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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주리 Mar 30. 2021

평가가 없는 유일한 직업, 주부

일하기 싫어서 주부로 살고 싶다

'전업주부로 사는 것은 사실 편하다’


이 한 문장을 글로 적기까지 정말 오래 걸렸다. 주부이자 주양육자인 내가 이런 문장을 입 밖으로 내뱉는다는 것은 마치 건드려서는 안 될 삶의 금기를 깨부수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전업주부의 노동을 사회에서 인정해주지 않으니 억울하다”, "내가 원해서 전업주부가 된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해왔으면서 이제는 전업주부로 사는 것이 사실 편하다니? 진짜 속마음이 무엇인가?


아주 솔직하게 까 보겠다. 전업주부로 사는 것은 사실 편한 것이 맞다. 물론 하루 12시간 이상의 끝나지 않는 육체+정신노동을 해야 하는 것은 힘들지만, 그 결과물에 대한 평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편하다고 할 수 있다. 자세히 따져보면 사소한 평가들은 당연히 존재한다.



찌개가 왜 이렇게 짜?


남편의 한 마디에 빈정이 확 상한다. 하지만 그 한마디로 인해 전업주부가 본인의 직업을 잃게 되지는 않는다. 집 밖에서 노동을 하고 돈을 버는 직업인은 모두 평가를 통해 그 직업을 유지할 수 있을지 아닐지를 통보받는다. 그에 비해 전업주부는 사소한 빈정 상함은 있을지언정 타인과 기관의 평가를 통해 직업을 잃을 위기에는 처하지 않는다. 프리랜서로 일하며 매 년 평가에 의해 다음 해의 작업 지속 여부를 통보받는 삶을 살았다. 본인이 그만두지 않으면 절대로 짤리지 않는다는 ‘철밥통’ 공무원도 매 년 성과에 대한 평가가 있고 그것을 반영하여 새로운 직무와 직급을 맡게 된다. 하지만 찌개가 짜다는 가족의 평가에 다음 날 식사를 3번이 아니라 11번을 차려야 하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는다.

출처 https://unsplash.com/photos/I4e1cY1I0FQ


그렇다면 다음 평가는? 80년대생이 어릴 적에 집에서 정말 많이 들은 아버지의 말, 바로 이것이다.


도대체 집구석에서 뭘 했길래
애가 이 모양이야?

‘이런 말이 바로 주양육자를 향한 평가 아닌가요?’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애를 그 모양으로 키운 주양육자의 잘못이 아니라, 애를 그 모양으로 키운 양육자 모두의 잘못이다. 주양육자는 아이를 보살펴 자라게 하는 ‘양육’을 주로 하는 사람일 뿐, 아이를 올바르게 키우는 것을 전부 책임지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니 혹시라도 이런 평가에 주눅 들어 있다면 배우자에게 이렇게 말해라.

“당신은 부모로서 정신이 있어 없어? 애를 어떻게 키웠길래 이 모양이야?”

나는 왜 이모양일까..  @bekahrussom /Unsplash





전업주부의 삶에는 이런 사소한 평가들 외에, 주부라는 직업을 뒤흔들만한 절대적인 평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 직업에서 짤릴 일이 없고, 그래서 마음이 편하다. 주어진 12시간의 노동을 어떻게든 해내기만 하면 일은 모두 끝난다. 아이를 낳고 전업주부가 되면서 이 점이 참으로 낯설고 동시에 편했다. 아무도 나의 일에 대해 평가하지 않는다는 것. 신세계였다. 설거지를 아침 먹은 직후에 하든, 남편이 퇴근하기 전에 하든 오로지 내가 선택할 수 있었다. 이틀에 한 번 청소기를 돌리는 것을 집안일의 루틴으로 정했지만 가끔은 삼일에 한번 돌리기도 했다. 남편은 신기하게도 내가 어떤 집안일을 어떻게 하든 간에 별로 관심도 없었고 불만이나 칭찬도 없었다. 아무런 평가가 없었다(그럴 수 있는 이유는 엄마 휴직을 하고 나서, 출퇴근을 하면서부터 나도 점점 깨닫게 됐다. 뒤에서 자세하게 다룰 예정이다) 점점 그 편함에 익숙해졌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 있는 시간 혹은 평일 저녁이나 주말 오후처럼 남편이 아이를 혼자 볼 수 있는 시간에 종종 일이 들어왔다. 꽤나 빠듯하게 일정을 소화해야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남편도 자신이 아이를 보고 있을 테니 편하게 일하고 오라고 나에게 말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감정이 점점 차올랐다. ‘다시 일하기가 두렵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솔직히 나가기 귀찮다’, ‘하루 나가서 돈을 얼마나 번다고.. 그냥 못한다고 할까?’ 시작은 경력 단절에서 온 두려움이었지만 마지막은 솔직하게 ‘굳이 힘들게 일하기 싫다’는 감정이었다. 그럴 때면 “죄송해요~ 아이 때문에.. 좀 어려울 것 같아요”라는 말로 상대의 제안을 조심스럽게 거절했다. “어머~ 어쩔 수 없죠. 아이 키우면서 일하기 어려우시죠~ 그럼 다음에 좋은 기회로 다시 연락드릴게요” 전화기 너머 상대방의 마지막 인사를 들을 때면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았지만 스스로에게 부끄러워졌다. 그렇게 ‘일하고 싶어!!’를 입에 달고 살았는데 막상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오니 아이 탓을 하며 거절했다. 나란 사람은 도대체 뭘 원하는 거야?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전업주부와 주양육자로 살면서 “아이 돌봐야지~”, “남편은 내가 집에 있길 원해”라는 말속에 감춰진

‘일하기 싫어!!’라는 마음이 있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주부와 양육자로 사는 것이 공식적으로 ‘바깥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핑계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애 볼래 밭 맬래, 이 질문을 들을 때면 90%의 답은 “밭 맬래!!”였고, 10%는 “애 볼래..”였다. 20대와 30대 초반, 온몸과 정신을 불 쌀라 노동을 하며 겪은 그 산전수전을 다시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럴 때면 전업주부와 양육자라는 직업을 앞세워 내 몸을 숨겼다. ‘전업주부가 된 게 억울해 죽겠어’라는 말을 하며 속으로는 편하게 웃은 날도 있다. 평가가 없는 유일한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다른 일을 하며 괴롭고 싶지 않은 적이 많았다.


애도 안 보고 밭도 안 맬래..https://unsplash.com/photos/QBpZGqEMsKg



전업주부, 주양육자의 하루는 종일 일로 가득하다. 월 최소 286만 원을 벌고 있다. 아이가 잠들어도, 남편이 출근해도 주부가 해야 할 일은 끝나지 않는다. 이런 현실을 모르고 ‘전업주부는 사실 편하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평가가 있나 없나만을 따져봤을 때, 편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평가 없는 직업이라니, 얼마나 솔깃한가? 그런데 나는 이렇게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왜 자꾸 휴직을 하고 싶어 하는 걸까. 왜 엄마 휴직을 울부짖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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