서는 빙긋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런 것까지 관심을 가졌나?) 그 외에도 구체적인 실명 또는 이니셜을 써가며 철학적(?)으로 접근하는 김영민의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용감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내가 특히 흥미로웠던 강의는 남녀 간의 사랑을 다룬 2강과 10강이었는데, 현대철학자들이 단골 메뉴로 다루는 '사랑'이라는 주제를 김영민은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여러분도 궁금해하시라고 스포일은 하지 않겠다.)
4.
철학자 김영민과 나의 공통점을 굳이 찾아보자면, 쉴 새 없이 읽고 글을 쓴다는 것이다. (나는 글을 쓰려고 읽는지, 읽으려고 글을 쓰는지 잘 분간이 안 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김영민은 이렇게 말한다. " ‘글을 쓰면서 공부한다’는 오랜 원칙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외부 청탁이 있든 없든, 자율적으로 글을 쓰면서 내 정신의 집중력과 유연성, 그리고 창의성을 점검한다. 수행자들은 글을, 책을 버리라고 염불 하듯 떠들지만, 오히려 스스로 자신의 문장을, 화법과 응대를, 그리고 그 마음의 결과 체를 챙겨볼 일이다." 자기가 쓴 글(/말)을 다시 살펴 자신을 점검하는 것이 그의 공부방법이다. 내 글쓰기는 이보다 훨씬 느슨하고 재미를 추구하고 간헐적이다.
김영민의 생활(학문) 태도는 건실한 유학자를 닮아있고, 때로는 보살행을 추구하는 선사를 닮아 있다. 그는 학문과 삶을 연결하여, 학문이 삶을 바꾸고, 삶이 학문을 이루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선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잡놈이라 그의 경지에 도달하지는 못하겠지만, 나는 나 나름대로 내 공부가 내 삶과 잘 어울리기를 바란다. 삶은 날 것이라, 공부라는 옷이 필요하긴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