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문득 영호는 깨달았다. 격변의 시대를 살아왔으면서도, 자신의 삶은 늘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을. 돌이켜보면, 그의 또래들은 언제나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기 바빴다. 노래방이 없었던 80년대 후반까지 술집에서는 목청껏 노래를 불렀고, 옆자리에 노래를 기가 막히게 부르는 사람이 있으면 술과 안주를 시켜주는 게 흔한 풍경이었다. 목욕탕에서는 생판 모르는 사람들끼리 웃으며 서로의 등을 밀어주었고, 기차를 타면 초면인 사람들이 눈인사를 주고받다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함께 담배를 태우며 술을 마시다가 죽이 맞으면 전화번호를 교환하기도 했다. 그런데 90년대 들어 사회가 변화하면서 그런 문화들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고, 사회 변화의 양태를 설명하는 신조어들이 끊임없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영호가 가장 적응하기 힘들어했던 것은 장례문화의 변화였다. 장례식장에 가면 고스톱을 치면서 밤을 새우는 게 당연했는데, 어느 순간 다들 차가 생기면서 밥만 먹고 일어나는 게 흔한 풍경이 되고 말았다. 영호가 봉건적 삶의 틀에서 벗어나서 빠르게 변화는 세상의 속도에 따라갔더라면 아내와 헤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끊임없이 자책도 했다. (181~182쪽)
1.
책이 왔다. 따끈따끈한 신간이다. 스토리공장(공장장 김한수)이 쓴 <마이카시대>(펜타클)이다. 천기누설을 하자면, 나는 이 책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이 책의 원고를 읽은 사람이다. 왜 아니겠는가? 김한수 소설가와 나는 오래전부터 동고동락한 문우이기 때문이다. 내가 책을 내기 전에 초고를 제일 먼저 읽혔던 사람이 김한수였고, 김한수 역시 자신의 소설이 나오기 전에 원고를 나에게 보내왔다.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최초의 독자이자 원고 검토자이기도 하다.
물론 이번에 낸 책은 김한수의 단독 창작이 아니라 나도 익히 알고 있는 소설가들이 대거 참여한 소설집이다. 주제는 하나. 자동차다. 물론 자동차에 대한 전문서가 아니라, 자동차를 둘러싼 민초들의 이야기이다. 단편소설이다. 나는 이 소설들을 A4용지의 원고로 읽었는데, 이번에 버젓이 종이책으로 다시 읽으니 느낌이 확실히 다르다. 물감(物感)이 다르니 감동도 다른 식으로 다가온다.
2.
스토리공장의 공장장(김한수)은 이렇게 말한다. "스토리공장은 급속한 변화를 몸과 마음으로 겪으며 살아온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스토리로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우주는 초당 수십 킬로의 속도로 팽창하고, 하늘에는 수천 개가 넘는 인공위성이 총알보다 빠르게 날고 있어도, 오늘도 퇴근 시간을 기다리며 지루한 오후를 견디고, 술 마시고 노래하고 사랑에 울고 웃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보려고 합니다."
이게 이 책의 의도라면 성공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소설을 읽으며 작가의 과거사가 떠올라 몰입하기 힘들었지만.^^) 책에 등장하는 자동차는 모두 15종이다. 포니 엑셀, 제네시스 G80, 카니발, 마티즈, 록스타, 프라이드, 삼륜차, 투싼, 스쿠프, 그랜저, 아반떼, 포텐샤, 아우디 A6, 포터. 아쉽게도 나의 차는 없다. 나는 엑센트로 운전을 배워, 엘란트라로 초보시절을 넘기고, EF 소나타로 자가용 생활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으며 웃고 울 수 있었던 것은 마이카 시대를 살았던 바로 첫 세대라서 인가보다. 차를 처음 구입했을 때의 셀렘, 그 차가 처음 사고로 망가졌을 때의 낭패감, 가족과 여행했을 때의 추억, 강의를 하기 위해 새벽부터 밤까지 지방을 달렸을 때의 긴장감 등이 이 책을 읽으며 새록새록 떠올랐다.
3.
책이 내 손에 들어오기 전부터 출판사에서, 작가에게서 전화가 여러 차례 왔다. 책은 잘 받아봤냐고. 여기는 낙도라 책이 도착하기까지 한참 걸린다고 대답했다. 그리하여 산 넘고 물 건너 바다 건너서 이 책이 나에게 도착했다. 책을 받아보니 동료 작가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오랜만에 책을 냈으니 함께 술 한 잔 하고 있겠지. 신간이라 많이 팔리기를 기원하면서. 노벨상 작가도 아니고, 인기소설도 아니지만, 이 책 좀 많이 팔아주시라.
가난한 작가들의 밥값, 술값이라도 할 수 있게. 나도 덕분에 한 끼 한 잔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게!
4.
나의 추천사는 너무 낯이 뜨거우니 유명한 작가 두 분의 추천사를 그대로 옮긴다.
이 소설은 작가의 입담이 구성지고 걸쭉하여 아주 재미있게 읽힌다. 한국의 산업화는 느리게 진행되다가 ‘마이카시대’가 열리면서 고속성장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차를 갖는다는 것은 자신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것, 마이카들이 씽씽 경쾌하게 달리면서 산업화를 빠르게 밀고 나갔던 것이다. 이 소설에는 여러 차종이 등장하고, 그 차들을 모는 사람들의 삶의 내력도 각양각색이다. 대개 넉넉지 않은 서민들인데, 가난에 주눅 들지 않고, 명랑쾌활하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한 신고의 노력 끝에 마침내 마이카를 획득하고 내달리는 모습들이 여간 경쾌하지 않다. ‘미친 듯이 경쟁하고, 미친 듯이 술을 마시며’ 살아낸 그들이었다. 마이카의 질주는 산업화 시대를 관통해 마침내 민주화 시대로 진입하는데, 그 과정에서 소설 속 등장인물은 아기자기한 에피소드를 만들어낸다. 작가의 너그럽고 해학적인 언어 구사가 독자의 마음을 후련하게 해 준다.
- 현기영 (소설가)
88올림픽을 앞둔 무렵이었을 게다. 방송에서는 연일 마이카시대가 곧 도래할 것이라 떠들어댔다. 마이카시대란 그러니까 머나먼 자본주의의 표상과 같은 것이었다. 진짜 그런 시절이 올 거라 대부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우리에게는 마이카보다 민주주의가 더 절박했다. 부족하나마 민주주의의 시대가 도래했고, 마이카시대도 도래했다. 나는 마이카가 참으로 요긴한 시골에 산다. 자차를 소유한 사람들이 늘면서 군내버스도 시외버스도 현저히 줄었다. 그래서 더욱 마이카에 의존하게 된다. 마이카로 인해 잊혀진 것들, 사라진 것들이 많다. 스토리공장의 소설은 마이카시대를 열어젖히기 위해 달려온 아버지 세대의 노고를 되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가만히 묻는다. 이제는 행복하냐고. 어린 안내양의 두 팔에 안긴 채 짐짝처럼 실려 가던 만원 버스, 그 안에서 풍겨오던 사람 냄새가 그리워지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