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평법한 사람의 일상으로
일상이라는 기적
물 한 잔이 그렇게 귀한 줄, 밥 한 숟갈이 그렇게 고마운 줄, 예전의 나는 미처 몰랐습니다. 20여 년 전, 위암 수술을 받고 서울대병원 병실 침대에 누워 있던 어느 날, 창밖 복도 너머로 오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했습니다. 누군가는 병문안을 마치고 돌아가고, 누군가는 병원 매점으로 요기를 하러 가는 평범한 모습이었지만, 내게는 그 일상이 너무도 아득하게 느껴졌습니다. 걷고, 웃고, 밥을 먹고, 자연스럽게 살아간다는 것. 그 모든 게 내겐 기적 같았습니다. 그저 걷는 일, 삼킨 것을 무리 없이 소화하는 일, 잠들고 다시 깨어나는 일마저 간절했습니다.
그때 비로소, ‘살아 있음’이 얼마나 크고 고마운 선물인지, 온몸으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나는 정년을 마치고 인생의 두 번째 막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새벽 어둠이 채 걷히기 전, 나는 웅산 자락을 오릅니다. 이슬 맺힌 나뭇잎 사이로 바람이 부드럽게 지나가고, 먼동이 트기 전 까치 울음이 산을 깨웁니다.
근처 산기슭 가구에서 들려오는 닭의 울음소리까지 어우러지면, 그 고요한 새벽은 어느새 따스한 생명의 노래가 됩니다. 숨이 찰수록 ‘살아 있다’는 감각이 가슴 깊숙이 번져옵니다. 병실 창가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던 내가, 지금은 그 풍경 속을 걷고 있습니다. 이 순간이 내겐, 더없이 놀랍고 감사한 기적입니다.
요즘엔 아내와 함께 전통시장을 자주 찾습니다. 생선가게 앞에서 파닥이는 고등어를 지나, 나물 좌판 앞에 서서 손끝으로 잎을 만지며 계절을 느껴봅니다. 시장 끝자락 작은 찻집에 앉아 단팥죽을 나누어 먹고, 찻잔에 담긴 보이차를 한 모금 머금은 채 마주 앉은 아내를 바라봅니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통하는 마음, 그 따스한 기운이 잔잔하게 가슴에 스며듭니다. 그녀의 주름진 눈가엔 우리가 함께 견뎌온 세월이 고요히 앉아 있고, 그 앞에서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입니다.
단팥죽 속에 녹아든 삶의 단맛이 이렇게 깊고 짙은 줄, 예전엔 몰랐습니다. 요즘엔 커피보다 차를 더 자주 마십니다. 속도보다 온기를 원해서일까요. 프랜차이즈 카페 대신, 오래된 찻방에 들러 익숙한 차향 속에서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찻잔 위로 피어오르는 김처럼, 내 삶도 다시 조용히 데워지고 있습니다. 아무 말 없이 흘러가던 시간이, 이제는 내게 말을 걸어오는 듯합니다. “이만하면 잘 살아왔다고, 이제는 조금 천천히 걸어도 괜찮다고.”
누군가에겐 아무것도 아닐지 모를 이 일상이, 내겐 오래 기다린 끝에 도착한 축복입니다. 병실 창가에서 그렇게도 부러워했던 ‘보통 사람의 하루’를, 나는 지금 천천히, 정성스레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 있는 이 순간들 앞에서, 나는 오늘도 조심스레 묻습니다.
당신의 일상은 지금, 얼마나 소중한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