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봉에 올라

천자봉에서 내려다 본 가을풍경

by 이천우

천자봉에 올라


천자봉에서 남해 바다를 바라본 풍경



나는 거의 매일 반려견 사랑이를 데리고 웅산 중턱에 오른다. 그 길에서 들고양이들과 자주 마주치기도 하고, 바람의 냄새를 바꾸는 계절의 변화를 감지하곤 한다. 하지만 오늘은 웅산의 영봉 천자봉 정상까지 올랐다. 처음부터 마음먹은 건 아니었다. 단지, 바람이 어제보다 살짝 느리게 불어왔고, 그 틈으로 스며든 햇빛이 나뭇결을 따라 사선으로 흐르는 걸 본 순간, 오늘은 더 멀리 걸어가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르막 초입, 발밑에 쌓인 낙엽과 그 위를 덮은 솔잎이 바스락거린다. 흙은 바싹 마르고, 작은 자갈들이 깔려있어 발끝을 건다. 이름 모를 나무들은 갈라진 껍질 사이로 진한 향을 흩뿌리고, 오래 묵은 소나무들은 붉은 속살을 드러낸다. 멀리서 짠 냄새가 실려 온다. 남해 바다의 염분이다. 나는 이 냄새들을 하나하나 들이마시며 내 몸을 계절에 맞춘다. 감각이 깨어나고, 숨이 차오른다. 어느새 나는 이 계절 속에 완전히 동화되고 있다. 시간의 바깥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안에.


임도까지 오르면서 사랑이는 꼬리를 반원으로 그리며 앞서 걷다가 자주 나를 돌아본다. 가파른 오르막에서 사랑이를 안아 등산가방에 넣기로 했다. 굽이마다 작고 붉은 점들이 눈에 띈다. 단풍이란 이름을 달기 전, 나무들이 먼저 신호를 띄운다. 가지 끝 연두색 잎이 노랑, 주황을 거쳐 붉음으로 잎맥을 타고 안쪽으로 스며든다. 계절은 늘 끝에서부터 오는 듯하다. 중턱을 지나자, 여름의 무더위를 견뎌낸 나무들이 한결 가벼워진 옷차림으로 서 있다. 나무가지 사이로 벌어진 틈마다 서로 다른 금빛이 반짝인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 빛은 흔들리며 작은 손짓처럼 다가온다. "조금만 더 가보자."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나는 그 손짓을 따라 다시 걷는다.


바위가 불쑥 튀어나온 지점을 돌아 데크로 된 계단을 오르는 순간, 시야가 확 트인다. 하늘이 열리고, 잎과 잎 사이로 잊고 지낸 시간들이 스쳐간다. 미뤄왔던 일, 잊고 있던 말, 다짐했던 것들이 바람에 실려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 같다. 산의 생명들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다만 소리를 내면서도 서로 배려하며 공존할 줄 안다. 우리도 그 리듬에 맞춰 걷는다. 광석골 쉼터 근처, 내가 '왕눈이'라 부르는 들고양이가 햇살을 받으며 바위에 앉아 있다. 눈인사만 나누고 지나친다. 이 산에는 말보다 더 많은 마음의 언어가 있다.


천자봉으로 향하는 마지막 고비 만장대 철쭉 숲 옆 벤치에서 잠깐 멈춰 선다. 정상 표지석을 스치듯 지나 난간에 손을 얹자, 가을이 한 장의 지도처럼 펼쳐진다. 가까이는 단풍의 붉음과 노랑이 층층이 겹쳐 있고, 아래로는 들녘이 마지막 빛을 털어내고 있다. 멀리 아파트 단지들이 촘촘히 늘어서 있고, 도로는 은색 연필로 그은 선 같다. 시선을 더 멀리 밀어내면 드디어 남해 바다가 나타난다. 오늘의 바다는 얌전한 호흡을 반복하며 은빛 비늘을 끝도 없이 반짝인다. 햇살 각도가 바뀔 때마다, 물결은 작은 알전등처럼 켜졌다가 꺼진다. 그 장면은 마치 거대한 자연의 합창처럼 느껴진다. 푸른 하늘과 선명한 지평선 아래, 파도는 조용한 리듬으로 반짝이며 진해만의 너른 풍경을 품고 있었다. 멀리 펼쳐진 산줄기와 골짜기, 마을의 논밭과 도로들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나는 가방에서 사랑이를 조심스레 꺼내 품에 안았다. 천자봉 표지석 옆에 섰을 때, 사랑이의 작은 체온과 부드러운 털이 가을바람과 함께 와닿는다. 그 순간을 기록하듯 사진 한 장을 남겼다. 맑고 선명한 하늘 아래, 나는 사랑이와 함께 이 계절의 가장 높은 곳에 닿아 있었다. 표지석은 ‘천자봉’이라 새겨져 있었고, 그 곁에서 나는 내 삶의 어떤 정점 하나를 조용히 밟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귀를 기울이면 또 다른 지도가 펼쳐진다. 진해만에서 들려오는 뱃고동 소리, 어디선가 깨어나는 오토바이의 짧은 굉음, 솔밭 안쪽에서 딱다구리가 나무를 두드리는 규칙적인 울림,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귐. 먼바다의 파도 소리가 산의 호흡과 겹쳐 자연의 합주를 만든다. 오늘은 천자봉 아래 만장대 철쭉 숲 근처 데크 무대에서 초로의 웅천초등학교 54회 동창들이 단합대회를 열고 있다. 자연 속에서 펼치는 동창회원들의 구성진 노래가 정겹다. 나는 사랑이를 등산 가방에 담아 앞으로 안은 채 천자봉을 향해 마지막 오르막을 오른다. 철쭉 숲을 지나 지그재그로 누비는 오르막길에는 마대 깔판이 깔려 있어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그 길 위에서 만난 마지막 나무 계단은 마치 하늘로 이어지는 듯 곧고도 단단했다. 그 계단을 하나씩 오르며 나는 오늘 웅산이 내게 보여준 장면들을 가슴 깊이 새긴다.



산은 고요하지 않다. 다만 소리들이 서로를 방해하지 않는 방식으로 존재할 뿐이다. 완벽한 침묵이 아니라 조율된 울림으로. 삶도 그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누구도 완전히 조용할 수 없다. 다만 서로의 소리를 존중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배워야 할 리듬이 아닐까 싶다.


하산길에 접어들자, 풍경은 또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여름 장맛비에 넉넉했던 개울은 바닥의 돌들이 드러날 만큼 얕아졌지만, 그 안에 자란 이름 모를 풀들이 더 깊은 인상을 준다. 나무는 잎을 덜어내며 능선의 골격을 드러낸다. 사랑이는 내 가슴에 안긴 채 숲의 바람에 코를 내밀고, 나는 그 체온을 천천히 느낀다. 큰 것을 본 눈이 이제 작은 것을 읽는다. 군데군데 솟아오른 버섯들, 마른 산딸기 줄기의 미세한 광택, 바람에 실린 솔 향기의 농도. 웅산의 풍경은 늘 그대로이지만, 바뀐 것은 내 시선이다. 내가 그 안에서 무엇을 보려 했는가, 그것이 곧 내가 보는 풍경이 아닌가.


오늘 본 장면들을 오래 간직하고 싶다. 그래서 세 가지 다짐을 했다. 첫째, 오르막에서는 호흡을 길게 하고, 내리막에서는 무릎 각도를 낮춰 걸음의 속도를 늦추며 풍경을 지울 만큼 서두르지 않기. 둘째, 사진 몇 장과 문장 몇 줄로 오늘을 기록하고, 고양이와의 만남과 개울의 풍경을 이웃과 나누며 자연을 소유가 아닌 관계로 받아들이기. 셋째, 작은 봉투 하나를 챙겨 눈에 띄는 비닐을 줍고 내려오기. 그것은 작지만 분명한 돌봄이다.

해가 기울며 은빛 풍경은 금빛으로 옮겨 탄다. 진해만 바다는 마지막 반짝임을 조용히 털어내고, 산그림자는 해안선 어딘가에 길게 드리워진다. 나는 배낭의 지퍼를 닫고 사랑이를 챙긴 뒤, 허리벨트를 조여 하산을 준비한다. 하지만 발걸음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다. 마음 한쪽엔 아직도 정상의 바람, 그 청량하고 맑은 숨결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열 때, 그 바람이 먼저 나와 집 안 공기를 갈아 주기를, 오늘 본 은빛 물결이 내일의 문장에 스며들기를 바란다. 언젠가 다시 이 자리에 설 수 있을까. 그것은 알 수 없지만, 오늘만은 분명히 느꼈다. 이 웅산의 가을은 나를 비워내고 다시 채우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풍경은, 오랫동안 내 마음속을 천천히 흘러내릴 것이다.

필자가 천자봉에 올라 남해 바다쪽 전경을 바라본다.


#웅산등산
#천자봉풍경
#가을산행
#반려견과함께
#남해바다전망
#자연속사유
#일상기록
#느린삶
#풍경에멈추다
#마음의속도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