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의 피구, 폭언. 또 한 번 폭풍이 지나갔다.

딸아, 널 지키는 수호천사는 항상 대기 중이란다.

by 나르샤

아이가 심리적으로 어려움이 있다는 걸 알게 된 뒤로는, 가급적 스트레스를 주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 수포자의 문턱에서 건져 내기 위해 쏟았던 노력도 포함해서. 너무 24시간 감시해도, 너무 느슨해도 안 되는 밀당의 상태.


그래도 한 번 뒤통수를 맞고 보니, 뭣이 중한가. 그냥 건강하게 자라주기만 하면 되지. 미적분(실상 중학생이라 아직 1차 방정식이지만) 몰라도 사는데 지장 없지 않은가. 이렇게 대범한 엄마 마인드로 세뇌 중이었는데..


그렇게 조심조심 살얼음 걷는 기분이었는데, 사건은 뜬금없이 엉뚱한 곳에서 일어났다.

아이의 체육 시간. 언젠가부터 피구가 무서운데 너무 자주 한다고, 한 번은 배를 세게 맞아서 아프다 했는데. 그래도 수업이니 요령껏(?) 잘 피해 다니라고 도닥였었다. 개인적으로 난 피구가 싫다. 어릴 때야 생각 없이 했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람 몸을 맞추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 하는 게 스포츠인가. 여타 다른 구기 종목 축구, 배구, 야구 등 그 어느 것도 사람 몸을 타깃으로 하지는 않는다. 아이 학교에서는 피구가 학교 축제이고, 지역 대회에서 우승도 하는 피구 명문이란다. 아 놔..


여하튼 사전 상담이 있던 날 집에 오는 길에 아이가 말했다. 학교에서 엄청 울었다고. 이건 또 뭐래. 가뜩이나 심난한 애한테 도대체 무슨 일이. 자초지종은 이러했다. 오늘도 역시나 피구를 했고, 밖에서 애들이랑 놀다가(수업에 집중하지 않은 건 맞음) 공에 맞아서 안경테가 휘어졌단다. 너무 아파서 샘한테 말랑한 공(연습용공)으로 바꿔 달라고 했는데, 엄청 혼이 났단다. 나중에 아이의 기억 + 주변 친구들의 증언(?)을 모아보니..


- 피구가 장난이냐?

- 네가 잘못한 걸 왜 공탓, 남 탓을 하냐?

- 네가 가만히 있지 말던가

- 시합 중인데 너 때문에 애들이 피해보잖아.

- 너 그렇게 살지 마


제일 충격적이었던 마지막 멘트. 그렇게 살지 말라고? 이제 열세 살 여자아이한테? 내가 중학생이었던 90년대라면 이 정도는 애교에 불과할 수 있지만, 실상 그보다 백배 더 심한 일들도 많았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2025년인데... 우리 애는 안 그래도 마음이 힘든데... 회초리로 때려야만 폭력이 아니라, 이게 언어폭력이구나.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상황. 그리고 아이는 교실로 돌아와서 한참을 울었단다.


처음에는 그저 다음에는 딴짓하지 말고, 공을 잘 피하라고. 선생님이 좀 심한 거 같다고 아이를 다독였다. 그런데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이건 좀 아니다 싶었다. 딸바보인 남편이 듣자마자 극대 노한다. 당장 학교에 쫓아갈 기세다. 내가 너무 옛날 잘못된 관행에 젖어서 사리분별을 못했나 보다. 이건 부모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일인데. 원래도 이런저런 챙겨야 할 일이 많았는데, 딸아이 일로 어수선한 상태에서 또 하나가 얹혔다.


큰 아이가 고등학생이 되도록, 딱히 학교생활에 문제가 있었던 적이 없었는데... 뭘 해야 할지 몰라 여기저기 수소문했다. 다행히 지인 중 중학교 선생님들이 있다.


1) 일단 담임선생님한테 연락해서 상황 파악 요청

2) 필요시 교과목 선생님 면담

3) 필요시 교감 선생님 면담


우리가 원하는 건 명확했다.

1) 그날 상황에 대한 이해

2) 안경 낀 아이가 얼굴에 공을 맞았는데 조치가 되지 않은 것에 대한 설명

3) 폭언에 대한 해명


여하튼 담임선생님과 몇 번의 연락이 오가고, 1차적으로 체육 선생님이 설명을 들었으나 충분치 못했다. 막무가내로 불만을 표현하려던 건 아니다. 아이가 잘못한 부분은 사과드리고 싶었고, 폭언은 설명이 필요했다. 대면 상담을 요청했다. 그렇게 처음으로 민원상담실을 방문하게 되었다. 요즘 선생님들도 힘들겠다 싶다. 민원상담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니. 도대체 얼마나 많은 민원이 있길래. 어쩌다 보니 나도 그중 한 명이 되었지만.


일반적인 선생님 상담과 달리, 마치 청문회처럼 4 각형으로 놓인 책상. 교감선생님, 담임 선생님, 체육 선생님, 그리고 남편과 나. 30대 초중반의 남자 선생님. 내 눈을 쳐다보지 못한다. 전화 통화상으로도 본인이 감정이 욱해서 실수한 부분을 인정했었다. 아주 못된 사람은 아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었구나 싶다. 아이는 위축돼서 돌아섰고, 선생님은 본인을 무시한 거라 오해했던...


한 시간여 면담이 이어졌다. 우리로 치면 직장 상사 앞에서, 고객의 대리인한테 잘못했다고 대놓고 말하기는 쉽지 않겠지. 모호한 말 끝맺음에 남편이 살짝 화를 냈고, 내가 보기에 할 수 있는 범위에서 그는 최선의 표현을 한 것 같다. 이후에 아이가 정서행동특성검사 관심군이라는 말을 전해 들었으니 아마 속으로 앗차 했지 싶다.


어차피 우리도 전학까지 불사할 상황이 아니고, 3년간 아이를 맡겨야 하는 입장이다. 학부모가 아니라, 일반적인 사회관계에서 이런 정도의 일이 발생했다면 아마 이대로 마무리하기 어려웠겠지..? 시대가 달라져도 애 맡긴 죄인이라는 말은 그 정도가 좀 덜할 뿐 여전히 유효하다. 피구는 선수들끼리만 하게 하면 안 되냐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참았다. 내가 생각하는 범위에서 최선의 예를 갖추기 위해.


2주간 전화통화의 상당 부분을 할애했던, 열불도 나고, 걱정도 됐던 또 한 번의 폭풍이 다행히(?) 이렇게 지나갔다. 막상 마무리되니 별 거 아닌 것 같았는데, 정신적으로, 시간적으로 소모가 컸던지 긴장이 풀린다. 큰 숙제를 하나 해결한 듯한 느낌. 무탈한 삶이 밋밋해 보여도 행복 그 자체라는 걸 또 이렇게 역으로 깨닫는다.


그래도 딸이 느끼지 않았을까. 무슨 일이 있을 때, 억울할 때, 누가 뭐래도 편들어주고 슈퍼맨처럼 보호해 줄 가족이 있다는 걸. 그러니까 언제든 숨기지 말고, 힘들 때도, 즐거울 때도 엄마한테 꼭 이야기해 주렴.


* 애지중지 손녀딸의 이야기를 들은 친정엄마는 열불이 나서 잠을 설쳤단다. 나와 남편이 가지 않았다면 학교에 쫓아갔을 거라고도 했다. 어릴 때 친오빠는 몸이 약했다. 초2 어린애를 촌지를 주지 않는다고 괴롭히던 담임(그 시절엔 그랬다.) 운동장에서 맞다가 쓰러진 오빠 소식에 엄마는 슬리퍼 바람으로 학교에 쫓아갔다. 바로 교무실로 돌진해서 체육선생님의 싸다구를 날렸다. 150센티에 40킬로도 안 되는 자그마한 몸으로. 그대로 멱살을 잡고 교장실로 직진해서 무릎을 꿇고 사과하게 만든 우리의 수호천사. (결국 그놈은 다른 학교로 쫓겨갔다. 이 대목은 몇 번이고 상상해 봐도 대단하다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칠순이 넘었지만, 엄마는 아마 사랑하는 손녀를 위해서라면 언제든 원더우먼으로 변신할 것이다. 그러고보니 울 딸 체육선생님, 운이 좋으셨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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