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fiction. 위로의 작은 기포들을 당신에게,
(nonfiction) Bottletalk. 07 위로의 작은 기포들을 당신에게.
*샐리 루니의 노멀 피플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근 보통의 삶이 속에 속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꽤나 많이 그 영역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코로나 덕분이다. 친구들과의 만남은 연중행사처럼 특별한 이벤트가 되어버렸고, 좋아하는 식당에도 쉽사리 가지 못하게 되었다. 대학원 동기들과 한 달에 한 번씩 만나오던 스터디 모임은 전부 온라인 화상 미팅으로 대체되고 말았다. 나를 포함한 동기들 모두 내향성 인간들인지라 온라인 스터디에 큰 불만은 없었지만, 얼굴을 본지 거의 1년이 다되어가자 어떻게든 만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래서 우리는 매우 오랜만에 오프라인에서 만났다. 대화의 주제는 학교를 다닐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요즘 뭐 쓰니, 별일 없었니, 요즘 뭐 읽니, 뭐 재미있는 거 없니?
한참 마감 중이었던 나는 마지막으로 읽은 니콜 크라우스의 책들 외엔 독서에 업데이트가 없었으므로 다독하는 (동기 언니 중 H언니는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책을 많이, 깊이 읽는 고급 독자다!) 언니들의 독서 리스트를 세심하게 들었다.
H언니는 최근에 읽은 책중 샐리 루니의 ‘노멀 피플’이 재미있었다고 했다. 고등학교 연인이었던 두 사람이 어떤 일을 빌미로 헤어졌고, 어쩌다 다시 만나 두 사람만의 특별한 관계를 이어간다는 내용이라고 H언니는 간단하게 설명해주었고, 말미에 언니의 취향은 아니지만 나쁘지 않았다는 말을 덧붙였다.
“설명 들으니까 이 책 제 취향일 거 같은데요?”
“그러게, 넌 이거 좋아할 거 같다.”
언니의 말에 나는 고깃집에서 밥을 먹다 말고 책 주문을 했고 오늘의 책 샐리 루니의 ‘노멀 피플’과 그렇게 만나게 되었다.
노멀 피플은 코넬과 매리앤이라는 두 인물의 끊길 듯 끊어지지 않고 더 깊게 이어지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동시에 그 두 사람이 각자의 삶을 살아내려고 발버둥 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가벼운 로맨스를 기대하고 책을 들었지만, 소설이 꽤나 심도 있게 현대 시대의 인간상을 그려내는 덕에 다양한 독서의 겹을 쌓을 수 있어서 즐거웠다.
아직 가치관이 완벽히 정립되기 전인 청소년기에 만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운명적으로 이끌린다. 소위 잘 나가는 일진(?)들로 구성된 자신의 친구들에게 메리앤과의 만남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애쓰려는 코넬과 학교에서 이상한 아이로 찍혀 고교생활을 내내 홀로 보내는 메리앤의 조합이라니. 하이틴 로맨스물을 좋아하는 나는 몇 페이지를 읽자마자 옳거니 내 취향 맛집이구나 하고 신나 했다. 메리앤은 코넬을 자신만의 소중한 한 사람으로 여기고, 코넬도 메리앤을 그렇게 생각하지만. 10 대란 어떤 때인가, 친구들의 시선이 많은 것을 차지하는 때가 아니던가. 그 별 것 아닌 시선에 소중한 관계를 걸어버린 코넬의 배신으로 두 사람의 첫 막은 끝이 난다. 다시 대학에서 만난 두 사람. 오히려 이제 잘 나가는 사람은 메리앤처럼 보이고 코넬은 시골에서 막 올라온 촌뜨기가 되어있다. 코넬을 거들떠보지도 않길 바란 유치한 한 독자의 마음과 달리, 메리앤은 과거를 딛고 코넬과 함께하게 되고. 두 사람은 어쩐지 아슬아슬한 관계를 계속 유지해 나간다.
책을 읽으며 어울릴 만한 와인이 무엇이 있을지 생각했을 때, 자꾸만 떠올랐던 것은 의외로 샴페인이었다.
노멀 피플과 같이 엮어 마시기 위해 떠올린 샴페인은 도츠의 가장 기본 라인인 Deutz, Brut Classic. 도츠 브뤼 클래식이다. 샴페인은 기본라인조차도 가격이 꽤 있는 편이라 잘 사는 집안 출신인 메리앤과 계속 계급적 격차를 느끼는 코넬을 생각하면 어울리지 않는 선택인 것 같아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도츠를 마시며 젊은 두 남녀에게 (이렇게 말하니 매우 꼰대가 된 기분이 들지만….) 그들이 진 무거운 인생이라는 짐을 잠깐 내려놓고 기분을 전환시켜줄 와인을 떠올리고 싶었고, 삶의 다음 챕터로 넘어가려는 그들에게 축배를 들어주고 싶었다.
얼마 전 마트에 와인을 사러 갔다가 도츠가 장터 가격으로 나와 있는 것을 보고 궁금한 마음에 냉큼 한 병을 구매했다. 오픈하자마자 상큼한 시트러스 향이 확 퍼져 나왔다. 기분 좋게 보글거리는 기포를 구경하다 마신 도츠에서는 사과, 꿀 향과 고소한 이스트 향, 쿰쿰한 치즈의 맛과 쌉싸름한 허브의 맛도 느껴졌고 무엇보다 단단함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마셔본 샴페인 중 단단하다는 느낌을 주는 와인은 처음이어서 새롭게 느껴졌다.
메리앤과 코넬은 둘 다 나름의 정서적, 환경적인 요소들에서 기인하는 불안함과 고통을 안고 있다. 그럼에도 각자 자신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선택들을 용기 있게 해낸다. 얕고 불안정한 관계에서 벗어나 코넬에게 완전히 의지하려 마음먹는 메리앤의 모습이라던가, 심각한 우울증으로 고통받던 코넬이 결국 한 편의 소설을 써내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는 모습은 두 사람이 단단하게 성장해 가는 지점을 보여준다는 느낌이 들었다. 도츠가 초반에는 살짝 떫은맛을 내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열려 섬세하고도 단단한 맛을 구현해내는 것이 메리앤과 코넬의 이런 모습과 겹쳐 보였다.
코넬에게 다른 여자 친구가 생기고 그것을 고백하는 순간 폭발하는 메리앤의 모습은 분명 파국을 맞이하는 연인을 볼 때처럼 씁쓸하고 떫은맛을 감돌게 한다. 두 사람 관계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비뚤어진 각자의 마음들 때문에 생겨나는 견디기 어려울 것 같은 쓰고 떫은맛도 깔려 있지만, 두 사람의 대화를 읽고 있자면 잔잔히 터지는 탄산과 기포를 느낄 수 있다. 이 소설의 상당 부분은 대사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어떤 상황에서도 메리앤과 코넬이 주고받는 말에는 생동감이 있고 합이 잘 맞는 데다가 톡톡 쏜달까, 꽤 매력적이었다. 제법 긴 시간 뽀글대며 올라오는 도츠의 기포와 대사들의 결이 같다 느꼈던 지점이었다.
결정적으로 이 샴페인을 이 소설과 엮게 된 이유는, 앞서 말했듯 두 주인공 메리앤과 코넬에게 샴페인을 한잔 따라주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소설 초반에 메리앤에게 한 행동 때문에 코넬에게 나는 상당히 악감정이 생겼지만, (그래서 메리앤이 다시 코넬과 만나주지 않기를 내심 바라기도 했다. 하지만 메리앤은 그러기엔 코넬을 너무 사랑했고, 그런 메리앤의 선택을 보며 이 독자는 네가 행복하다면 됐다 싶어지는 것이었다….) 소설이 중후반부로 접어들며 코넬에게 생긴 친구의 자살과 같은 일들은 그의 외롭고 힘든 정신상태로 버텨내기에는 어려웠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코넬이 힘들게 한 편의 소설을 써냈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어깨를 두들겨 주고 그 앞길이 앞으론 조금 더 나아지길 바라는 축배를 들어주고 싶었다.
메리앤은 어떤가. 가족이라 부르기도 아쉬운 수준의 가족을 두었고 정신적 신체적 폭력을 행사하는 그들을 통해 계속 고통을 받아왔다. 그 가족들로 생긴 내면의 상처는 메리앤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갉아먹고 새로운 상처를 받게끔 했다. 그럼에도 유일한 버팀목인 코넬의 새로운 선택, 자신의 곁을 떠나는 그 선택을 존중해주며 단단하게 제 자리에 서보려는 메리앤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당연히 메리앤에게도 이 힘차고도 섬세한 샴페인을 한가득 따라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소설의 끝은 두 주인공의 대학생활이 종료되는 시점을 그리고 있다. 어느 나라나 문화에서든 대학을 졸업하는 사람들은 삶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그것이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이든 취업을 하는 것이든 간에. 내 삶의 방향성을 잡고 좀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두 사람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때에 따라 위로가 되기도 하고, 앞길을 축하해 주기도 하는 이 작은 기포들, 황금빛깔의 샴페인이 아닐까.
+ 노멀 피플은 2020년 4월, BBC에서 12부작 드라마로 만들어졌고 꽤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웨이브에 올라와 있다고 하니 샴페인을 마시며 보는 것도 좋을지도.
Deutz, Brut Classic. NV.
생산자 노트
도츠의 가장 기본 라인 샴페인으로, 짙은 황금색을 띠고 있으며 서양 산나무꽃 등의 흰꽃에서 배어나는 향, 잘 익은 사과와 배 향이 난다. 샤르도네의 신선함과 삐노 누아의 우아함, 풍부함이 잘 어우러진 풀 바디 스타일 샴페인이다.
품종은 Pinot noir 33.3%, Chardonnay 33.3%, Pinot Meunier 33.3%로 블렌딩 되어 있다.
출처: 와인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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