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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ee May 03. 2021

Bottletalk. 한 병 정도의 이야기. 06

(fiction) 어쩌겠어, 이런 날에

(fiction) Bottle 06. 어쩌겠어, 이런 날에



가끔은 혼자 자기 싫은 날이 있다. 알딸딸할 만큼만 술을 마시고 두 번 보지 않을 사람과 별 시답잖은 농담에 깔깔거리다가 적당히 괜찮은 섹스를 한 뒤, 이른 아침 그와 국밥을 나눠먹고 질척임 없이 헤어지고 싶은 날. 하지만 클럽이나 술집, 시끄럽고 담배냄새가 찌든 장소에서 몸을 흔들고 맛없는 술을 마시고, 위험하지 않으면서 내 맘에는 드는 누군가를 물색해야 하는 과정은 너무 많은 에너지 소모를 필요로 한다. 

오늘은 그런 날이었다. 

최선을 다해 살고 있으나 이대로도 괜찮은지 앞일을 짚어보게 되고, 결국 머리가 아파지는 날. 유난히 고된 일주일을 보내고 회사에서 팀장의 개소리를 버텨내느라 쌓인 스트레스를 무엇으로든 풀고 싶은 날. 하지만 하룻밤 곁에 둘 누군가를 찾기까지의 과정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친구들에게 전화할까 하려다 그조차도 그만뒀다. 내가 원하는 건 수다가 아니라 시원한 맥주와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는 괜찮은 섹스였으니까. 

맥주 몇 캔, 그리고 피자와 함께 금요일 밤을 보내겠노라 생각하며 지하철역 계단을 밟는데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보니 재현이라는 이름 두 글자가 눈에 띄었다. 낯선 이름이었다. 재현? 재현이 누구지? 그냥 전화를 끊어버리려던 순간, 재현이 누구인지 떠올랐다. 얼마 전, 친구의 지인과 합석해서 술을 마셨던 날, 그 지인의 플러스 원이었던 사람. 이상하게도, 능글능글 웃으면서 내 친구에게 추근거리던 지인의 얼굴은 떠올랐지만, 재현의 얼굴은 생각나지 않았다. 그날 컨디션이 좋지 않아 생각보다 빨리 취했었기 때문일 것이다. 헤어질 무렵 우리 둘의 회사가 신사역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고, 역시 만취한 재현이 언제 같이 술이나 한잔 하자며 내 번호를 받아갔던 것만 희미하게 기억날 뿐이었다.    

전화를 받자 재현은 자기를 기억하느냐고 신사역에서 나와 비슷한 사람을 보았다고 말했고, 정황상 재현이 본 사람은 내가 맞는 것 같았다. 근처에 단골 사케집이 있는데 한잔 하지 않겠느냐는 그의 제안에 나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저, 여보세요…?

내 침묵이 길어지자 재현이 나를 불렀다. 아무려면 어떠랴 싶어진 나는 그의 제안에 응했고, 곧 우리는 어둑한 이자카야의 닷지석에서 어깨를 나란히 붙이고 앉아 있게 되었다. 

―덥죠?

―네, 그래도 안은 시원하네요. 

―누나, 저번에 말 놓자고 하시더니. 

누나라는 말에 비로소 재현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살짝 웨이브진 앞머리와 굵은 눈썹, 쌍꺼풀 없는 눈. 미소를 지으니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휘었다. 단단하게 생겼지만, 한편 소년의 냄새가 풍기는, 잘생긴 사람이었다. 심드렁했던 마음에 불이 켜졌다. 재현의 무해한 얼굴과 크고 단단한 몸집은 우아하고 커다란 숫사슴을 연상시키게 했다.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차가운 사케를 천천히 들이키고 가라아게를 씹으며 시시콜콜한 하루 일과를 주고받았더니 피로는 사라지고 입가에서 자꾸만 웃음이 흘러나왔다. 생각보다 재현과 나는 죽이 잘 맞았다.

요망하네.

화장실에서 화장을 고치다 재현의 눈웃음이 떠올랐고, 그러다 거울 속의 나와 눈이 마주쳤고….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나 내가 간과한 것들이 있었다. 나는 말술이었지만, 재현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 주량이 다른 만큼 이 관계를 대하는 태도가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 재현은 초식동물답게도 알코올에 약했고 점점 취해갔으며, 재현을 보며 컨디션을 되찾은 나는 시간이 지나도 정신이 멀쩡했다. 

―누나. 아까 말한 그 감독 영화. 

―응.

―그거 나랑 보러가. 영화 본 다음에는 교보에서 서로 책 골라주기 하고, 만두전골도 먹으러 가자. 나 광화문 근처에 있는 유명한 위스키 초콜릿 바도 알아. 

―책 골라주기? 그게 뭐야 대학생도 아니고. 

―왜애. 그거 재밌어. 너 책 읽는 거 좋아한다며. 뭐 골라줄지 궁금해. 

너라고 부르다니. 순간 이천년대 초반, 누난 내 여자라며 소리를 질러대던 노래가 생각나 잠깐 소름이 돋았지만, 재현이 그렇게 부르는 것은 싫지 않았다. 은근 슬쩍 너라고 하는 모양새가 사실 좀 귀엽기도 했다. 하지만 다음에 영화를 보고 책 골라주기를 하자니. 그건 좋지 않았다. 사실 다음의 약속을 잡는다는 사실 자체도 조금 불편했는데, 그 약속을 제대로 된 데이트로 잡는다는 것은 나와의 관계를 꽤나 진지하게 생각하려는 시도로 보였다. 내가 만약 연애를 진지하게 할 생각이 있었더라면 기쁜 태도였겠지만…. 나는 내 직장과 커리어가, 그리고 그것에 매진하고 있는 내 삶이 훨씬 중요했다. 승진을 하고 해외 지사에 나가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고, 굳이 한 사람과 진지한 관계에 들어가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는데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오늘 원하는 것은 그야말로 안전하고 가벼운, 오늘 하루로 끝날 기분 좋은 섹스일 뿐. 


나는 말을 돌리려고 아무 얘기나 늘어놓기 시작했다. 연예인 중에 이상형 있어? 자보고 싶다고 생각한 연예인 있어? 해외 연예인이어도 좋아. 난 누가 좋냐면….

초식동물답게 재현은 얼굴을 붉혔다. 나는 이상형을 말하는 게 뭐 어떠냐고 했지만, 재현은 고개를 흔들며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재현은 남은 잔을 쭉 비우더니 코끝이 맞닿을 만큼 얼굴을 들이대며 

―난 네가 좋아. 

라고 하고는 또 얼굴을 붉혔다. 

잘생긴 얼굴은 많은 것을 용납하게 만든다. 보통의 남자가 그랬다면 징그러워서 한 대 치고픈 마음에 주먹을 꽉 쥐거나 웃음으로 상대를 조롱했을 것이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꾹 참았다. 한 대 치고 싶진 않았지만 웃긴 건 사실이었으니까. 

―그만 나가자. 

재현은 의외로 순순히 내 말에 짐을 챙겨들었다. 나는 계산을 하고 택시를 부르려 했다. 하지만 이대로 집에 가려니 역시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아니 내가 불렀는데 왜 네가 샀어? 

―그럼 2차는 네가 사던가. 

―아. 그럼 되겠네.

내 말에 재현은 해맑게 웃으며 어딜 갈지 고민했다. 하지만 대 코로나 시대에 10시 이후에 하는 술집은 당연히 한군데도 없었다. 

―어…. 우리 집이 근처긴 한데….

재현이 웅얼댔다. 

―가자. 

재현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대꾸했다. 이거지 싶었다.

―…그래도 괜찮아?

―응. 거기 말고 어디 갈 데 있어?

―아니…. 그치만 혹시나 불편할 수도 있으니까….

택시를 타고 재현의 집으로 이동하며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룻밤을 위해 별 노력을 다 한다 싶었다. 하지만 상대는 좀 오글거리긴 해도 꽃사슴같은 남자 아닌가. 투자할 가치는 있었다. 

우리는 재현의 집 근처 편의점에서 맥주 몇 캔과 감자칩을 사들고 그의 투룸으로 올라갔다. 깨끗하고 좋은 냄새가 나는 집이었다. 연애는 타이밍이라던데, 나는 진짜 타이밍 안 좋게 하필 이런 때, 연애할만한 애를 만났다고 생각하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재현은 테이블 위에 잔을 놓고 맥주를 따라주었다. 감자칩과 찬장에 있던 육포를 접시 위에 먹기 좋게 담은 다음 내 앞에 내려놓았다. 우리는 시원하게 맥주를 마셨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집안을 구경한다는 핑계로 맥주잔을 들고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어느새 나는 내 옆에 앉은 재현과 손을 잡고 있었고 내 머리는 재현의 어깨위에 놓여 있었다. 침묵이 흘렀다. 왔구나.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귀 끝까지 붉어진 재현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재현이 천천히 고개를 내게로 돌렸고 부드러운 키스가 이어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와 나 사이의 텐션을 조금 올려보려 했을 뿐인데, 재현은 갑작스럽게 내 몸에서 손을 떼고 내게서 떨어졌다. 

―아. 진짜. 미안. 처음 만난 날인데. 진짜. 아. 내가 취해서.

만취한 듯 발음이 완전 꼬여 있었다. 나는 잠깐 침대에 앉아 있다가 이내 일어섰다. 

―화났어?

―아냐. 화장실 좀 다녀올게. 

화장실에 들어서자 자꾸 웃음이 나왔다. 

나 지금 뭐하는 건지.

키스는 부드러웠고 나를 대하는 재현의 태도는 옳았다. 그래서 재현이 더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내 안의 야수는 얌전히 잠들 수 밖에 없었다. 그처럼 진지한 관계에 임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으니까.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침대로 가보니 재현은 이미 침대 위에서 골아 떨어져 있었다. 갑자기 피곤함이 몰려온 나는 잠깐 그의 옆에 누워 선잠을 잤다. 


눈을 떴을 때, 창 밖에서 먼동이 터오고 있었다. 옆자리의 재현은 내게 팔을 올린 채 얌전히 잠들어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팔을 치우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잠든 재현의 이마에 입을 맞출까 하는 생각이 살짝 들었지만, 이내 지워버렸다. 

아침의 키스는 연인들의 몫이다. 

나는 가방을 챙겨들고 재현의 집을 나섰다. 때마침 근처에 맛있는 해장국 집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Two hands Sexy Beast Cabernet Sauvignon 2019 


호주의 카베르네 소비뇽은 취향이 아닐거라 예상했지만, 그래도 새로운 맛에 도전해보고 싶어서 구매했던 와인이다. 투핸즈는 세련된 라벨과 괜찮은 맛으로 꽤 유명하며, Angel’s share –Shiraz, Gnarly dude –Shiraz와 Sexy Beast-Cabernet sauvignon이 대표적이다.  

갓 오픈하니 파프리카와 블랙 체리, 민트 향이 느껴졌다. 산도가 꽤 높았고 맛에서는 크렌베리와 후추, 담배도 느껴졌다. 

사실 나는 이 와인을 마시면서 화양연화를 보았는데, 썩 잘 맞는 영화와 와인 궁합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와인의 높은 산도와 크렌베리의 달콤함, 후추와 담배의 맛이 조화를 이뤄 정말 섹시하게 느껴졌는데, 그것이 농후하고 사연이 짙은, 깊은 감정과 사랑이 곁들여진 섹시라기보다 좀 더 가볍고 캐주얼한 섹시함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가벼운 만남을 추구하는 사람을 떠올렸고, 그렇게 이번 글을 쓰게 되었다.


생산자 노트


크랜베리, 라벤더의 화사한 향에 민트 계열의 은은한 아로마를 지닌 이 와인은 맥라렌 베일 지역의 최상급 까베르네 와인의 모범적인 스타일이다. 생동감 넘치는 붉은 과일의 진한 풍미와 촘촘하게 구조를 이루고 있는 타닌의 맛이 만들어내는 균형감은 라벨 디자인만큼이나 매혹적이다. 한 모금 마신 후 뒤를 이어 나타나는 레드커런트, 멀베리, 쥬니퍼 향은 와인에 깊이를 더해주며 끝 맛에서 말린 허브, 담배, 흙내음 등의 다채로운 노트가 느껴진다.
 
 마세라시옹 과정을 통해 즙을 얻은 것(free run), 이후에 다시 압착(pressing)한 즙을 함께 사용한다. 대부분의 와인은 1~5년 된 프랑스산 오크통에서, 15% 가량의 와인은 프랑스산 새 오크통에서 숙성한다. 신선한 맛을 즐기려면 지금 마셔도 좋고 취향에 따라 수확연도로부터 10년 더 숙성해도 좋다.
 
 픽쳐 시리즈는 와이너리 오너의 친구이자 포토그래퍼인 Don Brice의 폴라로이드 작품으로 라벨을 디자인해 잔잔한 감동을 주는 와인이다.


출처: 와인 21 (https://www.wine21.com/13_search/wine_view.html?Idx=148439)


와인 구매 정보 : 이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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