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단편집

영면

by 박요한

그대여, 오늘도 영면에 이르셨나요?

소년은 자주 그 말을 마음속으로 더듬었다. 입술이 아니라, 뼈와 뼈 사이의 얇은 막으로. 혀가 닿지 않는 곳에서만 들리는 문장. 그 문장은 어쩐지 베개 속 솜처럼 부드럽고, 오래된 성냥처럼 마르고, 병실의 새벽처럼 냉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밝았다. 여름 장마가 걷히고 물웅덩이에 하늘이 거울처럼 박히던 날, 마음에 드는 친구가 생기면 이유도 없이 손을 잡아끌어 집으로 데려오던 아이. 사람을 좋아했고, 사랑을 받는다는 말을 다른 빛깔의 공기처럼 들이마시던 아이. 하지만 어느 겨울, 이름이 길고 발음이 서투른 병이 그에게 왔다. 소년의 몸은 불쑥 낯선 식물처럼 그의 삶 속에 돋아났다. 그 식물은 침대의 난간을 더듬고, 수액의 맑은 관을 따라 올라갔다. 학교보다 병원이 더 가까운 지명이 되었고, 수업 종소리 대신 심전도의 파형이 낮은 파도처럼 흘렀다.

오랜만에 학교로 돌아간 날, 그는 몸을 작게 말았다.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뛰어오를 때마다 흙먼지가 떠올랐다. 그 먼지는 아이들의 웃음과 섞이고, 그 웃음은 소년의 이름을 피해 흘러갔다. 그는 밀림의 가장자리에 몸을 숨긴 작은 동물 같았다. 기척을 줄이고, 발자국을 남기지 않고, 위장처럼 웃었다. 연필을 쥔 손끝이 투명해질 만큼 조용히.

그렇게 시간이 흘러 예술고등학교에 갔을 때도, 그는 무대의 중앙보다 무대 뒤 검은 장막에 더 마음이 갔다. 그는 연기를 ‘사랑한다’는 말을 쉽게 하지 않았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그에게서 한 손가락만큼 떨어진 공기층처럼 만져지지 않았다. 다만 생존, 그거면 충분했다. 장막 뒤에서 조용히 대사를 확인하고, 정해진 곳에 정확히 서고, 실수 없이 퇴장하는 것. 관객의 박수가 큰 비보다 가벼운 이슬이면 좋겠다고, 소년은 생각했다. 이슬은 적시되 젖지 않는 법이 있으니까.

그의 삶은 ‘착하다’는 단어로 둘러싸였다. 흰 종이에 연필이 차곡차곡 누적하는 흑연처럼 그 말은 그의 이름 주변에 쌓였다. 착한 학생, 착한 후배, 착한 친구. 그의 웃음에는 모서리가 없었고, 그의 목소리는 늘 반음 낮게 깎여 있었다. 뭔가를 강하게 욕망하는 대신, 욕망의 윤곽을 매끈하게 지웠다. 좋아함과 미움의 날을 둔화시켜, 안전한 둔부로 만들었다. 아버지의 새벽과 성실을 베껴 썼고, 그 필체는 내용보다 더 또렷하게 남았다. 소년은 자신이 아니라, ‘좋은 사람’이라는 외피를 살아냈다. 외피는 다치지 않았지만, 속살은 꽃피지 못한 채 자꾸 잠들었다.

병실의 창문에는 밤마다 별이 몇 개씩 붙었다. 간호사가 들어와 커튼을 반쯤 닫고 나가면, 별은 커튼의 천을 통과하여 둔하게 번졌다. 그때마다 소년은 속삭였다. ‘그대여, 오늘도 영면에 이르셨나요?’

그가 묻던 ‘그대’는 누구였을까. 죽음 가까이에 있던 자신의 장기였을까, 한때 밝았던 여덟 살의 손바닥이었을까, 아니면 한 번도 제대로 어른이 되지 못한 채 ‘착함’이라는 이불 밑에서 오래 잠들어 있던 한 사람의 이름이었을까.

학교에서, 그는 한 번도 무대의 중앙을 원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말하는 대신 다른 이의 자리를 메웠다. 빠진 나사를 대신하고, 무너질 수 있는 모서리를 받쳤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건 그저 무대의 균형을 지키는 일’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원한다는 말은 너무 뜨거워서, 손에 쥐면 살이 델 것 같았다. 그러니 그는 원하지 않음으로 자신을 보호했다. ‘나는 큰 욕심이 없다.’ 그 말은 방패였지만, 동시에 입구를 봉하는 벽돌이기도 했다. 벽돌은 차갑게 빛났고, 그 빛은 그의 눈 속에서 매우 예의 바르게 흩어졌다.

계절이 네 번쯤 바뀌고, 소년은 스무 살이 되었다. 병의 이름은 여전히 길었지만, 통증은 예고 없이 찾아오다가 예고 없이 사라지는 습관을 조금 고쳐 앉았다. 그는 오래 굴러다닌 조약돌처럼 표면이 매끈해졌고, 어둡거나 밝은 일에도 쉽게 흠집 나지 않았다. 그 사소한 완만함이 그를 살게 했지만, 살아 있다는 증거 또한 무뎌졌다. 심장은 멀쩡히 뛰고 있는데, 가끔 심장 대신 다른 것이 뛰는 것 같았다.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오래 숲 속에 숨어 있던 작은 동물이, 가끔 기척을 남기며 가슴 벽을 톡톡 두드리는지 몰랐다.

어느 날, 학교에서 졸업 공연을 준비하며 그는 처음으로 중앙을 지나가야 했다. 무대감독은 동선을 바꾸지 않았다. 소년의 발에 붙은 그림자도 바뀌지 않았다. 다만, 소년의 눈빛이 약간 달라졌다. 스포트라이트가 켜지기 전에, 무대 뒤에서 그는 손을 모았다. 기도와 비슷한 모양이었으나 기도는 아니었다. 그는 마음속에서 오래 불러온 문장을 천천히 옮겨 적었다. ‘그대여, 오늘도 영면에 이르셨나요?’

그는 문장 뒤에 쉼표를 하나 더 붙였다. 그리고 아주 낮게, 거의 들리지 않게 덧붙였다. ‘이제 그만 쉬어도 돼.’

그 순간 소년은 알았다. 영면은 죽음의 다른 말이지만, 어떤 날엔 ‘끝까지 잠들지 못하는 것’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는 것을. 오래도록 잠든 척하느라 깨어 있던 것들

좋은 사람의 외피, 누구에게도 미움받지 않으려는 낮은 호흡, 말끔히 닳아진 돌 같은 얼굴—그것들이 실은 잠들어야 할 존재라는 것을. 그대여, 라고 불렀던 대상은 자기 안에서 낡고 선량하게만 살아남아, 생을 대신 살아주던 가면이었다. 그 가면은 착했고, 그래서 위험했다.

그대여 오늘도 영면에 이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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