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구석에서 뭘 했길래 집이 이모양이야?" 에 대한 반박
엄마 휴직은 아주 간단하다. 엄마가 맡고 있던 주양육자+주부의 역할을 아빠와 바꾸면 된다. 전업주부-직장인이 있던 우리 부부는 아빠가 맡고 있던 '바깥양반'의 역할을 엄마가 맡는 것까지 포함하면 된다. 엄마 휴직의 핵심은 부부 중 아무도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서로 동일한 책임을 가진다는 것에 있다. 이번 글에서는 '엄마'의 역할로 수행해야 하는 일들을 남편에게 전달하기 위해 간단히 리스트로 정리해보려 한다.
그렇게나 주부로 살기 싫다며 온갖 불평을 다 하고 있지만, 사실 현실 세계에서의 나는 꽤나 훌륭한 주부다. 집안일도 마치 프로젝트처럼 일정과 원칙, 목표를 정해놓고 정확하게 수행하려 노력한다. 아이를 낳고 주부가 되면서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나의 원칙을 깬 적이 없다. 내 일을 해보겠다며 집안일을 내팽개치지 않았다. 사실 그래도 됐는데, 이상하리만큼의 죄책감이 나를 늘 옭아매고 있어서 언제나 완벽한 주부의 모습을 보여주려 심히 애써왔다.
1) 청소 : 이틀에 한번 청소기를 돌린다. 로봇 청소기를 사용 중이라고 말하면 '거, 살림 편하게 하네'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제는 전혀 그렇지 않다. 로봇이 하든 무선 청소기가 하든 결국 청소하는 동안 사람의 손이 가야 하는 것은 동일하다. 이틀에 한 번씩 집안의 모든 물건을 공중부양시켜놓고 먼지를 흡입한다. 로봇 청소기에 물걸레가 달려있지만 성능이 영 애매해서 일주일에 한 번은 물걸레 청소기를 따로 작동시킨다.
2) 빨래 : 1.5일에 한 번씩 세탁기를 돌린다. 주말엔 1일 3 빨래도 한다(이불 등) 빨래 돌리고, 빨래 개고, 빨래 정리하다 보면 하루가 다 가는 느낌이다.
3) 주방일 : 요리보다는 조리에 가까운 주방일을 한다. 요리에 드는 노력과 비용 대비 결과가 영 마땅치 않아서 맛있다는 반찬가게를 돌아가며 이용한다. 남편이 원한다면 아침에도 국을 데워 밥상을 차려주고, 저녁에도 원하는 메뉴를 준비해서(주문하든, 방문해서 사 오든, 밀 키트를 조리하든) 차려준다. 물론 아이 식사는 별도다. 아침저녁으로 시중을 들며 식사를 대접한다.
4) 장보기 : 일주일에 한 번 쓱배송을 이용하고, 2~3일에 한번 동네 작은 마트에 직접 방문해서 장을 본다. 식재료와 생필품이 떨어지지 않도록 거의 매일 냉장고와 펜트리(라고 쓰고 창고라고 읽는다)를 확인하고 물품 리스트를 적어둔다. 남편의 양말, 아이의 딸기 등 생활에 필요한 모든 장보기는 주부인 내가 담당하고 있다.
5) 기타 : 관공서, 은행 등 방문이 필요한 집안일을 담당한다. 각종 택배를 주문하고, 배송된 택배를 뜯어 정리하는 일도 당연히 나의 몫이다.
늦잠을 자느라 남편의 아침밥을 차려주지 못한 적도 없고(단, 차려달라고 요청한 경우에만 차려준다), 나가서 동네 엄마들과 커피 마시고 노느라 빨래나 청소를 내버려 둔 적도 없다. '어휴, 나는 대충 보이는 곳만 치우고 살아~'라고 말하며 나의 집안일에 대한 노고를 스스로 평가절하해 왔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나는 매일 발을 동동 구르며 화장실 거울의 얼룩을 닦았다. 그것이 주부의 역할이라 생각했다.
3살 아이를 키우며 해야 할 양육 업무들을 간단히 정리해봤다.
1) 등/하원 및 관리 : 오전 3시간, 오후 2시간 동안 등/하원 전후로 아이를 돌본다. 아침에 일어나면 씻기고, 먹이고, 입혀서 등원을 시킨다. 어린이집에 가기 싫다고 떼를 쓰면 동네를 한 시간 동안 산책하다가 겨우 비위를 맞추며 들여보낸다. 하원 후에는 도서관, 마트, 놀이터를 순회하며 매일 뛰어논다. 집에 돌아오면 키즈노트 트 앱과 어린이집 단톡 방에 남겨진 선생님의 각종 코멘트와 요구 사항을 체크하고 다음날 가방을 챙긴다.
2) 양육 관련 업무 : 계절과 아이의 사이즈에 맞는 옷과 신발 등을 미리 구입해서 준비하고, 작아진 옷들은 나눔을 통해 주기적으로 정리한다. 영유아 검진, 예방접종 등 각종 건강관리 및 병원 방문을 미리 체크하고 실행한다. 2주에 한번 구청 장난감도서관에 방문하여 장난감 2점을 대여하고 반납한다. 역시 2주에 한번 도서관에 방문하여 아이 책을 대출하고 반납한다. 한 달에 한번 전집 대여 사이트에서 대여한 전집을 반납하고 다음 전집을 신청한다. 위 업무들의 핵심은 '아이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선택하는 것'이다. 내 맘에 드는 걸로 아무거나 대여했다가는 돈 낭비, 시간 낭비, 정성 낭비로 끝날 가능성이 농후하다. 아이의 기호를 잘 파악하고 광범위한 정보 수집을 통한 최적의 선택을 해야 하는 정신노동이라고 할 수 있다.
3) 양육 정보 탐색 : 발달 시기에 맞는 각종 정보(이유식, 이앓이, 돌치레 등)를 검색하고 정리하여 아이에게 적용한다.
완벽한 엄마가 되겠다는 마음은 처음부터 없었다. 다들 '아이에게 미안해 죽겠어. 엄마가 너무 부족해서.. 더 잘해주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너무 미안해'라고 말할 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하나도 안 미안한데?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생각해.
도대체 뭐가 미안해?? 어떤 부분이??
지금까지 해왔던 것보다 더 잘할 수 있을까? 그런 것이 가능이나 할까? 적어도 나는 그럴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렇기에 양육에 대해서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처음엔 거의 보고서 수준으로 정리해(일자별 체크리스트까지 만들어서) 남편에게 정식으로 전달하려고 했다. 내가 집구석에서 이렇게나 하는 일이 많다는 걸 정확한 수치로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글로 적어 내려가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나는 이렇게 하고 싶었지만 남편은 다르게 하고 싶을 수도 있지. 남편도 나에게 이렇게 해달라고 강요하진 않았으니 나도 그러지 말자.' 엄마 휴직이란 것이 서로의 역할을 바꾸는 것이지, 권주리 아바타를 만들어 두고 집을 나가고 싶은 건 아니니까!
꼭 필요한 정보만 간단히 정리해서 남편에게 카톡으로 보냈다. 무겁지 않게 가벼운 느낌으로. 카톡이지만 12g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가벼운 느낌으로! 그 안에는 키즈노트(어린이집 선생님과 주고받는 알림장 앱) 아이디와 비번, 전집 대여 사이트 아이디와 비번이 포함됐다. 청소를 이틀에 한 번 하든 일주일에 한 번 하든 그것의 너의 몫이다. 나의 손을 떠난 순간 나의 것이 아니다! 아이가 벚꽃이 흩날리는 봄에 기모바지를 입고 등원해도 그것은 너와 아이의 몫이다. 내가 왈가왈부할 영역이 아니다!
남편은 자취 경력 10년의 살림 베테랑이다. 집안일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주양육자로 육아를 담당하는 것은 처음이라 조금 걱정되기도 한다. 그래도 지금까지 훌륭한 아빠(부양육자)였으니 잘할 수 있겠지, 뭐!
이제 내가 나가서 돈을 벌 차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