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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윤 Oct 06. 2024

책 : 그럴 수도 아닐 수도

2024. 10. 6.

일 년에 제사가 열한 번이에요. 당신 기억하세요. 서랍 안에 넣어둔 종이에 한 분 한 분의 제삿날을 분명히 적어 두었어요. 큰 아주버님의 제삿날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걸 기억하세요. 당신한테 얘기했었는데 당신이 잊을 때가 있더라고요. 딸이랑 여기로 건너오기 이틀 전에 어떤 낯선 여자가 덧 아주버님의 영정과 향로를 전해주러 왔다며 우리 집 문을 두드렸어요. 그 여자가 자기는 더 이상 아주버님의 제사를 지낼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부처님 문전에서 걸식이라도 하라고 덧 아주버님을 절에 모셨는데 계속 아주버님이 눈에 밟혀서 데려오려고 우리 집을 찾아왔다는 거였어요.

(......)

사랑하는 당신, 이제 저는 그 믿는다, 못 믿는다라는 복잡한 팔괘의 굴레로부터 정말로 탈출했네요. 저는 하늘과 땅의 뜻에 따라 평온하게 살고 있어요. 너무 행복해요, 여보.

아니, 당신에게 이래라저래라 충고할 권리가 저에게는 없어요. 당신을 매우 사랑하고, 그저 당신의 방식을 따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제 방식대로 아내의 도리를 다할 수 있도록 당신이 제 곁에 있었으면 좋겠어요.

당신의 사랑하는 아내 찜.

- 이 반, 「그럴 수도 아닐 수도」



1.

베트남 작가 이 반(Y Ban)이 제주문화예술재단의 초청으로 가파도에 왔다. 그 초청 명단에는 내가 너무도 좋아하는 시인 김해자도 있었다. 그리고 우연히도 둘은 지근거리에 숙소를 잡았다. 61년생 동갑내기인 해자누나는 당일로 이 반과 친해져서 음식도 나누고, 같이 산책도 하는 사이가 되었다. 나는 가파도를 잘 안다는 이유로 그들과 동행하며 식사도 산책도 함께 했다.

이 반은 영어를 잘 못해서, - 나나 해자누나도 그랬지만 - 파파고의 번역과 손짓, 발짓으로 의사소통을 했다. 그러던 중 이 반의 소설이 한국에 번역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알라딘에 3권을 주문했다. 나, 해자누나, 이 반이 각각 한 권씩 갖자며 해자누나가 제안한 것이다.


2.

해자누나가 묵는 숙소가 계속 문제가 생겨 누나가 모슬포에 있는 동안 책이 왔다. 포장을 뜯어 이 반의 소설부터 차근차근 읽기 시작한다. 단편소설 모음이고, 분량도 많지 않아 한 나절에 금세 읽을 수 있었다. 책에서 이 반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1961년 남딘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팜 티 쑤언 반이다. 1982년 하노이 종합대 생물학과, 1992년 응웬 쥬 문예창작학교를 졸업했다. 1984년부터 1989년까지 남딘의료전문대학, 타이빈의대 강사를 역임했으며, 1994년부터 2016년까지 『교육과 시대』 신문의 기자, 부편집장을 지냈다. 현재 하노이 문학예술연합회 집행위원회 위원, 하노이 작가회 집행위원회 위원, 하노이 작가회 산문분과 주석을 맡고 있다. 소설 4권, 중편소설집 4권, 단편소설집 14권, 시집 1권, 미니 단편집 2권을 출간했다. 국내의 문학상 10개를 수상했다. 단편소설이 한국어, 러시아, 영어, 불어, 독어, 일본어, 폴란드어로 번역되었다."

의사이자 작가인 이 반은 베트남에서는 유명짜했다. (그럼 그렇지. 제주문화예술재단에서 아무나 초대하지는 않았겠지.) 언젠가 술자리에서 이 반 작가가 시간이 되면 한국작가들을 베트남에 초대하고 싶다고 해서 숟가락을 얹은 적이 있었는데, 불가능한 일이 아닐 것만 같다.


3.

베트남에서는 페미니스트 작가로 알려진 반이 산책하던 우리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내가 마당의 고양이를 보여주며, 얘네들 팔자가 제일 좋다고 말하자, 왜냐고 물었다.

"먹고, 자고, 놀고, 자고, 먹고, 자고, 놀고"

이 반은 웃으면서 그럼 가파도에 여인들은 어떠냐고 물었다.

"일하고, 자고, 일하고, 먹고, 일하고, 자고, 일하고"

이 반은 박수를 치며 깔깔 웃었다. 베트남 여인들도 똑같다면서.


4.

처음으로 베트남 작가들의 단편소설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베트남 작가들의 정서가 한국인의 정서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 베트남에서도 유교문화가 짙게 드리워져 제사를 지내는 것이나 가문의 명예를 지키는 것,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 억압이 강하다는 점을 확인했다. 게다가 전쟁에 대한 기억과 상흔이 작품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는 점도.


위에 인용한 구절은 이 반의 소설 중 후반부에 속하는 부분이다. 유교적인 집안의 며느리로 온갖 제사와 궂은일을 하던 아내는 시동생의 자살까지 수습하면서 미신처럼 귀신이 자신과 자신의 집안을 해코지 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한편으로는 생물학을 전공한 의사로 일하는 여인이기에 그러한 미신을 믿는 것이 맞는지 회의한다.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는 상황에서 결국은 남편 몰래 귀신의 해코지를 막는 액막이를 힘겹게 해냈지만, 그래도 이 힘겨운 굴레의 삶을 계속하는 것을 그만두고 싶다. 결국은 딸아이와 함께 미국행을 결심하고 다시 돌아오지 않고 그곳에서 살기로 결정한다. (남편은 아내의 이러한 결정을 수긍하고, 자신도 정리가 되면 아내 곁으로 가겠다고 약속한다. 해피앤딩이다.)


5.

소설에는 이 반의 단편 외에도 베트남에서 가장 유명한 바오 닌의 단편이 세 편이나 - <여전히 날아가는 흰 구름> <딱밤> <쟝> - 수록되어 있고, 이번에 처음으로 알게 된 응웬 빈 프엉의 <니에우 남매, 이쪽 꾸인 저쪽 꾸인, 그리고 삼색 고양이> <가다>, 보 티 쑤언 하의 <숲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납부리새들>, 투이 즈언의 <이승의 길>, 따 쥬이 아인의 <그 옛날 마을에서 가장 예뻤던 그녀> 등이 수록되어 있다.

개인적으로는 따 쥬이 아인의 소설이 가장 인상 깊었는데, 가장 예쁜 여자가 등장해서가 아니라, 전쟁이 얼마나 인간의 삶을 파괴하고 망가뜨리는지 이처럼 짧은 글에 깊이 있게 다룰 수 있는 작가의 능력 때문이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동네에서 가장 아름다워 여러 남자들의 유혹을 받았으나 진정한 사랑을 바랐던 뚝은 결국 그 사랑을 기다리다 나이를 먹어가게 된다. 전쟁은 끝나지 않고 결국은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나서게 뚝, 그리고 결국은 찾지 못하고 사생아(?)를 낳아 고향으로 돌아와 조용히 살게 된다. 베트남 근현대사의 비극을 한 몸에 체현한 여인이 바로 뚝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동네사람들은 그녀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생아를 밴 뚝'이라는 말로 그녀를 조롱하며 역사를 외면한다. (베트남이나 우리나 역사망각의 회로는 어찌나 빨리 작동하는지.) 작가는 이 모든 상황을 담담하게 전할 뿐이다. 눈물이나 분노는 속으로 감추고, 마치 이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이라도 하듯이.


"얼마 후 마을 사람들은 뚝 누나가 무리에서 떨어진 해오라기처럼 남몰래 떠나버린 것을 알게 되었다. 이번에는 누나가 아무런 말도 없이 오랫동안 멀리멀리 가버린 것이었다. 마을 곳곳에서 여느 때처럼 드문드문 온갖 이야기들이 터져 나왔다. 입이 한가한 자가 수도 없이 많아서 그때마다 소문은 기괴했다. 어떤 사람은 누나가 남자에 목말라서 여러 사람들과 관계를 맺었다고 말했다. 또 어떤 사람은 뚝 누나가 결혼 시즌에 끊이지 않는 폭죽 소리를 견디지 못했다고도 말했다. 서른다섯 살 여자에게 이렇게 차고 건조한 바람이 쌩쌩 부는 계절이라니!

(......)

그 옛날 뚝 누나가 마을에서 가장 예쁘고 재능 있고 일도 잘했다는 걸 기억하는 이는 그들 중 몇이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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