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과연 아이를 사랑해주었던가.

by 김수빈


새벽 5시 50분, 아이는 잠에서 깨어났다.
갑자기 쉬가 마렵고, 또 물이 마시고 싶다고 한다.
아이의 정신이 너무나 또렷해보이고
또 더이상 잠에 들것 같지 않아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마침 출근해야해서 일어나야 하는 남편이
아이를 화장실에 데리고 가고,
또 물을 따라 마시게하고 방으로 들여 보냈다.

아이의 평소 기상시간은 8시이기에
다시 자자고 이야기를 했고
아이도 누워서 자려고 노력을 했다.

하지만 코도 막히고,
이미 각성이 되어 버린 상태라
정신이 말똥말똥한 아이는
잠이 오지 않는다 했고
나는 짜증을 내버렸다.

아이가 새벽에 잠에서 깨어나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한 순간까지
머릿속에서는 모든 시뮬레이션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내가 잘 자고 있는데, 날 깨운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니가 나를 지금 깨움으로써 나는 몇시간 못자게 되고,
오늘 하루의 컨디션이 결정나게 되고,
이 컨디션으로 내가 밀려있는 과제들을 제대로 해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있을 기말고사에 지장을 초래할 것이다.'

'이틀전까지만 해도 열이났고, 여전히 콧물이 나고 코가 막히는 상황에서
네 컨디션이 여전히 좋지 못한데
어제 너는 밤 늦게까지 놀다 귀가했고,
거기다 새벽에 깨서 지금 안자겠다고 한다.
니가 또 다시 아파지면 너는 또 유치원에 못갈것이고
그럼 그 피해는 고스란히 내 몫이 될 것이다.'

와 같은 시뮬레이션이 자동으로 돌아가기 시작했고
결국 아이의 입장에서 우선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내 입장에서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하며
아이에게 버럭 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당시 같이 들었던 생각은
잠이 오지 않는 것이 네 잘못이 아님을,
너도 너의 생체리듬을 스스로 조절하지 못할텐데 (나 역시도 그러하고)
거기다 컨디션이 안좋으니 새벽에 깬 것일 수 있을 텐데
네 잘못이 아닌데..
라는 생각이었지만
그럼에도 더욱 강하게 들었던 자기중심적인 생각은
이러한 아이의 입장을 묵살해 버리고 말았다.

아이는 이내 시무룩해졌고,
잠이 오지 않는 것이 무슨 죄라도 되는양
내 눈치를 보며 훌쩍이기 시작했다.

보다못한 남편이 아이를 거실로 데리고 나가 책을 읽게 하였고
남편은 출근을 했다.
그리고 새벽부터 내가 일어나는 8시까지
아이는 혼자서 거실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아이땜에 버럭하며 한바탕했기에
나 역시 각성이 된 상태라 잠에 다시 들기가 쉽지 않았다.
거의 30분 이상은 머릿속이 말똥말똥한 상태로 누워
억지로 잠을 청하고 있었다.
그럴것이었으면 차라리 훌훌 털어버리고
아이와 나와 있었으면 되었을 것을,
나는 아이보다 내가 우선이었다.

내 컨디션이 우선이었기에
어떻게서든 잠에 들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나는 수면에 대한 강박이 있다.
아이를 출산하고 나서 신생아를 키우는 동안
예민한 아이덕에 아이의 패턴에 따라 새벽 내내 잠 못이루는 생활을 반복하고,
또 갑상선 질환으로 수면장애를 겪다보니
이것이 만성화되고 습관화되어
수면문제가 아이가 7세인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었다.
그렇기에 수면에 정말 예민하고 또 수면에 대한 강박까지 생겨버린 터였다.

어차피 잠에서 깨어난 것,
아이와 놀아도 되었을 것을
나는 그것보다도 나의 수면을 택했다.
잠이 오지 않더라도 눈을 감고서
억지로 잠을 취하려고 노력하고 있었고
그렇게 2시간 정도를 자는 것도, 안 자는 것도
아닌 상태로 수면을 취했다.

그렇게 일어난 나의 상태는 여전히 좋지 못했다.
수면의 질이 굉장히 떨어지다보니
컨디션이 말이 아니었고
일어나자마자 부정적 감정이 함께 치솟았고
눈을 뜬 순간부터 부정적인 감정이 있는 경우
하루의 질을 결정하기 때문에
나는 굉장히 예민해져 있었다.

그렇게 아이에게 다시금 다그쳤다.
니가 새벽에 자다 나를 깨워서 나는 짜증이 났다.
잠을 제대로 못자면 몸이 엄청 피곤해서 하루종일 해야할 일도 제대로 못한다.
그리고 나는 너때문에 엄청 피곤한 상태다.

너는 며칠전까지 열이나고,
또 아직또 콧물이 나고 아픈 상태면서
왜 잠을 안자는거냐
니가 안자면 니 몸이 더 아파지는걸 알고 있지 않냐.

마음 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아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하지만 화가 치밀어 올랐고
속으로 삼켜야 함을 알고 있었지만
삼키자 삼키자 삼키자 하는 마음과 함께
더욱 강렬하게 치솟은 화를 분출해 버리고 말았다.

아이는 다시 죄인이 된듯 아무 말도 없이
내가 준 죽을 꾸역꾸역 쑤셔 넣고 있었다.

그리고 몇분 후,
미안한 감정이 든 나는
아이에게 미안하다, 짜증이 나긴 했지만 너한테 이렇게까지 화를 낼건 아니었는데..
라는 사과의 말을 전했고
아이는 참고 있던 울음을 그제야 터뜨렸다.

상담사는 내게 굉장히 '자기'가 큰 사람이라 했다.
나는 '자기중심적'이라 표현했지만 말이다.

어쨋든 자기가 굉장히 큰 사람이라
자기가 굉장히 소중하고 중요한 사람이라 한다.
그래서 나는 내 일에 방해 받으면 안되고,
내 계획이 틀어지면 안되고,
내 감정에 동요가 일어나면 안되고,
등등등 내가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었다.

나는 평소 타인에게 피해 주는 일을 극도로 싫어했다.
이유는, 타인 역시 내게 피해를 주지 말라는 의미였다.
"나도 피해 안줄테니, 너도 내게 일절 피해끼치는 행동은 하지마."
나는 내가 나로서 온전히 서는 것을 원하는 사람이었다.
어떠한 방해도, 피해도 없이.

상담사는 그러한 생각이 굉장히 위험할 수 있다 했다.
아이에게 무의식적으로 너는 왜 내게 피해를 주는거니 라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기에 정말 조심해야 한다 했다.

나는 자기가 굉장히 큰 사람이라
아이와 나의 자기가
굉장히 비등비등하게 중요한 상황이라
이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 했다.

아이가 태어난 순간,
아이의 애착을 위해
아동기동안은 엄마의 입장을 뒤로 하고
아이의 입장에 우선적으로 초점 맞춰져야 하는 경우가 있다 했다.
하지만 나는 자기가 너무나 강렬해
나의 입장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아이는 잠이 들때면 등을 긁어 달라는 요구를 하곤 한다.
하지만 나는 내가 꾸준히 계속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애초에 해주지 않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었기에
등을 긁어주지 않았다.
등을 긁어주려면 나는 계속해서 정신이 깨어 있어야 했고
아이가 잠 드는 순간까지 내가 잠들지 못한다는 사실에
등긁어주는 행위가 불편했다.
그래서 아이에게 나는 대신 손을 잡아주고, 안아줄 수 있다고 제안했고
아이는 나와 잘때는 손을 잡거나 안아주기를,
아빠와 잘때는 등긁어주기를 요구했다.
아이가 원하는 애정의 방식이 있는데
나는 그것 역시 내 편한대로,
내 입맛에 맞춰 바꾸어 버렸다.

타인들이 본 나는 아이에게 매번 사랑을 아주 많이 쏟고 있는 엄마였다.
관심과 애정을 표현하고, 또 사랑을 매우 쏟아붓고,
심지어 나는 아이에게 과잉충족을 제공하고 있진 않나
하는 생각에 최근 들어 아이의 요구를 일일히 들어주지 않거나
혹은 아이에게 일일히 반응하지 않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새벽에 깨어나 자지 않는 아이에게
더 과한 반응을 보였던것 같다.

평소 아이에게 화나 짜증을 잘 내지 않는 엄마라
가끔씩 내가 짜증을 낼때면 아이는 과도하게 상처받곤 했다.
그리고 나는 왜 다른 애들은 엄마의 화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는 애들이 있는데,
너는 이런 사소한 목소리 톤의 변화에도 과도한 상처를 받는거냐며
아이를 이해하지 못하곤 했다.

상담사는 내게 물었다.
"수빈님이 아이에게 사랑을 표현하는거 말고,
아이가 수빈님에게서 사랑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순간 아차 싶었다.
나는 사랑을 정말 퍼붓는다고 생각하고 있고,
또 타인들도 나를 굉장히 사랑넘치는 엄마라 느끼고 있었지만,
정작 그것을 받아들이는 아이는?
내가 과연 아이가 원하는 방식의 사랑을,
아이가 원하는 때에 사랑을 주었던가?
뒷통수를 한대 맞은듯 했다.

아이가 내게 사랑을 느끼는 순간이라..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을 물어볼 생각조차 해본적이 없었다.
다만, 한번 비슷한 질문은 한적이 있다.
"팔땡이는 엄마가 팔땡이를 사랑한다고 생각해? 얼마나 사랑한다고 생각해?"
그때 아이의 정확한 답변은 기억이 안나지만
분명하고 확신에 찬 사랑한다고 느낀다는 어감은 아니었기에
나는 다소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대충 그럴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다는 이야기였던것 같다.

나는 아이에게 사랑을 퍼붓고 있었지만
정작 당사자는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자기가 굉장히 강한 나는
내 방식이 옳다 라는 생각이 확고하고,
또 내 사랑이 옳다는 생각이 확실한 사람이라
아이에게 나만의 방식을 고수해서 사랑을 퍼부었으니.
또 내가 원하는 때에 사랑을 퍼부었으니.

바보같았다.
에너지는 에너지대로 있는대로 탈탈 털어쓰고
매일 내 안의 사랑을 퍼붓느라 기진맥진하면서
그것을 받는 이는 모르고 있는 사랑이라니.
에너지만 있는대로 쓰고, 얻는건 하나도 없는
무식한 사랑이었다.

성인이 된 자식들이 있는 상담사는
지금에서야 돌아보니 알 것 같다 했다.
본인이 자식들을 위해
돈을 벌고, 건강한 삼시세끼를 해다 먹이고,
아이를 위해 마음쓰고 애썼던 모든 것들이
본인 자신에게는 사랑이었지만,
아이들에게는 사랑이 아니었다고.

우스갯소리로 사춘기의 아이들은
나를 위해 무언가 애를 쓰는 사랑이 아닌,
돈과 카드를 원한다고 한다.
그렇듯 각자가 느끼는 사랑의 방식이 다르다.

상담사는 남편과 아이의 사랑을 느끼는 방식이 무엇이냐 물었고,
남편은 자유를 원하는것 같아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것 같아 종종 주말에 혼자 아이를 데리고 나가기도 해요.
라고 이야기했지만
아이가 사랑을 느끼는 방식은 알지 못했다.

아이는 소소하게도 잠에 들때 등 긁어주는 것을 통해 사랑을 느꼈을 것이다.
아이는 그림을 그리고, 놀이를 할때, 엄마가 곁에 있어주는 것으로 사랑을 느꼈을 것이다.
아이는 새벽에 잠이 깼을때, 아이의 마음을 알아주고 잠들지 못하더라도 조용히 안아주는 행동으로 사랑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모든 것을 내 입맛대로 사랑을 주어버렸다.

나는 거대한 자기를 내려놓고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연습이 필요했다.
하지만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뻔한 말은 나도 알지만,
그것을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했고
상담사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했다.

이해해야지, 이해해야지, 이해해야지
가 아닌,
아이라면 어떤 마음일까? 아이라면 어떤 생각일까?
관점의 전환이 필요했다.


나는 내가 참 육아를 잘 하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아이를 과도하게 사랑했으니까.
내 안의 사랑은 차고 넘쳤으니까.
하지만 어쩌면 나는 나의 '자기'를 사랑하고 있었을지 모르겠다.
'자기'가 생각하는 사랑을 아이에게 주었고,
'자기'가 원하는 때에 사랑을 아이에게 주었고,
'자기'는 그것을 '너 역시 그러할 것'이라 생각했으니 말이다.

내가 진정 사랑했던 것은
아이였을까, 자기였을까.

나는 지금껏 참 어리석은 사랑을 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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