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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d Oct 20. 2021

Bottletalk. 한 병 정도의 이야기. 10

Fiction. My little Sweet One.

(fiction) Bottletalk 10. My Little Sweet One.



류진 씨. 요즘 야근 너무 하는 거 아니에요? 엄청 피곤해 보여. 

같은 부서 대리의 걱정 어린 말에 나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야근이 많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퇴근 후 집에서도 쉬지 못한다는 것이 내 피곤함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었던 일이지만, 막상 실제로 겪어보니 웃으며 넘길 수 없는 일이 집에서 일어나고 있었으니까. 무슨 일이냐고? 우리 집에는 길들여지지 않은 작은 짐승이 한 마리 숨어 있다. 


귤이를 처음 알게 된 것은 SNS에서였다. 고양이와 함께 살고 싶다는 생각은 사춘기 시절 집 근처에서 동네 고양이들에게 밥과 물을 주며 돌보았을 때부터 해왔다. 직장인이 된 지 2년 하고도 6개월이 되었을 무렵, 학자금 대출도 거의 다 갚았겠다 통장에 모은 돈도 적절하겠다, 나는 고양이 입양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고양이에게 필요한 물품을 갖추고 유튜브와 책과 카페의 글들을 통해 고양이에 대한 지식을 꼼꼼히 섭렵하며 나는 내가 제법 괜찮은 집사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을 가졌다. 나와 함께 삶을 영위할 고양이를 찾아 SNS를 헤매던 어느 날, 나는 한 고양이 구조단체의 계정에서 동그란 눈을 하고 옅은 파스텔 톤의 삼색 코트를 예쁘게 차려입은 7개월 정도의 고양이 귤이를 만났다. 그리고 곧장 귤이와 사랑에 빠졌다. 


엄마와 형제들을 잃었는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동네 골목길에 혼자 앉아 있었다는 귤이는 먹을 게 없어 쓰레기봉투를 자주 헤집었고, 덕분에 동네 주민들 몇몇에게 미운털이 박힌 모양이었다. 술 취한 행인이 발을 구르거나 동네 꼬마들이 큰 소리를 내면서 겁을 주거나, 혹은 쓰레기를 버리던 주민이 화를 내는 소리에 귤이는 화들짝 놀라 차 밑으로, 풀숲으로 숨어들었다. 동네에서 밥도 못 얻어먹고 사람들에게 놀라기만 하는 모습을 오래 지켜보았던 귤이의 구조자는 곧 죽을 것처럼 비쩍 마른 귤이를 구조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몹시 경계하는 모습의 귤이에게 구조자는 조심스럽게 캔을 내밀었다. 배가 고파 눈앞의 캔에 조심스레 다가온 순간, 구조자는 귤이를 잡아 이동장에 넣었다. 귤이는 구조자에게 한참이나 맘을 열지 않았다고 했다. 구조자의 집에 있던 고양이들과 귤이의 사이가 좋지 않았음도 당연한 일이었다. 병원에 데려가니 누구한테 맞았는지 다리와 갈비뼈에 골절이 있었고 그 치료가 끝나고 나서야 중성화 수술을 할 수 있었다고도 했다. 귤이의 구조자는 내게 귤이가 마음을 잘 열지 않을 것이니 마음을 천천히 열 각오를 해야 한다고 여러 번 강조를 했었다. 이미 귤이의 임시 보호 일기를 몇 번이나 읽었던지라 나는 각오가 되어 있다는 말로 구조자를 안심시켰다.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만난 귤이는 정말 작고 눈이 컸고 겁이 많았으며 사랑스러웠다. 발버둥 치는 귤이를 이동장에 넣느라 나와 구조자의 팔에 상처가 나고 피가 맺혔지만, 나는 귤이와 만난 것이 너무나 기뻐 상처 따위는 개의치 않았다. 내 작은 투 룸 아파트에 온 첫날부터 일주일 가량, 귤이는 이동장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밥도 그 안에서 먹었다. 화장실은 내가 자는 사이에 다녀온 것 같았다. 귤이 앞에서 장난감과 간식을 흔들면 귤이는 하악질을 하며 화를 냈고, 손이 조금이라도 몸 가까이 다가가면 작은 발톱을 세워 내 팔과 손등에 상처를 냈다. 괜찮았다. 각오했던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점점 커져만 갔다. 귤이는 벽지를 긁기 시작했다. 스크래처를 사두었으나 거들떠도 보지 않았고, 새벽에 부엌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떨어트려 깨기도 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 보면 갈가리 찢겨 있는 키친타월이나 휴지를 발견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인생과 고양이의 쓴맛만 보며 하루하루를 보낸 지 한 달. 솔직히 말하자면 내 마음은 많이 피폐해져 있었다. 야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잠깐이라도 귤이를 쓰다듬어보고 싶었고, 남들처럼 예쁜 사진을 찍어 SNS에 귤이 자랑을 하고 싶었다. 내게 주어진 현실은 찢어지고 부서지고 난장판이 된 내 집을 치우는 거였고 귤이와는 제대로 마주치지도 못했지만. 귤이 구조자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보려 휴대폰을 들었을 때, 자신 있다고 너무 자랑스럽게 말한 내 모습이 떠올라 폰을 내려놓았다. 꼭 책임지지 못하고 잘 돌봐주지 못하는 보호자로 보일까 봐 겁이 났다. 아니, 혹시 정말 잘 돌봐주지 못해 이런 것은 아닐까…? 이렇게 교감은 하지 못하고 지쳐만 가는 내가 자격이 없는 사람인 것은 아닐까. 하루가 다르게 고민이 깊어갈 무렵이었다. 


지친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오니 여느 때처럼 거실과 방이 엉망으로 어질러져 있었다. 귤이는 어떻게 꺼냈는지 간식 봉투를 끄집어내 여기저기 찢어발겨놓고, 숨겨놓은 휴지로 온 집안을 장식해두었다. 귤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캣타워 꼭대기에 올라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한숨을 쉬고는 거실을 치웠다. 방 정리가 거의 다 끝날 무렵이었다. 귤이가 갑자기 캣타워에서 달려내려 와 거실을 맹렬히 질주해 냉장고 위로 달려 올라갔다. 막 채운 물그릇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엎어졌다. 

귤아!

나도 모르게 큰 소리가 나왔다. 귤이는 내 큰 목소리에 움찔하더니 냉장고 아래로 내려와 숨숨집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겁을 먹은 듯 몸을 한껏 웅크렸다. 이제껏 한 번도 귤이에게 큰소리를 낸 적은 없었는데, 왜 그랬을까. 후회가 밀려왔다. 곁을 내어주지 않는 귤이가 야속했고 동시에 작고 어린 짐승에게 화를 낸 내가 한심했다. 올라오는 감정을 꾹꾹 참으며 나는 귤이가 엎은 물을 치우고 새 물그릇을 가져다 놓았다. 어두운 스탠드를 켜고 귤이의 숨숨집 옆에 앉은 나는 귤이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같이 살 건데 이제 마음을 좀 열어 주면 안 되겠느냐고 웅얼거렸다. 작은 동물에게 내 마음을 알아달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꼴이 우스웠지만 한번 터진 말은 계속 흘러나왔다. 알아 들었을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속만은 시원했다.

집을 치운 나는 블루베리와 아몬드를 가지고 와서 맥주와 함께 먹었다. 소리를 낮추고 유튜브 영상 몇 개를 보다가 소파에 기댄 채 잠깐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허벅지 옆에 뭔가 따뜻한 기척이 느껴져 눈을 떴다. 

귤이가 있었다. 

예쁜 오렌지색과 검은색 무늬가 수 놓인 몸을 동그랗게 말아서 내 허벅지에 바짝 붙인 채 자고 있는 귤이. 작은 몸이 고른 숨으로 들썩이는 것이 보였다. 너무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꾹 참고 손을 뻗었다. 내 손의 움직임에 귤이는 눈을 떴다. 경계하는 듯 귀가 살짝 뒤로 누웠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나는 처음으로 귤이의 작은 몸을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털이 손에 닿자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이 밀려왔다. 곧이어 귤이의 작은 몸에서 무엇인가 진동하는 듯한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몸이 붕 뜨고 코끝에 블루베리의 단향이 맴도는 것만 같았다. 귤이의 골골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지금까지 고생했던 순간들이 한순간에 씻겨나가는 달콤한 시간이었다. 무엇 때문에 내게 다가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내 말을, 진심을 이해준 것이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이후로도 물론 귤이는 사고를 쳤다. 벽지를 뜯고 옷을 뜯고, 물건을 떨어트려 박살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쓴맛은 귤이가 내게 주는 달콤하고 화사한 행복에 비하면 일부일 뿐이었다. 잠을 잘 때면 품속을 파고들고, 퇴근할 시간이 되면 방묘창 앞까지 종종걸음 치며 달려와 나를 반기고, 기분이 좋을 때면 내 손에 머리를 콩콩 박아대는 귤이의 모습은 퇴근 시간 후 약속도 잡지 않고 집으로 나를 달려오게 만들었으니까. 이 작은 짐승과의 삶은 쓴맛과 단맛이 적절히 공존해 이제 막 아름답게 균형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 더 행복한 맛이 날 기다릴 거라는 것을 나는 장담할 수 있다. 






와인 정보


Domenico Clerico, Langhe Dolcetto 'Visadi' 


도메니코 끌레리꼬 랑게 돌체토 ‘비사디’


Dolcetto를 영문으로 바꾸면 Little Sweet One이라고 한다. 랑게 돌체토는 실제로 과일 단맛이, 블루베리나 체리와 같은 과일의 단맛이 풍성한 와인이었다. 얼핏 풍선껌맛 같은 것도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단맛들만 지배적이었다면 마시기가 어려웠을 터였다. 새콤달콤한 맛 뒤에 느껴지는 타닌과 쌉쌀한 맛들, 스파이스 향들이 랑게 돌체토의 밸런스를 근사하게 잡아주었다. 

기분 좋은 드라이함과 과일향의 밸런스를 느끼며 나는 우리 집 고양이들을 떠올렸다. 보드라운 털, 하루의 피로를 녹여주는 다정한 성격, 퇴근을 맞아주는 헤드 번팅, 골골 송 등 고양이의 달콤한 면과 그 이면에 숨어 있는 악마같은 면들을! (다행히 우리 집 고양이님들은 천사 같은 성격이라 가끔 뭔가를 깨 먹는 것 외에는 크게 사고를 치지 않는 편이다. 고양이님들과 함께하는 삶의 가장 큰 씁쓸함은 밥과 모래와 간식, 장난감, 그리고 병원비로 빠져나가는 돈일 것이다.)


쓴맛은 단맛과의 밸런스를 위해 꼭 필요한 맛이다. 와인에서 쓴 맛이 나는 것은 아니지만, 단맛과의 밸런스를 잡아주는 쌉쌀한 아몬드와 스파이스의 맛은 분명 매력적이고 단맛을 돋보이게 만드는 필요한 맛이다. 마치 제멋대로 굴며 나를 자신에게 맞추도록 만들었다 갑자기 다정하게 굴기도 하는, 상반되는 두 면을 서로 도드라지게 만드는 고양이의 면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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