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봄 Jun 13. 2022

나도 찍고 싶다. 백일 사진

1학년 어린이들의 백일을 축하합니다.



  지난 목요일은 우리 어린이들이 학교에 입학한 지 백일이 되는 날이었다. 오랜만에 가르쳐보는 1학년이라 요즘은 백일을 챙기는 트렌드가 있다는 걸 몰랐다.


1학년 감을 잃었다.

미리 알았다면 간식거리라도 준비해 나눠줄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당일 아침, 그것도 출근 후에 백일 소식을 듣고 준비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부장님께 백일 기념 왕관과 칠판에 붙일 축하 메시지 파일을 받아 급하게 인쇄했다. 문구만 붙여도 그럴듯해 보인다. 됐으.


  등교한 어린이들은 '백일을 축하합니다.'라는 칠판 문구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누구의 백일이지 아무도 몰랐다. 재밌다. 눈치 없는 귀여운 어린이들. 역시 너희들은 1학년.


  수업 2시간을 훌훌 털어 왕관을 만들고 개인 기념사진을 찍었다. 진도 늦었는데 또 딴짓을 했다.


  세상 제일 포근한 이불 밖으로 용감하게 나와 커다란 교문으로 등교해서 4교시, 5교시 딱딱한 책상에 앉아 엄마 생각나는 것도 꾹 참고, 집에 가고 싶은 것도 꾹 참고 백일을 보냈다. 우리 어린이들이 애 많이 썼다.


  처음 등교하는 어린이들을 제로 베이스에서 백일만큼 가르치느라 나도 쪼~끔 애쓴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나도 백일 기념샷을 남기고 싶었다. 마지막 어린이의 사진을 찍어주고 자리로 돌아가려는 어린이 손을 붙잡고 간절한 눈빛으로 말했다.


"선생님도 한 장 찍어주라~(각도 잘 잡아서...)"


그 모습을 본 다른 어린이들이

"선생님 저도~ 저도 같이 찍어요~"

하며 우르르 몰려왔다.


"얘들아, 잠깐만~ 선생님 한 장만 먼저 찍..."


 '찰칵'

  

다 같이 쏴리 질러~

  칠판에 무슨 글자가 붙어 있었던 거니? 사진 윗부분을 가린 거대한 손바닥(사진을 찍어준 어린이의 것으로 짐작된다.). 그 밑에 내 큰 머리와 각각 조금씩 가린 어린이들 머리가 보인다. 열광적인 콘서트 현장 사진 같기도 하다.


"세이 백! 일!"


"백! 일!"

"세이 예예예~"


  진도를 못 나가 다음날부터 교과서를 달려야 했다. 그래도 잘했다 싶다. 어린이들 마음에 반짝이는 좋은 기억 구슬이 하나 더 생겼을 거라 믿기 때문이다.   

저기 구슬 하나에 선생님도 함께하기를



  하굣길, 모두 자랑스러운 백일 왕관을 쓰고 멋지게 걸었다. 교문까지 어린이들의 손을 잡고 가는데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졌다. 내 뒤에서 우리 반 개구쟁이 어린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좆나 비 온다."


깜짝 놀라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목소리를 최대한 깔고 물었다.

"뭐라고? 지금 뭐라고 한 거야?"

해맑은 얼굴을 하고 대답했다.


"좋은 날 비 온다고 했는데요?"

아, 김 선생 귀에 마귀가 들어앉았다. 지난번《가슴을 뛰는 소설》을 읽은 후로 "이 새끼가 씨발 좆나 사랑한단다!"는 남학생의 지독한 고백을 잊을 수가 없다. 'ㅈㄴ'라는 문제의 낱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아~ 저리 가 저리 가. 어쨌든 어린이들에게는 '좋은 날'이었다는 해피엔딩.

 

https://brunch.co.kr/@009e6b1ce84c4ca/52

<남학생의 지독한 사랑 고백이 있는 글>

작가의 이전글 2022 SS 급식실 친환경 바디 크로스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