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센터 첫 방문, 내가 여기에 오게 되는구나.
종합심리 검사(풀배터리 검사)
정서, 인지, 사고, 행동습관, 생활방식 등을 측정할 수 있도록 여러 종류의 심리검사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종합심리검사 총집 또는 full-battery 검사(full-battery test, FBT / Full Battery Assessments)라고도 부른다
예정되어 있던 사전 상담일. 아이 방과 후 시간이 빠듯하다. 늘 그렇듯 시간에 쫓기는 날은 유난히 차가 막힌다. 왠지 상담 시간이 타이트하게 잡혀있을 거 같아서, 조급한 나의 마음과는 별개로 아이는 옆에 앉아 조잘조잘 또 이야기를 한다. 예전에는 우울한 아이는 표정도, 목소리도, 눈빛도 확연히 드러나지는 않더라도, 어딘가에 우울한 기운을 깔고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오늘 점심 급식이 맛있었다며, 친구 누구가 자기한테 하이퍼라고 놀렸다며, 발그레해진 볼로 머리에 땀이 송송 차서 열심히 떠드는 아이. 아이의 우울감을 둘러싼 일련의 상황들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어려움이 이거였지 싶다. 내 눈에 보이는 아이는 그 전후가 다름이 없어서.
상담사 선생님이 남자일까 걱정하더니만, 다행히 선한 인상의 젊은 여자분이다. 아이와 상담을 하는 동안 사전 설문지를 작성했다. 유아기부터 초등학교까지 연도별 아이의 정서특성과 선생님의 코멘트를 적으라는 항목이 있다. 헐.. 이걸 어떻게 기억하지? 한편으로는 내가 너무 무심했던 건가?
기억을 짜내고 짜내서 적어보지만 쓸 수 있는 말이 몇 개 되지 않는다. 무난했고, 순하고, 수용성이 높고, 다만 친했던 친구가 전학이나 이민을 가서 항상 절친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고. 기가 센 여자애들에 치여 힘들어한 적도 있고. 적다 보니 양육자에 대한 적는 부분이 많다.
맞다. 지금은 당연히 나랑 남편만 생각했지만, 아이는 태어나서부터 열 살, 내가 길게 휴직하기 전까지 친정엄마의 품에서 자랐다. 산후조리원도 가지 않았으니, 태어난 그 순간부터 아이는 어미새처럼 할머니를 따랐다. 아이가 어릴 때는 주양육자가 엄마였고, 지금도 세 명의 공동육아 같은 느낌. 딸은 유독 외할머니를 닮았고, 그래서 엄마는 정을 듬뿍 주었다. 아이의 소식에 놀라고 걱정한 엄마.
약 이삼십 분, 잘 기억나지 않는 머리를 쥐어짜서, 삐뚤빼뚤 손글씨로 설문지를 작성했다. 문득 둘러보니 더 어린 나이의 아이들이 많이 보인다. 뉴스나 인터넷에서만 보아봤던 남의 일이라 생각했던 일이 내게 생겼다. 막상 닥치고 보니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겪고 있는 문제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 궁금해하는 나의 마음이 무색하게, 아이스티가 있어서 좋다고 헤벌쭉 웃으면서 나오는 너. 그러면서 귓속말로 "엄마, 나 배고파~" 도대체 너란 녀석.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의 상담이 이어졌다. 주로 설문지 내용을 토대로 질문을 주고받았다.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그간의 경과와 아이의 성향. 그런데 하다 보니 나의 투병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진다. 내가 의식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실제 선생님이 관심을 가진 건지. 그게 아이한테 영향이 있었던 걸까? 반년도 전의 일로 마음의 생채기가 남아 힘들어할 정도로 여린 아이라, 몇 년 전의 엄마의 투병도 그렇게 아프게 남아있는 걸까? 설마... 보통 때라면 쿨하게, 아니겠지~ 하고 넘겼을 소소한 것들이 그 순간을 기점으로 백배, 천배 증폭되어 마음을 심란하게 한다.
종합심리검사, 풀배터리 검사는 사전 설문의 양도 많고, 당일에도 면담을 포함해서 최소 4~5시간이 소요된다고 했다. 결과 해석에 2주. 검사부터 결과를 듣기까지 한 달이 소요된다. 혹여나 그 사이 아이가 딴 맘을 품지 않을까 그게 가장 걱정이었다. 참지 못하고 조급하게 물었다. 일의 특성상 '절대'라는 표현은 쓰지 않았지만, 에둘러서 괜찮을 거라 말한다. 그래, 당연히 그래야지..
사전 설문을 모바일로 할지, 종이설문으로 할지 선택해야 한다. 선생님은 내가 아닌 아이에게, 아이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순간 아이가 이제 많이 자랐구나. 네가 자라는 만큼, 엄마가 보호자로 설 부분은 점점 작아지는구나 싶다. 한편으로 이만큼 커주어 기특하고, 한편으로 살짝 멀어진 듯 마음이 허하다.
처음 태어나면 24시간을 오롯이 부모에게 의지한다. 부모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 그러다가 차츰 혼자 걷고, 스스로 밥을 먹고, 이야기를 하고, 친구를 사귀고, 좋아하는 옷 스타일도 생기고... 유치원에서 친구와 싸운 일, 속상한 일 무엇이든 다 나누던 사이지만, 어느 순간부터 야금야금 엄마가 알지 못하는 비밀이 하나씩 생기고, 엄마도 좋지만 친구도 좋은... 머리로는 다 알면서도, 나도 그렇게 컸으면서도, 막상 엄마가 되어 바라보는 아이의 몸과 마음의 자람은 조금은 어색하고, 아쉽기만 하다.
시종일관 내 마음과는 전혀 결이 다른 너. 이제 정말 배가 고파 쓰러지겠단다. 배고픔이 사춘기의 분노로 변해갈 무렵 검사 예약을 마치고 나섰다. 검사는 2주 뒤, 아이는 요즘 세대답게 모바일을, 나와 남편은 종이 설문을 택했다. 문항수가 너무 많아서 틈틈이 하려면 종이가 낫다 싶었는데, 주관식도 있다. 악필인 남편은 본인의 글씨를 못 알아볼 거라고 걱정한다. 내가 봐도 그렇긴 한데... 여하튼 그렇게 한 뭉텅이의 설문지를 받았다.
첫 사전 상담은 약 70분, 상담비는 10만 원. 시간당 비용으로는 상당하다. 아이 문제라는 다급함이 아니었다면, 선뜻 상담을 예약하기는 어려웠을 금액. 그리고 이어진 엄마의 욕심. 아이는 공감력이 높고, 다른 사람의 일에 관심이 많다. 오호라! 집에 오는 길에 아이를 꼬셨다. 임상심리상담사 선생님 멋지지 않냐고! 누군가를 도울 수도 있고, 너도 좋아하는 일이고. 수학은 필요 없냐고 해맑게 묻는 아이에게, 사람의 마음은 독심술로 읽어내는 게 아니고, 임상통계도 해야 하니, 수학은 필수라는 돌직구 엄마.
여하튼 우리나라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에 비용을 지불하는데 너무 박하다고(컨설팅이나 경험 나눔 등) 생각해 왔지만, 막상 상담비를 결제하고 보니 음.. 음..
검사 비용은 당일 결재, 결과 상담 포함 75만 원. 이 또한 아이 문제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직진하기는 어려웠을 금액이다. 그래도 단순히 우울감뿐 아니라 아이의 성향이나 주위 양육 환경(가족)까지 종합적으로 진단해 주기 때문에, 이후 진로나 가족관계에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아직 실제 경험한 게 아니기 때문에 부디 그 돈의 몇 곱절만큼 가치가 있기를 바라는 중이다. 부디~~
아직 검사를 한 것도, 구체적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는 모른다. 그래도 검사 예약을 한 뒤로는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아마도 한 달 안에 큰일이 나지 않을 거라는 우회적이지만, 듣고 싶은 말을 듣게 되어서인지도... 이제 다시 긴장 풀고 보통 때처럼 해야지. 그러니 딸아, 이제 수학 숙제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