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ee Apr 26. 2021

Bottletalk, 한 병 정도의 이야기. 05

fiction. 8℃ 당신

(fiction)Bottle 05. 8℃ 당신



신영의 사진전에 초대를 받았을 때, 지원은 조금 놀랐다. 신영이 자신이 찍은 사진으로 전시를 하고 싶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해오긴 했지만, 내심 그 말을 실현시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신영의 학교 선배이자 지원의 직장 동료인 혜주가 주선한 소개팅에서 처음 만났다. 말을 몇 마디 나누지 않고도 지원은 자신이 원하는 이상형과 신영이 거리가 꽤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신영도 마찬가지였는지 둘은 금세 말을 놓고 편한 친구사이로 지내게 되었다. 지원에게 신영은 알기 쉬운 사람이었다. 진지한 것 보다는 재미있고 가벼운 것을 주제로 대화하기를 좋아했고 속마음을 쉽게 꺼냈으며 사람들을 웃게 만들고 즐거운 분위기를 만드는 밝은 사람. 힙한 것을 발 빠르게 좇는 편이어서 가끔 지원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는 그런 사람. 사진전을 열고 싶다면서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사진들은 죄다 자신이 그날 입은 옷을 찍은 것뿐이었기에, 신영이 하고 싶다고 염불을 외우다 사라진 다른 것들처럼 사진전 역시 말로만 존재하다 사라질 것이라고 지원은 생각했었다. 그런 신영이 사진전이라니. 

지원은 동네 베이커리에 들러 마카롱을, 그리고 그 옆에 있는 꽃집에서 스토크가 풍성하게 들어간 장미 꽃다발을 샀다. 안국역에서 내린 지원은 사진전이 열린다는 갤러리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가로수 가지에는 봄이 성큼 다가왔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푸릇한 새 이파리들이 빼곡히 자라나고 있었다. 연한 금빛 햇살이 닿은 이파리들이 바스락거리며 풋내를 풍기는 것 같았다. 매년 맞는 계절임에도 지원은 이파리들이 자라나고 꽃봉오리가 피어오르는 이 철이 항상 낯설었다. 남모를 부끄러움과 낯선 감정이 올해도 어김없이 가슴 한켠으로 슬그머니 밀려드는 걸 보니 봄은 봄이라고 지원은 생각했다. 


―왔어? 뭘 이런 걸 사왔어! 

높은 톤의 목소리, 풍성하고 헝클어진 머리, 해사한 눈웃음, 옅게 풍기는 시트러스 향기까지 신영은 변한 게 없었다. 신영에게 마카롱과 꽃다발, 축하한다는 말을 건넨 지원은 다른 사람들과도 인사하는 신영을 뒤로하고 갤러리를 둘러보았다. 사진들은 재개발 예정 지역의 한 주택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지어진 당시부터 지금까지 버텨낸 시간이 느껴지는 구식의 주택, 그 주변의 낡고 오래된 건물들, 슈퍼마켓, 오래된 세탁소와 같은 것들,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 그 주택이 처음 지어졌을 당시의 모습 역시 함께 전시되어 있어서 지원은 신영이 그 사진들을 어떻게 찍고 구했는지 궁금했다. 아니, 이 전시를 어떻게 기획하게 되었는지가 제일 궁금했다. 

‘E구 J동 128-6번지, 8℃에서 12℃까지’

지원이 팜플렛에 적힌 사진전 제목을 다시 읽어 보고 있을 때였다. 

―지원, 오늘 뭐해? 

어느새 옆에 다가온 신영이 어깨에 팔을 두르며 물었다. 

―오늘? 너 봤으니 이제 집에 가겠지? 

―조금 있으면 나도 갈 건데, 나랑 한 잔 할래? 밥 먹고 차를 마셔도 되고.

지원은 잠깐 생각하다가 흔쾌히 그러겠노라고 약속했다. 오랜만에 만난 신영이 반갑기도 했고 어쩌다가 사진전을 열게 된 건지 이야기를 듣고 싶기도 해서였다. 신영이 잠시 일을 볼 동안 지원은 마음에 드는 사진 앞에서 시간을 보냈다. 80년대 식 주택 안 거실의 해질 무렵 풍경. 고무나무 화분 너머 베란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화분과 텔레비전, 가죽소파와 늙은 강아지의 털 위에 노랗게 내려 앉아 있었다. 지원은 사진을 들여다보다가 갤러리 입구에서 판매하는 도록을 한 부 샀다. 


두 사람은 갤러리에서 나와 길을 걸었다. 한옥마을 방향으로 살짝 걸어 내려오니 바람을 타고 갓 구운 빵 냄새가 풍겨왔다. 

―냄새 장난 아니다. 

―빵 먹고 싶어졌어…. 

―그럼 빵으로 간단하게 때우고 한잔 하러 갈까? 

―좋아. 그러자. 

냄새의 근원지는 길 건너편의 베이커리였다. 신영과 지원은 누가 뭐랄 것도 없이 베이커리에 들어가 크루아상과 브리오슈, 각종 페이스트리를 집어 들었고, 카페오레 두 잔을 함께 주문했다. 크루아상을 각자 한 입씩 베어물자 빵 껍질부터 바스라지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버터의 고소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크루아상에 이어 브리오슈까지 순식간에 해치운 두 사람은 흡족한 모습으로 카페오레를 마시며 근황을 주고받았다.  

―놀랐지?

근황을 주고받다가 잠깐 생긴 대화의 틈새를 깨고 신영이 물었다.. 

―뭐가?

―내가 진짜로 사진전 열어서. 

신영의 말에 지원은 멋쩍게 웃었다. 

―너도 진짜 한결같이 빈말 못한다.

―그래. 이렇게 진지하게 사진을 찍고 있는 줄 몰랐어. 이 전시는 어쩌다 하게 된 거야?

―너, 샴페인 마실 때, 온도가 진짜 중요한 거 알아?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신영은 재작년 연말 파티에 샴페인을 사갔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일을 마치고 급하게 가느라 마트에서 직원이 맛있다고 추천해준 샴페인을 샀고, 도착한 모임에서 기대에 부풀어 샴페인을 마셨는데 생각보다 맛이 없어서 다들 손을 대지 않게 됐다고. 

―그런데 지명 언니가 등장을 한 거지. 너도 알지? 술지명 언니. 그 언니가 우리 등짝을 때리면서, 아이고 이 바보들아! 하더니 막 버킷에다가 얼음이랑 물을 붓더라? 그리고 거기에 샴페인을 얼마간 담가두고, 샴페인이 엄청 차가워진 다음에 딱 마셨는데! 세상에. 아까 우리가 마신거랑 완전 다른 거야! 

―그게 네 전시랑 무슨 상관이야.  

신영은 지원에게 눈을 흘겼다. 

―샴페인은 8℃에서 12℃로 마셨을 때 가장 맛있대. 그날 정말 그랬거든, 그 온도를 유지하면서 마시니까 시시각각 다른 맛을 내더라고. 꼭 계절이 변하는 것처럼.  

―한 와인에서 다른 맛이 나? 

신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 인상적이었어. 그리고 그때, 우리 집 생각이 났어.

―너희 집?

신영은 지원이 갖고 있는 도록을 가리키며 달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지원은 도록을 신영에게 건넸다. 신영은 도록을 펼쳐 사진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붉은 벽돌 주택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여기야. E구 J동 128-6번지. 88년에 지어졌는데, 이번에 재개발 때문에 팔려서 곧 사라질 거야. 그래서 우리 가족들 이사 가게 됐거든. 근데 이 집이랑 동네에서의 빛나던 순간들이 떠오르더라고. 그래서….

말끝을 흐리듯 맺은 신영은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도록을 한 장씩 넘기고 있었다. 태어난지 얼마 안 된 강아지를 찍은, 초점이 흐릿한 97년도의 사진, 맛나 분식집 앞에서 찍은, 입가에 떡볶이 국물을 잔뜩 묻힌 채 친구들과 줄줄이 서서 까르르 웃고 있는 사진. 

지원은 사진에서 사진으로 흐르듯 옮겨가는 신영의 애정 어린 눈길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한 사진을 본 지원은 저도 모르게 도록으로 손을 뻗었다. 

―아, 나 이거, 이 사진 되게 좋았어. 이것도. 

지원은 두 장의 사진을 짚었다. 하나는 붉은 벽돌집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바깥 계단에 각자 장난감을 든 여자아이들이 일렬로 계단 위에 앉아 있는 99년도의 사진이었고, 또 한 장은 2020년도에 찍은 해질 무렵 붉은 벽돌집의 마당 사진이었다. 벽돌 주택 앞, 마당에 서서 낮은 담 너머로 해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한 여성의 뒷모습과 그 옆에 앉아 귀를 긁는, 이제는 늙은 개의 모습이 담겨 있는 사진. 신영은 햇살을 받아 반짝이며 빛나는 첫 번째 사진 속 여자아이들의 머리와 두 번째 사진 속 여성의 등을 손끝으로 쓸어보았다. 

―나도 이 사진들 좋아해. …아, 맞다. 

신영은 가방을 뒤져 엽서 뭉치처럼 보이는 것을 꺼냈다. 기념으로 사진들을 엽서로 만들어 뽑은 것이라 중얼거리며 신영은 그중 엽서 몇 장을 뽑았다. 지원이 좋다고 말한 사진 두 장과 해지는 순간의 거실 사진 한 장, 지원이 오래도록 앞에 서 있었던 사진이었다. 

―아까 이 사진 앞에 오래 서 있길래 ….

지원은 신영이 건네는 엽서를 건네받은 뒤, 한참 그 사진들을 들여다보았다. 모두 금빛으로 빛나는 사진들. 지원은 신영이 말하는 한 샴페인의 다른 맛이 무엇인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지원은 고개를 들어 신영을 보았다. 창 밖에서 지는 태양의 끝자락이 카페오레를 마시는 신영의 윤곽을 비추며 반짝이고 있었다. 








PIPER-HEIDSIECK Champagne Cuvee Brut 


와인 소개


파이퍼 하이직을 마시기 이전에도 샴페인을 몇 번 마셔보았지만, 사람들이 왜 열광하는지 이유를 전혀 알지 못했다. 샴페인 맛의 비밀은 온도에 있었다! (샴페인을 마실 때 가장 기본적인 것에 가까운 지식이다. 그만큼 나는 뭣도 모르고 와인을 마셔대고 있었다….) 파이퍼 하이직을 모임에 가져와준 지인분이 (와인 전문가인 분이어서 함께 마실 때마다 많이 배우곤 했다.) 온도를 적절히 낮춰주셨고, 함께 샴페인을 마셨는데…! 내가 알던 샴페인의 느낌과 너무나 달랐다. 첫 모금을 머금자 마치 배스킨라빈스의 아이스크림 슈팅스타처럼 상쾌하게 입 안에서 샴페인의 탄산이 터졌다. 촉감으로 샴페인을 맞이한 뒤에는 맛의 변화가 펼쳐졌다. 초여름의 아오리 같은 맛이 났다가, 배의 달콤 신선한 맛이 났다가, 가을에 어느 빵집에서 구웠을 브리오슈의 고소한 맛까지. 칠링이 제대로 된 샴페인이란 이런 것이구나를 처음 깨달은 날이었다. (모든 와인의 서빙 온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배운 것은 슬프게도 좀 더 이후의 이야기다….)


-파이퍼 하이직은 1785년 플로렌스 루이 하이직에 의해 '여왕을 위한 최고급 샴페인'을 생산한다는 목표로 설립되었다. 1837년 앙리 귀욤 파이퍼 가 회사를 물려 받으며 파이퍼 하이직으로 개명되었고, 유명 주얼리 및 패션 디자이너와의 협업을 통해 럭셔리함을 키워왔다. 2011년도에 프랑스 최고의 럭셔리 브랜드를 소유한 EPI 그룹에 소속되었다. 


정보 출처 :와인 21  https://www.wine21.com/14_info/info_view.html?Idx=2835


구매 정보 : 롯데마트 

이전 04화 Bottletalk. 한 병 정도의 이야기. 04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