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mon crevasse

레몬 크레바스

by 두부언니


wind 03



Topˏˋ bergamotˏ tangerineˏ pink pepper

Midˋˏ jasmineˏ sandalwood

Baseˏˋ amberˏ vanila





발아래로 하얀 크림이 자꾸만 번진다. 발을 디딜 때마다 번번이 설산화가 미끄러졌다. 간간히 엉겨있는 설탕의 알갱이가 밟혀, 부서지는 소리가 잘그락 잘그락 끊이질 않았다. 어디로 눈을 돌려도 설경이다. 크림을 디딜 때마다 레몬향이 확 하고 끼쳐왔다. 녹진한 레몬크림 향기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건조한 바람이 끊임없이 불어왔다. 뒷골이 당기게 하는 단내 덕분에 바람은 더욱더 건조하게 느껴졌다.


백색의 대지가 반사해내는 태양빛에 눈이 멀 것만 같았다. 새하얀 크림 위에 간간히 박혀 있는 파편이 빛을 받아 간헐적으로 반짝였다. 손으로 파편을 들어 올려 가만히 살펴보니, 그것은 바싹 말려놓은 레몬 껍질이었다. 길고 가늘게 잘린 레몬 껍질이 사방에 널려있었다. 아마도 발을 디딜 때마다 끼쳐왔던 녹진한 레몬의 향기는 바닥에 깔려 있는 껍질들 때문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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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질 때를 기다려 이동해야 한다. 영하 40도를 넘나드는 추위이긴 하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낮보다는 밤 시간대의 저온에서 이동하는 쪽이 안전할 것이다. 조금 전에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크레바스를 만났다. 이 근방은 큰 균열이 없는 안전지대였는데, 관측되지 않았던 거대한 균열이 일어난 것이다. 운이 좋아 발아래가 꺼지는 일은 면했지만, 앞으로도 운이 좋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최악의 경우, 바닥이 설탕 지대가 아닌 바다일 수 있으며, 그렇게 된다면 다시는 이 대지 위로 올라와 크림을 밟지 못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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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은 지구에서 가장 큰 사막이다. 설탕과 크림으로 뒤덮여 있지만, 강수량이 적어 사막의 기후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갑작스럽게 만난 설탕 사태로 인해 나아온 방향을 잃었지만, 저 앞에 검붉은 체리가 알알이 박힌 산등성이를 기준으로 하면 지금의 위치를 파악하기가 한결 수월할 것 같았다.


체리가 보이는 방향에서 묵직하고 달큰한 향기가 실려왔다. 장미향을 닮은 그 향기는 짧게 다가왔다가, 곧 휘발되어 청량한 과일의 향기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해가 저물기까지 아직 수시간이 남았다. 조금 거리가 떨어진 곳에서 아까의 크레바스를 만났을 때와 유사한 굉음이 들려왔다. 크림이 녹고 있다. 수세기 동안 유지되어왔던 환경이 몇 해 전부터 변하기 시작했다. 크림이 녹는 속도는 점차 빨라지고 있었다. 어쩌면 밤이 와도, 이 곳을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Noteˏ
마들렌 / 레몬 버터 / 크림 / 파우더

베르가못과 바닐라가 만나, 레몬 마들렌을 연상케 하는 향입니다. 처음 향을 맡는 순간, 꾸덕한 마들렌 반죽에 레몬 껍질과 녹인 버터를 넣고 휘휘 젓는 모습이 떠올랐어요. 그런 이미지를 배경으로 표현하여 적극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코로나도 그렇고, 국지성 호우와 일반적이지 않은 강우량 등, 아열대성으로 변해가는 우리나라의 기후도 그렇고, 여러모로 걱정이 많은 시대를 지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에게 미안하지 않은 환경을 물려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 글은 paffem의 'wind 03. 오후의 디저트'향수를 테마로 작성된 단편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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