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 방을 비우는 일虛室을 일러 견성見性이라고 했다. 색즉시공이든 극기복례든, 그것은 근본적으로 ‘빈방’의 체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른바 하얀 것生白을 그 징표로 여긴다. 워낙 견성이나 오도悟道라는 게 애매모호해서 정한 이치를 참월僭越하는 작란이 잦아 말썽이긴 하지만, 그래도 대체로 그렇게 정리할 수 있다. 그러나 방을 비웠다고 해서 저절로 보살도가 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방室을 비운 다음에도 마당庭에 나오자마자 자빠지는 이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삶은 타자들과의 쉼 없는 응하기이며 그 속에서 아름다움을 구하는 것이므로, 관건은 방이 아니라 오히려 마당인 것이다.
방이 무위無爲와 허적虛寂의 교실이라면, 마당은 유위有爲와 상생相生의 현장이다. 절망의 인간들이 지망지망, 왁달박달거리는 시전市廛 속에서는, 방 속에서 겪었던 무無와 공空이 한순간 아득해지며, 그 체험의 기억 속에서 여전히 바뀌지 않는 몸은 어긋나고 나둥그러진다. 이제는, 여기는 마음의 청정이 아니라 몸의 현명이 문제가 되는 세속인 것이다. 이를 유교적인 개념으로 치환하자면 인정仁庭, 즉 마당을 인仁으로써 대하고 다스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심학으로는 흐르는 견성이나, 한결같이 지식을 쟁이는 데에만 몰려가는 학행이 절반의 공부에도 이르지 못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64~65쪽)
- <허실인정虛室仁庭> 중에서
1.
김영민의 저술을 읽는다는 것은 지적으로 긴장하겠다는 것이다. 애매하고 두루뭉술한 일상어의 세계에서 벗어나 잘 조탁된 언어의 세계로 들어가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들어간 언어의 세계에서 방향을 잃고 방황하겠다는 것이다. 방황을 하되, 조금은 들뜬 마음으로, 조금은 각성하면서, 새로운 길을 찾아보겠다는 것이다. 나에게 김영민은 그런 철학자이고, 김영민의 저술은 그런 세계이다.
예를 들어 맨 처음에 인용한 구절을 찬찬히 읽어보라. 방과 마당의 대비로 이어지는 그의 논리를 따라가 보라. 그렇다면 자신의 공부가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천천히 깨닫게 된다. 김영민에게 인간의 언어로 만들어 놓은 개념의 세계는 깨달음의 영역이 아니다. 대비되는 개념이 실상은 불이不二의 세계를 간신히 포착해 낸 순간의 작란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그리하여 모든 대비되는 개념들이 녹아 하나가 되는 무화의 경지를 글 속에서 느끼며 환희를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그의 언어는 반어와 역설로 새롭게 조어된다. 이 책의 핵심 개념인 '알면서 모른 체하기' '무의식의 기원에서 보기' '창의적 퇴행'이 그렇게 조탁되었다.
2.
김영민의 책을 읽으면 이전의 자신을 해체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신의 상태를 리트머스 시험지에 녹여 보는 것이다. '모르면서 아는 체' 했던 자신을 반성하고, '알면서 모른 체하기'의 세계로 넘어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인식의 영역이 아니라 실천의 영역이고, 마음의 영역이 아니라 몸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바꾸는 일이기 때문이고, 일상에 성실을 더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쉽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것이 공부가 아니겠는가.
3.
그 공부의 시작은 늘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넘어가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하루하루 새롭게! 일상을 수련처로 삼아, 일상에 정성을 다하면서.
"나는 신발을 잘 벗는 것도 중요하게 친다. '시작은 인간의 최고의 능력'(한나 아렌트)이라고 한다면, 신발을 신고 나가는 것만이 시작이 아니라, 신발을 벗고 들어오는 일도 또 다른 시작이기 때문이다. 월요일 밤이면 나는 지친 몸으로, 영원히 배은망덕한 세속을 뒤로한 채 내 초라한 아파트의 문을 연다. 그 어둠 속에는 따뜻이 맞아주는 개 한 마리도 없지만, 나는 내 신발을 조용하고 야무지게 벗는다. 그리고 속으로 중얼거린다. '시작이다.' (69쪽)
4.
다 읽었다. 1장까지는 깨우침이 있었으나, 2장과 3장은 비몽사몽이다. 괜찮다. 모른다는 것도 매력적인 상태다. 독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