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음

그는 눈 덮인 설산 한 가운데 서 있었다

by 두부언니


wind 01



Topˏˋ cardamonˏ petitgrainˏ blood orange

Midˋˏ snowˏ orange blossom

Baseˏˋ mossˏ tonka beanˏ amber





가시거리는 고작 3m였다. 겨우 몇 걸음 앞으로 길게 뻗은 벌판이 보일 뿐이었지. 하얀 눈으로 뒤덮인 벌판은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도화지 같았다. 그 밋밋한 도화지 위로 눈발이 사납게 흩날렸다.


J는 방한복을 파고드는 찬바람을 막기 위해 옷자락을 바짝 여미었다. 하지만, 짙은 남색의 방한복은 설산의 눈보라를 막아내기엔 충분하지 않았다. 방한복으로 가리지 못한 두 귀가 차가운 바람에 떨어져 나가는 듯했다. 어쩌면 귓바퀴 정도는 이미 떨어져 나간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J는 생각했다. 얼굴에서 점점 감각이 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설산을 얼마간 헤매었을까. 불현듯 전방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보였다. 그녀는 어깨와 목을 동여매었던 헝겊을 단단히 고쳐 매고는 두 눈에 힘을 주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분명 사납게 불어닥치는 눈보라 너머에 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J는 귓바퀴만큼이나 감각이 없어진 두 발을 이끌고 더디게 앞으로 나아갔다. 눈밭을 디딜 때마다 엄지 발가락이 사라진 듯한 비현실적인 감각이 발 끝에서 온몸으로 번져갔다. 처음엔 엄지, 그다음엔 발목과 무릎을 타고 올라온 한기에 온 몸이 얼음장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나무의 거대한 덩치 덕에 그 아래는 비교적 눈보라가 잠잠해 보였다. 그녀는 안간힘을 쓰며 나무 가까이 다가갔다.


jonathan-knepper--lWKt2RKz50-unsplash.jpg


키가 큰 나무 아래 도착한 J는 고목에 등을 기대고 여전히 눈보라가 거센 벌판을 바라보았다. 눈을 감으니 안 그래도 사납던 벌판의 울음이 더욱더 웅웅대며 귓전을 때렸다. 그녀는 입과 코를 답답하게 막고 있던 헝겊을 느슨하게 풀었다. 오래된 헝겊에 배어 있던 온기가 설산의 공기와 만나 일순간 차갑게 식어버렸다. 뜨거운 숨으로 달아올랐던 목덜미가 찬 공기를 만나 숨을 들이쉴 때마다 묘한 단내가 났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고목을 올려다보았다. 침엽수였다. 설산의 한 복판에서도 수 갈래로 뻗어 있는 가지에는 녹음이 듬성듬성 덩어리져 있었다. 그 위로 두껍게 눈이 쌓여있었기 때문에, 아래에서 올려다보아야 겨우 보이는 녹음임에도 불구하고 선연한 나무향이 그녀 주변을 서성였다. 차갑게 식었던 목덜미에 서서히 열이 오르기 시작할 즈음, 그녀는 고목에 등을 기댄채 주저앉았다. 더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정면에 서 있는 어떤 실루엣이 시야에 들어 온 것은.


그것의 신장은 얼핏 180cm 정도로 보였다. 처음에는 눈보라가 소용돌이치며 만들어내는 용오름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굴곡이 없는 실루엣이 그녀에게서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했을 때였다. 그것은 그녀와 고목이 있는 반대 방향으로 멀어져 갔다. 설산에 혼자 남겨지는 것이 두려웠던 그녀는 두 다리에 힘을 줘 자리에서 일어섰다.


nathan-fertig-scbYOgVyb8Q-unsplash.jpg


J는 그것의 형체를 분간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를 두고 그 뒤를 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 앞에 작은 오두막이 나타났다. 눈보라를 피할 용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그곳은 사실 오두막이라는 말보다는 헛간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어쨌든 마침내 눈보라를 피할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J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 안으로 몸을 피했다. 헛간 안에는 좀 전의 그것이 먼저 와 있었다. 방의 중앙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그것은 성인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두 눈만 간신히 내놓은 채로 온 몸을 꽁꽁 동여맨 그녀와 달리, 그는 네모진 어깨며 팔꿈치와 무릎의 관절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정도로 얇은 옷가지를 걸치고 있었다. 그는 저토록 얇은 옷가지를 몸에 걸치고 설산을 나다녔던 것이다. J는 목에 두르고 있던 헝겊을 한 겹 풀어내어 그의 목에 둘러 주었다. 그는 가만히 서서 자신의 목에 헝겊을 둘러주는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erik-mclean-qU6Ll_rowmA-unsplash.jpg


얇게 덧댄 나무벽 밖에선 눈발이 불규칙적으로 진동했다. 곧 눈보라가 그칠 것이다. 눈보라가 잠잠해지면 그녀는 다시 설산으로 나설 것이다. 두꺼운 방한복을 두르고 손목이며 발목과 목덜미에 헝겊을 칭칭 감아 찬바람 한 줄기 몸에 닿지 못하게 꽁꽁 동여맬 것이다. 그리고 헝겊 한 겹 만큼 더해진 추위를 견딜 것이다.




Noteˏ
강렬한 / 차가운 / 카다멈 / 무거운 / 설산의 / 어딘가 녹음

차가운 듯하면서도 묘한 나무 냄새가 매력적인 향입니다. 사실, 첫 향이 강렬해서 약간의 부담스러움이 있었습니다만, 처음의 그 강렬함 덕분에 뒤이어 나무와 허브의 향이 은은하게 올라오는 것 같아요.

카다멈과 모스, 앰버의 향이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탑과 미들의 시트러스 계열이 그 무게감을 중화시키고 있어 밸런스가 좋다고 생각합니다. 차가운 설산을 지나, 눈보라를 피할 작은 공간으로 인도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이 글은 paffem의 'wind 01. 투명한 바람'향수를 테마로 작성된 단편 소설입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