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아침은 마음이 먼저 깨어난다. 달력은 같은 날짜를 가리키는데, 공기만은 다르게 느껴진다. 나는 일찍 집을 나서 웅산으로 향했다. 겨울 산길은 말이 없다. 대신 숨이 보이고, 발밑 낙엽이 바삭하게 눌린다. 찬바람이 손끝을 찌르지만 하늘이 맑으면 몸이 덜 움츠러든다. 오늘이 그랬다. 맑은 하늘 아래서는 같은 추위도 ‘견딜 만한 추위’가 된다.
산책을 마치고 늘 들르던 곳으로 갔다. 들고양이 밥을 주는 자리다. 밥그릇이 비어 있으면 괜히 마음이 불편하고, 밥을 채워두면 내 쪽이 더 안심한다. 거창한 선행이 아니라 생활의 약속이다. 산이 겨울 준비를 하듯, 나도 들고양이를 위해 작은 일을 챙기며 하루를 정돈한다. 이 사소한 동작이 내 성탄절을 여는 첫 장면이 되었다.
집으로 돌아와 성탄 중심미사에 참례했다. 미사는 늘 같은 형식인데, 이날 내 마음 상태에 따라 무게가 달라진다. 오늘은 “푸근하다”는 말이 딱 맞았다. 기도는 현실을 바꾸는 주문이 아니라, 내 마음의 방향을 바로잡는 일이라는 걸 나는 이제 안다. 미사를 마치고 나오니 세상이 조금 훈훈하듯 느껴지고 덜 거칠게 보였다. 두 번째 장면은, 말없이 마음이 제자리를 찾는 순간이었다.
점심을 일찍 먹고 우리 부부는 부산으로 향했다. 모스크바 라 클라시크 발레단의 <호두까기 인형>을 보기 위해서였다. 겨울에는 늘 공연 제목이 비슷해도, 그 ‘비슷함’이 오히려 좋다. 해마다 같은 계절이 오고, 같은 이야기가 다시 펼쳐진다는 사실이 사람을 안정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길은 늘 변수가 된다. 교통이 막히면 마음이 급해지고, 급해지면 짧은 말이 나온다. 우리는 혼잡한 길을 건너고 “무사히 가자”에 초점을 맞추며 공연장에 잘 도착했다. 다소 늦게 입장했는데도 관객들은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 침묵이 오히려 공연의 예고편 같았다. 로비에는 빨간 배경의 배너가 크게 걸려 있었고, 웃는 눈사람 조형물이 반짝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장식이 과하지 않게, 대신 또렷하게 분위기를 돋우고 있었다. 부산의 밤은 그렇게 또 하나의 장면을 준비하고 있었다.
오늘은 관람 자체보다도 동행이 특별했다. 아내의 부산여고 동기분들과 함께 관람하는 자리였다. 게다가 경성대 최교수님 부부가 티켓을 선물해 주셨다. 선물은 물건이 아니라 ‘시간’을 통째로 내어주는 일이라는 걸, 나이가 들수록 더 분명히 알게 된다. 공연을 마친 후 덤으로 아내 친구분들께 인사를 드릴 수 있어 좋았다. 공연 한 편을 함께 본다는 건 그날의 기억을 공유하자는 뜻이다. 나는 그 호의를 가볍게 받지 않으려 마음속으로 한 번 더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 이날의 따뜻함은 무대 위 뿐만 아니라, 사람 사이에서도 먼저 시작되고 있었다.
막이 오르고 음악이 흐르자, 나는 금세 무대에 빨려 들어갔다. 발레는 말이 없는데도 설명이 충분하다. 발끝으로 버티는 순간, 팔의 각도, 멈춤과 이동의 타이밍이 감정을 만든다.
<호두까기 인형>의 줄거리는 사실 단순하다. 크리스마스 이브, 마리(혹은 클라라)가 파티에서 선물로 호두까기 인형을 받는다. 밤이 깊어지고 집이 잠들자, 장난감들이 살아 움직이며 환상이 시작된다. 생쥐왕과 쥐 군단이 나타나 소동이 벌어지고, 호두까기 인형은 병정들과 함께 마리를 지키기 위해 싸운다. 마리가 용기를 내는 순간, 인형은 ‘왕자’로 변하고, 둘은 눈의 나라를 지나 ‘과자의 나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스페인, 아라비아, 중국, 러시아 등 여러 춤이 펼쳐지며 축제가 이어지고, 마지막엔 화려한 피날레 속에서 꿈이 마무리된다. 깨어나면 모든 게 꿈 같지만, 마음엔 분명히 남아 있는 꿈. 그래서 이 작품은 이야기보다 분위기와 장면이 더 오래간다.
그리고 바로 그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장면들”이 오늘 무대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군무가 한 번에 쏟아져 나올 때, 사람들은 순간 ‘규칙’이 아니라 ‘파도’를 본다. 똑같은 동작이 반복되는데도 기계처럼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숨결이 생기며 긴장이 고조된다. 한 발이 나가고 다른 발이 받쳐주며, 줄이 맞는 듯하다가도 미세하게 흔들리는 그 찰나가 살아 있다. 특히 눈송이들이 무대를 가득 메우는 장면에서는, 춤이 ‘움직임’이라기보다 ‘계절’의 흐름처럼 느껴졌다. 무용수들이 몸으로 겨울 공기를 만들어내고, 관객의 호흡까지 조용히 낮춰 놓았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솔로가 공간을 바꾸는 순간이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팔을 들어 올리는 각도 하나로 ‘기쁨’이 되고, 잠깐의 멈춤 하나로 ‘그리움’이 된다. 속도를 올리는 동작보다, 오히려 멈춤이 더 어렵다는 걸 그때 알았다. 딱 멈추어야 할 자리에 멈추고, 다음 움직임으로 넘어갈 때 흔들림이 없는 것. 그 완벽한 전환은 말로 설명하면 밋밋해지는데, 눈으로 보며 느끼니까 가슴이 먼저 반응한다.
그런데 이날의 감동은 무대 위에서만 끝나지 않았다. 공연 내내 내 뒷자리에 젊은 부부가 앉아 있었고, 그 사이에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어른처럼 숨죽이지 않고 즐기고 있었다. 대신 솔직한 말이 먼저 나왔다. 막간이나 장면이 바뀌는 순간, 아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아름다웠어.” 그 짧은 한마디가 내 가슴에 그대로 와 닿았다. ‘아름답다’는 말은 흔하다. 그런데 아이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은 꾸밈이 없어서 더 정확했다. 분석도 평가도 없고, 다만 ‘그대로 받은 감정’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듣고서야 내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지 다시 자각할 수 있었다. 기술의 완성도나 작품의 유명세가 아니라, 사람 마음을 건드리는 순수한 순간이 바로 여기 있구나 싶었다. 그 아이의 한마디는 무대에서 흘러나온 음악처럼 잠시 공중에 떴다가, 내 안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이날 내가 붙잡은 ‘한 장면’은, 사실 무대가 아니라 객석 한켠에서 태어났다.
나는 어느 순간, 오늘 하루가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져 있다는 걸 절감했다. 아침의 산길, 들고양이 밥 주기, 미사 참례, 그리고 저녁의 공연에 이르기까지. 겉으로는 서로 다른 활동인데, 중심은 같다. 마음을 가다듬는 일, 누군가를 챙기는 일, 그리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 젊을 때는 ‘특별한 날’이 큰 이벤트로 완성되는 줄 알았다. 지금은 다르다. 특별함은 오히려 소박한 장면들이 끊기지 않고 이어질 때 생겨난다.
공연이 끝나고 밖으로 나오니, 성탄의 들뜬 분위기와 겨울 찬 공기가 어울려 내 얼굴을 정면으로 때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따뜻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내와 나는 공연 장면을 길게 평가하지 않았다. 대신 “감동적이었다” “고마웠다” 같은 짧은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나이가 들면 감탄은 길어지기보다 정확해지는가 보다.
성탄절은 들뜨는 날이지만, 나는 오늘 들뜸이 ‘흥분’이 아니라 ‘정돈’ 쪽으로 기울어 있는 게 좋았다. 산에서 한 번 숨을 고르고, 미사를 참례하며 마음을 바로 세우고, 공연장에서 아름다움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모든 사이사이에 최교수님 부부의 호의가 느껴졌다. 다시 한번 고맙다는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다.
우리의 성탄은 거대한 사건이 아니었다. 대신 몇 개의 장면이 있었다. 산길의 숨, 밥그릇을 채우는 손, 미사 후의 푸근함, 그리고 객석에서 들린 아이의 한마디. “너무 아름다웠어.” 그 말이 남긴 여운 덕분에, 나는 올해 성탄을 이렇게 기억할 것 같다. 우리의 성탄, 한 장면.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