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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d Oct 03. 2021

Bottletalk. 한 병 정도의 이야기. 08

nonfiction 우아한 맹금류들의 세계에서

nonfiction Bottletalk 08. 우아한 맹금류들의 세계에서



와인 오프너를 오른손에 쥐고 나선을 꺼낸다. 소용돌이 모양 나선의 끝을 코르크에 갖다 대고 천천히 누르며 빙글빙글 돌린다. 오프너의 받침대를 지렛대 삼아 코르크를 천천히 꺼낸다. 코르크가 병에서 떨어져 나오면, 새콤하고, 때론 달큰한 과실 향이 코를 향해 화사하게 퍼져 올라온다. 코르크를 코끝에 대고 향을 들이마신다. 와인을 마시는 전 과정에서 가장 설레는 순간이다. 병 앞에 잔을 준비하고 와인을 따른다. 1/5 정도를 채운다. 

오늘의 와인은 Il Falcone. 

브리딩, 와인이 제 맛을 내기까지 일정 시간 공기와 맞닿음이 필요하다. 어떤 영화나 책을 고를지 고민하며 잔을 흔들다가 한 모금 마신다. 와인 라벨에 그려진 독수리를 본다. 그리고 한 모금을 더 입에 머금어본다. 독수리와 일 팔코네.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누군가와 멜로디가 있다.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 Martha Argerich. 그리고 지휘자 리카르도 샤이, Ricarrdo Chailly, 1982년, 두 사람이 베를린 방송교향악단과 함께한 그 유명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연주 영상. 



https://youtu.be/MOOfoW5_2iE


어느 정도 와인이 열렸다 싶을 무렵 연주 영상을 켜고 자리에 앉는다. 82년도의 영상이라 화질은 좋지 않지만, 못 볼 수준은 아니다. 부스스하게 부풀어 오른 검은 머리카락을 어깨 아래로 늘어트린 아르헤리치가 피아노 앞으로 걸어 나온다.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피아노 앞에 선 아르헤리치의 단단해 보이는 팔이 잠시 시선을 끈다. 관객들의 박수소리가 무수히 터지는 셔터 소리처럼 공연장을 메운다. 순간 공연장은 고요해지고, 샤이의 지휘에 맞춰 연주가 시작된다. 

누군가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답게 웅장한 연주를 기대했을지도 모르겠으나, 3번 협주곡의 시작은 다소 잔잔하다. 오케스트라가 낮게 허밍 하듯 내는 소리 위로 청아한 아르헤리치의 연주가 흘러간다. 블랙베리와 산딸기 향은 매혹적이지만, 타닌의 떫음 때문인지 일 팔코네에게 마음을 내주지 못하던 찰나. 다소 끌림 없이 잔잔하게만 느껴지던 연주가 조금씩 그 밀도를 높이기 시작한다. 아르헤리치의 피아노 선율을 따라가다 보면 조금씩 입 안을 감싸던 타닌이 부드러워짐을 느낄 수 있다.


문득, 손. 그보다 더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팔의 근육. 

피아노 건반을 단단하게 두드리는 아르헤리치의 손가락, 그곳에서 저마다의 무게를 지닌 채 튀어 오르는 음은 길게 갈라진 팔 근육의 움직임과 맞물린다. 팔 근육의 움직임은 힘차면서도 부드럽고, 손가락은 마치 중력에 구애받지 않는 무용수의 뜀박질 같다. 손가락의 아름답고도 힘찬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는 저 피아니스트의 팔은 누가 보아도 비르투오소의 것이다. 영상이 시작된 지 3분 7초. 처음으로 아르헤리치의 시선이 샤이를 향한다. 그 시선은 지휘자와 합을 맞추는 연주자라기보다는 꼭 먹이를 바라보는 맹금류의 것에 가깝다. 

블랙베리, 입안을 알싸하게 맴도는 스파이스, 그리고 짐승의 가죽. 이 모든 것이 지나간 후에 남는 붉은 과실의 단향. 존재감이 뚜렷한 스파이스와 가죽의 맛이 아르헤리치의 맹렬했던 시선과 결을 맞춘다. 부드러웠다가 점차 격정적이어지는, 그리고 다시 우아한 멜로디로 돌아오는 연주에 점점 빠져들 무렵 다시 맨 처음과 같은 선율이 흘러나오고 입안에는 체리의 단맛이 감돈다. 카덴차가 시작된 것이다. 미간을 찌푸렸으나 별거 아니라는 듯, 오케스트라의 받침 없이 이 강렬한 연주를 이어가는 아르헤리치를 보고 있노라면 나는 내가 이 천재 작곡가의 협주곡과 그것을 세상에서 가장 쉬워 보이고 매혹적으로 연주하는 피아니스트에게 오롯이 빠졌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고 만다. 1악장이 끝난다. 일 팔코네의 첫 악장도 함께 끝이 난 것 같다. 내 잔은 그래서, 깨끗이 비워져 있다.

2악장이 시작되기 전 잔을 채운다. 와인이 잔을 채우는 소리가 숨죽인 채 2악장을 기다리는 영상 속 사람들의 헛기침과 침묵 위를 가로지른다. 2악장 초반부를 메우는 관악기의 서정적인 선율에 나는 곧 빠져든다. 한층 섬세해진 일 팔코네와 그 뒤를 잇는 현악기의 연주가 어우러진다. 어느 순간 등장할 아르헤리치의 연주를 나는 초조하지만 여유로운 마음으로 기다린다. 갑작스럽게 아르헤리치의 화음이 등장한다. 곧이어 아르헤리치는 부드럽지만 관능적으로 음 하나하나를 흘려보낸다. 흐르듯 연주한다. 

무언가 몰두한 인간의 모습만큼 근사한 것이 있을까. 연주와 함께 존재하는 아르헤리치의 얼굴에 나는 홀린 듯 집중한 채로 일 팔코네를 마신다. 포도를 수확하고 와인으로 만들어냈을 양조자의 손길과 햇빛에 그을었을 얼굴이 피아니스트의 얼굴 위로 겹친다. 


3악장에 접어들며 연주의 기교는 더욱 화려해진다. 피아노 건반이 들썩인다. 그러나 아르헤리치는 건반을 감싼 피아노의 외피만큼이나 안정적이다. 그녀의 내면에는 들끓는 강렬한 열정이 있지만 흥분하지 않는다. 안정적으로 열정을 감싼 채 연주를 절정으로 이끌어나간다. 와인이 열리며 붉은 과실미가 가라앉고 진한 검은 과실의 맛과 스파이스가 도드라지는 순간과 맞물린다. 전보다 더 부드러워진 와인의 맛과 오히려 여유로워진 피아니스트의 표정이 각 감각기관에서 조화를 이룬다.

짧은 순간, 아르헤리치가 샤이를 보며 미소 짓는다. 먹이를 발견하고 급강하하는 한 마리 독수리처럼 놀라운 집중력으로 건반을 두들기던 피아니스트는 3악장의 폭풍우처럼 몰아치는 화음과 옥타브의 세계에서는 오히려 더 여유로운 듯 보인다. 아르헤리치의 미소는 몰입을 뛰어넘은 피아니스트의 절정이다. 좋은 보르도 와인을 마실 때와 같은 근사한 밸런스와 섬세함, 절정의 우아함을 보여주는 일 팔코네를 또 한 모금 머금는다. 


극악의 연주 난이도로 유명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을 최대치로 끌어내며 연주하는, 그리고 동시에 그것을 즐기는 이 피아니스트의 모습은 관능적이고 우아하다. 그러니 일 팔코네에서 느낄 수 있는 가죽과 스파이스의 관능적인 맛, 그리고 과실의 우아하고 섬세한 맛에서 나는 아르헤리치의 이 라흐마니노프 연주를 곧장 떠올릴 수밖에.


모든 연주를 끝내고 나서야 아르헤리치는 환하게 웃는다. 무대를 벗어났다가 다시 돌아와 허리 숙여 인사하는 아르헤리치를 보며 나 역시 잔에 남은 마지막 와인을 마신다. 




와인 정보


일 팔코네는 네로 디 트로이아라는 품종과 타 품종을 블렌딩 해 만든 와인이다. 낯선 포도 품종의 설명에 이끌려 와인을 집어 들었다. 

리베라 와이너리를 대표하는 와인으로 카스텔 델 몬테 지역을 사랑했던 신성로마제국의 프레데릭 2세를 상징하는 독수리 라벨을 가지고 있다. 네로 디 트로이아와 지역의 포도 품종을 수확한 뒤 15일 동안 침용을 한다. 그리고 14개월 동안 50%는 30hl의 프렌치 오크에서, 나머지는 225리터의 프렌치 오크에서 숙성을 진행한다.
 

*네로 디 트로이아(Nero di Troia) 품종은 프리미티보(Primitivo)와 함께 뿔리아 지역을 대표하는 품종으로 강렬한 태양볕의 풍부한 일조량에서 최적의 숙성을 보인다. 껍질이 두껍고 색이 진하며, 건강에 유익한 안토시아닌 성분이 많아 오랜 시간 숙성이 가능한 장점이 있다. 검붉은 과일향과 다채로운 향신료의 풍미가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품종의 어원은 뿔리아가 그리스의 식민지로 있을 때, ‘트로이 전쟁’으로 유명한 트로이로부터 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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