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ction. 우중 산책
(fiction) Bottle 03. 우중 산책.
-비 오네요.
낮고 느린 목소리. 고개를 드니 내 자리 파티션 앞에 선 재현이 저 멀리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목을 빼고 그의 시선을 쫓았다. 회색 빛 구름이 잔뜩 낀 하늘 덕에 세상은 한 겹 필터를 씌운 듯 흐렸다. 총무부의 희연 언니와 우리 팀의 막내 수진, 재현과 나 이렇게 네 사람은 함께 점심 식사를 하고 종종 야근이 있을 때면 저녁을 시켜먹기도 하는, 소위 밥 팀이라 부르는 모임의 일원이었다.
-희연 언니는 오늘 점심 부서 회식이라 그러고, 수진이는 외근 나갔다는데….
-…아.
나는 말끝을 흐렸고, 재현은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나는 그가 오늘은 각자 먹자는 나의 의도를 눈치채고 가 주길 바랐다. 내가 보아온 재현이라면 나와 둘이 어색하게 밥 먹는 것을 원하지 않을 거라고, 내 의도를 바로 읽고 이해할 거라고 생각했다. 밥 팀의 일원이었지만, 나는 재현과 개인적인 대화를 나눈 적이 매우 드물었다. 그가 말수가 워낙 적은 사람이기도 했고, 나도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이라 따로 말을 붙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재현이 고민하는 순간의 침묵도 어색했던 나는 파티션 아래에 앉은 채, 애꿎은 손톱만 내려다보며 만지작거렸다.
-…그럼 오늘은 둘이 먹어야겠네요. 갈까요?
마침내 입을 연 재현에게서는 의외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거절하지 못한 나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내 식당에서 밥을 먹자는 나의 제안에 재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비가 와서인지 식당은 이미 만석이었다. 눅눅한 공기 때문에 식당에 깔린 반찬 냄새가 불쾌하게 느껴졌다. 재현은 앉을자리를 찾으려 식당 안을 한 번 둘러보곤 내 어깨를 톡톡 쳤다.
-도연 씨, 그냥 밖에서 먹어야 될 것 같아요.
그냥 아무 빈자리에나 앉아서 먹자고 말하려던 순간, 사내 식당 구석에 같은 층 직원들이 멀뚱히 서 있는 나를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말이 많은 팀이었다. 재현과 단 둘이 있는 모습을 보면 이러쿵저러쿵 말이 나올 것만 같아서 나는 서둘러 재현의 말에 동의했다. 자신들의 자리로 오라고 손짓하는 그들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인 나는 재현과 한 발 거리를 둔 채 밖으로 걸어 나왔다. 밖으로 나가려던 재현이 갑자기 멈춰 섰다.
-우산을 깜빡했어요. 금방 가져올 테니까, 후문 쪽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실래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현은 엘리베이터 두 대가 모두 고층에 있는 것을 보더니 비상출입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나는 그의 커다란 뒷모습이 비상문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후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허기진 배를 붙들고 점심시간만을 기다렸는데, 갑자기 식욕이 사라진 것 같았다. 약간의 긴장감이 식욕이 있던 자리를 채운 기분이었다.
재현과 나는 한 우산 아래 어깨를 나란히 했다. 밥 팀과 함께 종종 가던 근처의 백반집에서 점심을 먹기로 한 우리는 말없이 길을 걸었다. 한쪽 어깨가 젖을 만큼 재현이 옆으로 몸을 뺐음에도 우산 안을 꽉 채우는 그의 존재감을 보며 재현이 덩치가 컸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걸어가려니 가까웠던 백반집이 꽤나 멀게 느껴졌다.
백반집의 낡은 문 앞에는 삐뚜름한 글씨로 ‘금일 휴업’이라 적혀 있었다. 오늘은 뭔가 날이 아닌가 보다고 속으로 생각할 무렵, 재현의 느릿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김밥 괜찮으세요?
뭐든 어떻겠나 싶은 마음이었으므로 나는 좋다고 대답했다.
회사 바로 앞에는 제법 큰 공원이 있었다. 밥 팀 멤버들과 나는 점심을 먹고 나면 커피를 한 잔씩 손에 쥐고 그곳을 한 바퀴 걷곤 했었다. 보통 희연 언니와 수진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고 나는 그걸 주로 듣는 편이었으며, 재현은 우리의 뒤에서 묵묵히 함께 걷기만 했다. 공원의 후미진 곳에는 낡은 정자가 하나 있었는데, 재현은 나를 그곳에 데려다 놓고는 잠시만 기다려 달라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정자 주변에는 노랗고 붉은 낙엽이 잔뜩 떨어져 있었다. 곧 겨울이 올 것이었다. 빗방울이 정자를 불규칙하게 두들기는 소리와 흙과 낙엽 사이로 서서히 스며드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재현을 기다렸다. 젖은 나뭇잎과 흙의 냄새가 듬성듬성 물이 고인 땅에서 정자의 오래된 나무 틈새로 피어올랐다. 뒤편에서 낙엽과 흙, 잔돌을 밟는 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리니 재현이 오는 모습이 보였다. 양손에는 컵라면을 쥐고, 손목에는 검은 봉투를 매달고, 우산은 어깨에 기대 목으로 고정한 채 다급히 걸어오는 모양새가 마치 곡예라도 하는 것 같아 순간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는 정자 아래로 내려가 그에게서 라면을 받아 들었다. 재현은 나와 자신 사이에 김밥 두 줄을 조심스레 펼쳤다.
-김밥 어디서 샀어요?
-역 앞에 김밥 파시는 아주머니 아세요?
-아, 네. 출근길에 가끔 보이시던데.
-네. 오늘 그분 나오시는 날이라서. 여기 김밥 맛있거든요. 라면은 혹시 추우실까 봐….
-김밥엔 역시 라면이죠.
우리는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르는 라면을 후후 불어가며 먹었다. 김밥은 단무지, 햄, 계란, 당근, 오이와 시금치가 들어간 기본적인 구성이었는데, 생각보다 꽤 맛이 좋았다. 조금 싸늘해진 몸에 따뜻한 기운이 맴돌았고 어느새 사라졌던 허기도 돌아와 나는 내 몫의 김밥과 라면을 깨끗하게 먹어치웠다.
-입에 맞으신가요?
-네. 정말 맛있는데요. 여기 어떻게 아셨어요?
-어쩌다가 한 번 먹었는데 맛있어서, 그 뒤로 아주머니 나오시는 날 아침엔 여기서 김밥 꼬박꼬박 사 먹어요.
-오늘도 그럼 이미 드신 거 아니에요?
-또 먹어도 괜찮아요. …아. 맞다.
살짝 미소를 지은 채 말하던 재현은 문득 떠올랐다는 듯 옆의 검은 봉투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붉은 딸기가 비닐 백에 가득 들어 있었다.
아주머니가 먹으라고 같이 주셨어요.
-와. 이게 뭐예요. 재현 씨, 정말 단골 맞나 봐요.
재현은 자연스럽게 남은 쓰레기를 검은 봉투에 모두 쓸어 넣고 그 자리에 딸기가 들어 있는 비닐 백을 펼쳤다. 제철도 아니었는데 딸기는 맛있게 잘 익어 있었다. 붉은 과육을 한 입 베어 물자 새콤하면서도 달콤한 향기가 코와 입 안으로 동시에 번져나갔다.
-맛있네요.
재현은 흡족한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현이 웃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인 것 같았다. 꽤나 무해한 미소였다. 밥을 먹을 때처럼 우리는 말없이 딸기를 먹었다. 다 먹고 남은 쓰레기를 주섬주섬 치운 재현은 시계를 보더니 점심시간이 남았는데 혹시 걷다 들어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와 달리 사람이 없었던 공원은 오로지 빗소리만 있는 듯했다. 이상하게 온 몸의 감각이 촉각을 세우는 것 같았고 덕분에 젖은 흙, 아스팔트, 나무, 비에 젖은 낙엽이 깔린 공원의 흙길을 밟을 때마다 들려오는 기분 좋은 소리와 차갑고 축축한 공기에 스민 냄새에 집중할 수 있었다. 아직 입 안에 남은 딸기의 상큼한 뒷맛을 느끼며, 나는 재현과 어깨를 맞대고 걸었다. 간간히 서로의 어깨와 팔이 스치기도 했다.
공원 중앙의 작은 호수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잠깐 걸음을 멈추고 호숫가에 서 있었다. 수면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제각각 동그랗게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고, 파문을 따라 옅은 물비린내가 함께 퍼져오는 듯했다.
-비 오는 날 이렇게 걷는 것도 나쁘지 않네요. 운치도 있고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재현이 말했다. 나는 웃었다. 그리고 그의 말에 동의했다. 비 오는 날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비 오는 날 걷는 것도 즐기지 않았지만, 나는 그날의 소박한 점심과 침묵 속의 우아한 산책이 좋았다.
그것이 그날 나눈 우리 대화의 전부였다. 우리는 잠깐 호수를 바라보고 서 있다가 회사로 돌아왔다. 우산을 나눠 쓰고 한쪽 어깨를 젖게 둔 채로. 그러는 사이 우리의 고요함은 이전보다 더 부드러워져 있었다.
Bottle 02’s wine : Joseph Swan Vineyard Pinot Noir 2012.
와인 소개
조셉 스완은 미국 소노마 카운티의 러시안 리버 밸리에 있는 와이너리다. 러시안 리버 밸리는 소노마의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어 날씨가 시원하고 안개가 많이 끼는 지역이다. 조셉 스완 퀴베 드 투아는 조셉 스완 와이너리에서 관리하는 6개의 빈야드에서 수확한 포도를 블렌딩해 만들어진, 가장 인기 있는 와인 중 하나라고 한다.
조셉 스완은 지인들과의 블라인드 테이스팅 모임을 위해 와인을 고르러 갔다가 샵 사장님의 추천으로 구매하게 되었다. 부르고뉴 피노누아 추천을 부탁드렸지만, 사장님은 좀 재미있는 와인이 있다며 미국의 피노누아를 건네주셨다. 미국 피노누아와 부르고뉴의 피노누아는 다른 느낌이라고 알고 있었으나, 부르고뉴 피노누아를 좋아하신다면 이 와인 역시 분명 재미있어할 거라는 확신 어린 설득에 이 와인을 구매했다. 결과는? 블라인드 테이스팅에서 모두 부르고뉴 와인일 거라고 추측했다!
향긋한 체리와 크렌베리의 맛에 흙 향과 젖은 낙엽의 향도 우아하게 덧붙여져 있어서 살짝 안개가 끼거나 비가 오는 날을 젖은 숲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한 번 마시고 난 뒤, 꽤 가격이 나감에도 두 번이나 더 구매해서 마시게 만들었던 인상적인 피노누아. 기회가 된다면, 또 마셔보고 싶을 듯하다.
구매정보 : 마꽁이네 와인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