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정이 견뎌온 슬픔과 사랑의 기록-
삶을 되돌아본다는 건, 상처를 다시 들여다보는 일이다.
하지만 그 상처 속에는 분명히 사랑이 깃들어 있다.
우리는 아이 셋을 낳았고, 둘만 곁에 남았다.
짧은 생으로 떠난 셋째 아이 안드레아,
그를 가슴에 묻은 채 남은 두 딸을 위해 살아냈다.
부부는 맞벌이와 학업 속에서도 서로를 놓지 않았고,
자식은 부모의 기도 속에서 자신만의 길을 찾았다.
죽음과 고통, 눈물과 기도 속에서도
우리는 결코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 기록은 단순한 가족사가 아니다.
사랑과 신앙, 용서와 회복의 여정에 대한 이야기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비슷한 시간을 견뎌내고 있을 누군가에게
이 글이 작은 위로가 되기를 소망한다.
우리는 아이 셋을 낳았지만, 둘만 곁에 남았다.
연년생 두 딸을 키우던 그 시절, 삶은 그 자체로 숨 가쁜 전쟁터였다. 나는 국립창원대학교 경제학과 전임강사로 재직하면서 박사학위 논문을 작성하고 있었고, 아내는 진해중학교 교사로 매일 새벽 첫차를 타고 출근했다. 집안일과 두 딸의 육아는 나의 어머니께서 도맡아 주셨다. 두 손녀에게 젖을 먹이고 재우고 업고 달래는 일까지, 어머니의 수고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시절 어머니의 눈가엔 늘 피로와 사랑이 엉켜 있었다. 당시는 승용차도 귀했기에, 아내는 마산에서 진해까지 꼬불꼬불한 버스를 타고 다녔다. 한겨울이면 감기에 시달리며, 여름이면 땀에 젖은 채 하루를 버텨야 했다. 그러던 중, 아내는 셋째 아이를 임신했다. 지금 생각해도 믿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두 아이도 벅찼는데, 셋째라니. 망설이던 우리는 어느 날 마산 시내 K산부인과를 찾았다. “지금 두 아이도 감당이 어려운데요…” 조심스럽게 내뱉은 말에, 원장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배운 사람이 생명을 포기하겠다는 겁니까?”
그 말씀은 우리에게 아프게 다가왔다. 부끄러움과 감사가 함께 밀려들었다. 우리는 아이를 낳기로, 책임지기로 결심했다. 1984년 8월.
셋째 아이가 제왕절개로 태어났다. 이름은 안드레아.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엄마 뱃속에서 발생한 태아 간염으로 인해 간이 부었고, 그 부은 간 때문에 폐가 덜 자란 채 태어난 아이는 미약한 울음만 남기고 인큐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의사는 “곧 운명할 가능성이 크다”라고 말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동의서에 사인했고, 아내는 아무것도 모른 채 병실에 누워 있었다. 아이가 황달이라며 둘러댔지만, 아내는 점점 이상함을 느꼈고, 결국 사실을 듣고는 기절하고 또 기절했다. 나는 그날의 수술실 상황을 잊을 수 없다. 갑자기 수술실로 불려 간 나는 수술실 상황을 보게 되었다.
하얀 천 위에 놓인 작은 생명, 그리고 그 아이가 으— 하고 내뱉은 희미한 숨소리.
그 울음은 작았지만, 내 심장은 그 울음으로 찢어졌다. 아내는 열 달 동안 아이를 품고, 그토록 기다려
낳았는데,
정작 얼굴도 한 번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안드레아를 하늘로 보내야 했다.
그녀의 통곡은 그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안드레아야.
우리가 널 지켜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
살아 있었다면 지금쯤 너도 누나들과 함께 웃고 있었겠지.
너의 짧은 숨결은 우리 삶을 갈라놓았지만,
그 갈라진 틈에서 우리는 다시 살아야만 했다.
안드레아를 떠나보낸 후, 우리 가족은 그저 살아냈다.
울고 싶은데 마음 놓고 울 수 없었다. 아내는 몸은 퇴원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병실에 남아 있었다. 그 작고 따뜻했던 아이의 온기를 느껴보지도 못한 채, 우리는 빈 보자기와 약봉투만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 안엔
안드레아의 기척이 사라지고, 깊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내는 계속 물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거야?”
“무엇을 잘못했기에, 하느님은 나에게 이렇게도 잔인하신 걸까?”
그 질문은 밤마다 울림처럼 되돌아왔다. 그녀는 성모님께, 예수님께 소리쳐 하소연하며 울었고, 나는 그런
아내를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내의 슬픔은 길고 깊었다.
거의 매일 눈물을 쏟고, 안드레아의 묘지를 찾아가자며 울부짖었다. 우울증이 일상처럼 따라붙었고,
삶은
온통 회색빛이었다.
나는 가을이 되면 국립창원대학교 동쪽 저수지 갈대숲으로 갔다. 그곳에서 사람들 몰래 울었다. 눈물이
마르지 않는 계절이 10년을 넘게 이어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딸들은 잘 자라줬다.
연년생 두 딸은 유치원을 다녔고, 학원에도 다녔다. 초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점심은 인근 식당에 선불로
지불하며 맡겨야 했다. 식당은 늘 바빴고, 우리 아이들은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했다.
우리는 맞벌이였다. 나는 대학 강의와 논문 쓰기, 아내는 수업과 생활지도에 쫓겼다. 아이들에게 따뜻한 점심 한 끼 챙겨주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미안했다. 하지만 하루하루는 참 바쁘게도 흘러갔다.
그러는 사이, 아이들이 다치기도 했다.
공사장에서 놀다가 얼굴을 꿰매는 사고, 장난감 총알에 맞아 흉터가 남은 일. 도둑이 들어와 결혼반지와
돌반지를 훔쳐간 사건.
이 모든 일이 안드레아의 죽음 이후 몇 년 사이에 벌어졌다.
우리는 두 아이를 위해, 다시 중심을 잡아야 했다.
아내는 여전히 눈물 젖은 얼굴로 출근했고,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학생들 앞에 섰다.
하지만 마음속에서 아직도 묻고 있었다.
"우리는 이 고통을 견뎌낼 수 있을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매일 아침 두 딸의 손을 잡고 등교시키는 순간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우리 안에 피어났다.
안드레아를 떠나보내고도 삶은 계속되었다.
남겨진 두 딸은 잘 자랐고, 우리는 멈출 수 없었다.
연년생 자매 바올리나와 에반젤린은 유아원 시절부터 붙어 다니며 자랐다. 함께 피아노 학원에 다니고,
같이 웃고, 같이 울고, 가끔은 함께 넘어지기도 했다. 아이들의 성장 속도만큼이나, 우리 삶의 속도도
빨라졌다.
당시 팔룡초등학교는 오전반과 오후반이 번갈아 가며 운영되었다.
언니와 동생의 등하교 시간이 다르면, 우리 집엔 혼란이 찾아왔다. 특히 활동적인 에반젤린은 종종 오후 수업을 빼먹고 친구들과 놀다가 지각하거나, 아예 깜빡 잊고 돌아오기도 했다. 맞벌이 부모였던 우리 부부는 아이들의 점심을 챙기기 어려웠기에, 학교 근처 식당에 선불을 내고 김밥과 칼국수를 부탁해 두었다. 하지만 손님들로 북적이는 시간에 맞춰 간 어린 자매에게 친절이 돌아갈 리 없었다. 때로는 굶은 채 돌아오기도 했다.
그 시절 우리는 아이들의 하루를 채워주기 위해 학교를 파한 시간엔 학원을 전전하게 했다.
붓글씨, 주산, 미술… 예능 교육이라기보단, 퇴근 전까지의 시간을 책임져줄 ‘대기 공간’에 가까웠다.
아이들은 집 열쇠를 목에 걸고 다녔고, 도둑이 들어 결혼반지와 돌반지를 모두 훔쳐 간 적도 있었다.
심지어는 공사장에서 에반젤린이 떨어져 눈 아래 얼굴을 꿰매는 큰 사고도 있었다. 다행히 눈은
다치지 않았다.
그 당시 우리는 죄책감에 가슴을 치기도 했지만, 하느님은 우리에게 견딜 수 있는 만큼의 고통만 주신 것
같다. 이후 흉터는 거의 알아볼 수 없어졌고, 아이들은 무럭무럭 잘 자라주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자매는 각자의 길을 열어가기 시작했다.
바올리나는 초등학교 4학년 말, KBS창원 어린이합창단에 선발되었다.
그때부터 우리 가족은 매일 마산과 창원을 오갔다. 수업이 끝나면 가족이 함께 만나 버스를 타고 방송국으로 향했고, 연습이 끝나면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승용차가 없던 우리에겐 고된 여정이었다.
합창단 활동은 짧았지만, 바올리나에게 잊지 못할 경험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또래 부모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과시와 비교는 아이에게 상처를 남겼고, 결국 우리는 큰애의
합창단 활동을 접기로 결정했다.
그 후 우리 가족은 창원시 남양동 성원 1차 아파트로 이사했다.
학교와 가까운 덕분에 조금은 여유로워졌지만, 퇴근 전까지의 긴 시간을 아이들 스스로 견뎌야 했다. 우리는 딸들이 위험하지 않도록 매일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두 아이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리고 어느새, 대학 입시의 시간이 찾아왔다.
바올리나는 서강대학교 화학과에 입학했고, 교환학생 자격으로 미국의 곤자가대학에서도 공부했다.
에반젤린은 고려대학교 공업디자인과에 진학해 창의적인 열정을 펼쳤다. 그 후 시카고 예술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디자인과 예술의 본고장에서 새로운 꿈을 키웠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가진 것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두 아이가 자기 길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모습을 보며,
부모로서 견뎌온 시간의 의미를 비로소 되새길 수 있었다.
2006년 12월 6일, 평범한 건강검진 결과가 내 인생을 뒤흔들었다.
김해 장유의 한 병원에서 위내시경을 받고 1주일 후, 나는 재직 중인 학교의 기획협력처장 직을 수행하기 위해 서울 출장길에 있었다. 아내에게서 전화를 받았을 때, 그녀는 여러 번 망설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서울역에 도착할 즈음, 아내는 마침내 말했다.
“당신, 위암이래요.”
그 순간, 시간은 멈춘 듯 흘렀다.
기차 안에서 바깥 풍경이 빠르게 지나가는데, 내 마음은 깊은 어둠에 가라앉았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아내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나는 그 이면에 깃든 충격과 두려움을 읽을 수 있었다.
그날 밤, 서울에 있는 첫째 딸 바올리나의 자취방에서 잠을 청하려 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다음 날 예정된 교육부 회의에 참석했고, 나는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했지만 속은 요동쳤다.
수년간 쉼 없이 달려온 삶.
정년을 10여 년 앞두고 새로운 연구를 꿈꾸던 그때, 죽음의 그림자가 느닷없이 문을 두드렸다.
다행히 모든 것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수술 일정을 잡았고, 2007년 1월 12일 위 절제 수술을 받았다. 위 2/3는 절제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그보다 더 고된 것은 재활이었다.
바올리나의 자취방에서 아내와 두 딸의 보살핌을 받으며, 나는 다시 걷는 법부터 배워야 했다.
처음엔 미음을 먹는 것조차 고역이었다.
먹은 걸 토했고, 속이 쓰리고, 기운이 없고, 세상이 낯설었다.
하지만 나는 결심했다. 누워 있지 않겠다고.
신촌 로터리를 천천히 걷고, 서강대 로욜라 도서관 아래 운동장 둘레를 걸었다.
추운 겨울, 서강대학교 뒷산 노고산을 오르며 나는 내 삶을 하나하나 되짚었다.
죽음 앞에서야, 삶의 결이 보였다.
하루를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 가족이 곁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인지,
그제야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아내는 말없이 나를 보살폈다.
한겨울의 바람 속에서도, 한 숟갈의 죽을 챙기고, 한 발짝의 걸음을 응원했다.
그녀가 있었기에 나는 다시 살아낼 수 있었다.
그녀가 곁에 있었기에, 절망은 끝내 희망의 문으로 이어졌다.
그 시기, 나는 서강대학교 성모동산에 올라 기도를 드렸다.
하느님, 나에게 다시 하루를 주신다면,
이전보다 조금 더 낮고 따뜻한 사람이 되겠다고.
그리고 나는 그 기도에 응답받았다.
죽음의 문턱에서 되살아나,
나는 다시 삶의 의미를 배우기 시작했다.
두 딸이 대학을 졸업할 즈음, 세상은 예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IMF의 그림자는 여전히 짙게 드리워 있었고, 젊은이들에게 ‘좋은 일자리’는 꿈처럼 멀게 느껴졌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안정된 길을 권했고, 아이들은 그 기대를 짊어진 채 또 다른 도전을 선택했다.
처음엔 바올리나가 치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하겠다고 말했다.
대학원에 진학해 전공을 심화하길 기대했던 내게 그 말은 다소 뜻밖이었다.
하지만 딸의 진심을 들은 후에는 응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치전원 입시는 녹록지 않았다. 첫해는 고배를 마셨고, 다음 해도 결과는 같았다.
그 무렵 나는 위암 수술을 마친 직후였고, 일본 동북대학에서 연구교수로 지내고 있었다.
그 시간 속에서 나는 조용히 생각했다.
‘치과의사보다 의사가 더 넓은 길일 수도 있겠구나.’
결국 우리는 새로운 결심을 했다. 바올리나에게 의학전문대학원의 길을 열어준 것이다.
그 후, 딸은 전북대학교 의전원에 합격했다.
전북대병원 근처에 작은 아파트를 구해주었고, 은행 대출을 받은 데다 우리 부부가 힘을 모아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그곳에서 딸은 의전원 4년의 시간 동안 공부했고, 우리는 수시로 달려가 함께 지냈다.
그녀는 지금, 피부과 전문의로 환자를 돌보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기도한다.
“주님, 우리 딸이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의사가 되게 하소서.”
에반젤린의 길은 더욱 험난했다.
디자인을 전공하고 유학까지 다녀온 딸은, 언니의 길을 따라 의학전문대학원에 도전했다.
GRE 시험을 보러 일본까지 다녀왔고, 몇 차례의 낙방을 겪었다.
어느 해에는 ‘후보 1번’에서 미끄러지는 기막힌 상황도 있었다.
그 긴 터널을 지나, 결국 그녀는 경상대학교 의전원에 합격했고, 부산대학교병원과 부산대동병원에서 수련을 마쳐 가정의학과 전문의가 되었다.
이제 두 딸은 각각 다른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고 있다.
하루하루 바쁘고 고된 길이지만, 그 길 끝에서 사람을 살리는 보람을 안고 있다.
나는 기도 속에서 두 딸의 이름을 부른다.
“바올리나야, 에반젤린아… 세상에 아픈 이들을 위해,
무엇보다 따뜻한 마음으로 다가가는 의사가 되거라.”
어쩌면 이 모든 여정은,
하늘나라로 먼저 떠난 셋째 아이 안드레아가
하늘에서 누나들을 지켜보며 이끌어준 것이 아닐까.
우리는 그렇게 믿고, 또 기도한다.
오늘도, 딸들이 환자의 손을 잡고 있을 그 순간에도,
부모의 기도는 멈추지 않는다.
2015년 겨울, 결혼 34주년을 맞아 우리 부부는 오랜 염원을 품고 유럽으로 향했다.
정년퇴직을 3년 앞둔 시점이었다.
한평생을 쉼 없이 달려온 부부의 삶.
그 길 위에서 잠시 멈추어,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고,
하느님의 품 안에서 감사와 회복의 기도를 바치고 싶었다.
여행지는 이탈리아, 스위스, 프랑스 파리, 독일 등이었다.
유럽 대륙의 문화와 역사, 풍경을 따라 걷는 여정이었지만,
우리의 마음이 향한 곳은 분명했다.
바티칸의 심장, 성베드로 대성당.
그곳은 단순한 세계문화유산도, 웅장한 건축물도 아니었다.
우리에게는 오래전부터 품어온 기도의 목적지였고,
무엇보다도 1984년 여름, 태어나자마자 하늘의 별이 된 셋째 아이
안드레아를 다시 마음으로 부르기 위한 순례의 끝이었다.
성베드로 대성당에 들어서는 순간,
웅장한 기둥과 돔을 가로지르며 떨어지는 빛줄기 속에서 우리는 조용히 숨을 죽였다.
그 안에는 설명할 수 없는 고요함이 흐르고 있었고,
그 고요 속에서 우리 마음은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었다.
한 걸음 한 걸음, 통로를 따라 나아가며
우리는 오랫동안 말하지 못했던 그 이름을 되뇌었다.
“안드레아야.”
짧은 생으로 떠나간 아이.
크게 울어보지도 못하고 인큐베이터 속에서 눈을 감았던 아이.
그 아이의 이름을, 이 거룩한 공간 안에서 처음으로 소리 내어 불렀다.
베드로 성인과 안드레아 성인의 동상 앞에서,
나는 동상의 발끝을 쓰다듬으며 기도했다.
“주님, 우리 아이를 저희보다 먼저 데려가셨지만,
그 아이가 하늘에서 우리 가정을 지켜보고 있음을 믿습니다.
두 누나가 따뜻한 마음을 지닌 의사가 되도록,
안드레아가 함께 기도하게 해 주소서.”
특별히 성당 안 안드레아 성인의 조각상 앞에서 우리는 오래 머물렀다.
한동안 말없이 그 얼굴을 바라보다,
조용히 다시 속삭였다.
“안드레아야, 너는 짧은 생이었지만
엄마 아빠의 삶에 깊은 흔적을 남겼단다.
그 흔적이, 우리가 사람을 더 깊이 이해하고,
더 낮은 곳을 향할 수 있게 했단다.”
그날의 기도는 오열이 아닌,
감사의 고백이었다.
우리는 고통을 견디며 걸어왔고,
그 시간 속에서 기적처럼 두 딸이 의사의 길을 걷고 있었다.
하늘에서 너는 그 모든 걸 알고 있겠지.
아빠가 암을 이겨낸 순간,
엄마가 새벽마다 눈물로 기도하던 시간,
두 누나가 고통을 치료하는 손을 갖게 된 날까지.
성당을 나서며, 나는 조용히 속삭였다.
“안드레아야, 우리는 다시 살아갈게.
너의 몫까지 더 따뜻하게, 더 정직하게.”
이제 아이들은 성장하여 독립했고, 우리는 나이 들었다.
가슴 깊이 묻었던 이름을,
성베드로 대성당에서 다시 불렀던 그 순간처럼,
우리의 삶도 언젠가는 하느님 앞으로 돌아갈 것이다.
돌이켜보면, 완벽한 순간은 없었지만
사랑이 있었고, 신뢰는 흔들리지 않았다.
삶은 여전히 반복되지만, 우리는 매일 새로워지려 애썼다.
아이 셋을 낳아 둘만 자랐다는 이 말 안에
우리는 슬픔과 기쁨, 고통과 은총을 함께 담아낸다.
이 글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 앞에서의 고백이다.
안드레아야, 그리고 두 딸아,
엄마 아빠는 너희 덕분에 끝까지 인간답게 살아냈단다.
정말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