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ee Apr 16. 2021

Bottletalk, 한 병 정도의 이야기. 02

fiction. 프루티 프루티 나이트


(fiction) Bottle 02. 프루티 프루티 나이트. 


대학 시절 자취를 하기 시작하고 나서야 나는 그간 내가 누려왔던 삶의 일부가 누군가의 뼈 빠지는 노동으로 채워져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식사와 설거지에서부터 보송하게 개켜진 빨랫감이라던가 매번 갈아 끼워져 있는 통통한 휴지, 비워져 있는 쓰레기통, 항상 먹음직스러운 반찬과 채소, 과일 따위로 잘 정리된 냉장고 등등. 그 소소하면서도 많은 시간을 차지하는 노동을 매일같이 하며 생활자로서의 힘을 길러나갔으나, 딱 하나, 나의 초라한 내 경제적 사정이 그대로 반영된 냉장고에는 손을 잘 대지 않았다. 항상 텅 비어 있어서 정리를 할 필요조차 없었다. 언론고시 준비를 하던 그때에도 나와 룸메이트 수영이 함께 쓰던 냉장고 내부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가끔 우리 부모님과 수영이네 본가에서 보내주는 김치와 기본 반찬이라던가 맥주 두어 캔, 계란, 썩어가는 채소 몇 개 따위가 냉장고 안을 채우는 음식의 전부였으니까. 

당시 자취하는 친구들과 종종 모여 자취를 하면서 가장 아쉬운 음식을 이야기하다 보면 대부분은 집밥을 언급하곤 했다. 나와 수영의 의견은 조금 달랐다. 우리가 가장 그리워했던 것은 과일이었다. 사과와 포도, 딸기, 체리, 참외 등 계절에 따라 제철 과일이 차 있던 커다란 본가 냉장고의 신선 칸이 그리웠다. 가끔 아르바이트비가 밀리면 며칠 라면에 햇반을 먹으며 버텨야 했던 우리에게 제철 과일이란 직장인 친구나, 부모님이 집에 올 때야 가끔 먹을 수 있었던 귀한 음식이었다.

그날은 기다리고 있던 모 방송사 공채의 3차 면접 결과가 발표 나는 날이었다. 실무 면접을 꽤 훌륭히 치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결과에 대한 기대가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탈락이었다. 회색 글씨로 짤막하게 쓰인 거절의 글귀를 보고 있자니 입이 절로 썼다. 3차에 떨어졌다는 내 문자를 받은 수영은 퇴근하자마자 내 방문을 열고 들어와 내가 누워 있던 소파형 매트리스 위에 털썩 엎어졌다. 

-호프집 가서 과일 안주에 생맥주 왕창 마시고 싶다. 

-호화롭네. 왜 하필 과일 안주냐? 치킨이나 시킬까?

-아니. 비싸고 과하고 상큼한 거 먹고 싶어. 입이 써. 

-나 근데 월급 전이라 돈이 없다. 

-나도.

수영과 나는 잠깐 말없이 누워 있었다. 그때 수영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명 언니!

나는 몸을 반쯤 일으키고 수영을 쳐다봤다. 그리고 곧 수영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깨닫고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명 언니는 언론고시 스터디에서 만난 나의 지인으로 3년간 방송사 최종 면접에서 안타깝게 미끄러지기를 반복한 뒤, 계약직 PD로 프로그램을 맡아 일을 하며 방송사 공채를 노리는 사람이었다. 술을 워낙 좋아해서 언니를 만나는 날이면 집에 두 발로 걸어 들어가기를 포기해야 했고, 한잔하고 싶다는 말 한마디면 적금 통장을 깨서라도 양손 가득 술과 안주를 사 들고 와주는 사람이었다. 수영을 소개해준 날 곧장 번호를 교환하고 친구가 될 만큼 넉살도 좋았다. 수영은 곧바로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언니. 영지 3차 떨어졌대. 상큼한 과일 안주에 술이 그렇게 땡긴다네요. 우리 월급 전이라 거지인데, 술 한 잔 사주실 생각, 혹시 들지 않으시나요? 

그 말을 들은 언니가 집까지 오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알고 보니 이번 공채에 지명 언니 역시 지원을 했고 눈칫밥을 먹어가며 휴가를 받아 보러 간 면접의 결과는 탈락이라고 했다. 양손 가득 맥주와 과일을 들고 올 것이라는 우리의 예상과 달리, 언니는 불룩한 백팩만을 메고 추위에 빨개진 손을 호호 불며 대문 앞에 서 있었다. 

-니들이 소맥파인 것은 잘 알지만, 이번만큼은 날 믿어봐.

언니가 백팩에서 꺼낸 것은 놀랍게도 와인이었다. 중앙에 꼬불꼬불한 필기체로 무어라 적혀 있는 하얀색 라벨이 붙은 세련된 병.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언니는 가방에서 냉동 토르티야와 토마토소스 캔, 모차렐라 치즈와 비엔나소시지를 한 봉지 꺼냈다. 

-나도 지금은 개털이어서 집에 있는 거 다 긁어왔어. 때마침 상큼한 거 얘기를 하기에 이 와인이 딱 맞겠다 싶었지. 집에 양파나 버섯 같은 거 없니? 

언니는 냉장고를 뒤져 썩기 일보 직전의 양파와 새송이버섯을 발굴해냈고, 그것들을 다듬으며 우리에게 토르티야를 펼쳐서 토마토소스를 펴 바르라고 지시했다. 우리는 토르티야 위에 토마토소스를 펼쳐 바르고 언니가 썰어온 양파와 버섯, 소시지를 잔뜩 뿌린 뒤, 그 위에 모차렐라 치즈를 왕창 얹고, 전자레인지에 그것들을 차례로 집어넣었다. 

우리가 작은 이 인용 식탁 위를 서둘러 치우자 지명 언니는 가방을 뒤져 와인 오프너를 꺼냈다. 나는 그 와중에 오프너까지 챙겨 온 언니의 섬세함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니들이 와인 같은 걸 마실 리가 있겠니. 다 내가 생각이 있어서 챙겨 왔지. 

-어련하겠어? 언니 덕에 오늘 고오급 술 마시네.

능청스러운 수영의 말에 언니는 피식 웃으며 능숙하게 와인 코르크를 빼냈다. 깡소주파 술지명이 언제부터 와인 같은 고급술을 마시게 된 거냐고 묻자 언니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같이 일하는 피디가 와인을 엄청 좋아해서, 회식할 때면 소주보다 와인을 마시게 되었다고. 그런데 그게 생각보다 맛이 나쁘지 않았더라고 했다. 차마 비싼 것을 살 여력은 되지 않아 마트나 샵에서 저렴한 가격대의 와인을 종종 찾아 마시곤 한다고, 덕분에 뱃살은 두둑이 모이고 지갑만 날씬해졌다며 언니는 투덜거렸다. 무언가에 빠지면 아닌 척하면서 최선을 다해 빠진 대상을 파고드는 언니를 알고 있었기에 그 불평이 사실은 애정의 또 다른 면임을 확신했고, 그 덕에 언니가 가져온 와인에 대한 기대감이 조금 올라갔다. 찬장을 뒤져 투명한 유리 물 컵을 세잔 꺼내자 언니는 와인을 천천히 따라 주었다. 살짝 벽돌 빛깔이 도는 버건디 색의 와인에 우리는 괜히 탄성을 질렀다. 신이 난 수영이 덥석 와인 잔을 집어 들고 입에 갖다 대려 하자 지명 언니는 수영을 가로막았다. 

안 돼! 와인은 향도 즐겨야 된다고.

언니의 호들갑에 우리는 괜히 잔을 휘휘 돌리며 와인의 향기를 맡아보려고 했다. 알싸한 알코올 향이 나는가 싶더니, 그 뒤를 이어 어디선가 맡아봤지만 뭔지 모를 과일의 향기가 희미하게 차차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오. 나는 짧게 감탄했다. 

-야. 향 죽이지. 제대로 된 잔에 마시면 더 좋은데. 

전자레인지에서 토르티야 피자를 꺼내오며 지명 언니가 중얼거렸다. 성격 급한 수영은 잔에 코끝을 대고 잠깐 킁킁대더니 벌써 와인을 입에 털어 넣고 있었다. 

-윽, 떫어. 

수영이 중얼거리자 지명 언니가 웃었다. 

-천천히 마시라고. 

나는 언니가 시킨 대로 시간을 두고 다시 잔을 돌려가며 향을 맡아보았다. 달큰한 라즈베리와 붉은 장미꽃의 향기가 알싸한 냄새와 겹쳐 피어올랐다. 이전보다 더 진해진 향에 딸기 농장에라도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잘 갈아진 흙 위에 푸릇한 풀들과 붉은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 있는 농장. 나는 이런 게 와인이라면 마셔볼 만하겠다는 생각을 하며 천천히 한 모금을 입에 머금었다. 

-어때?

지명 언니가 물었다. 수영의 말대로 사이사이 떫은맛이 느껴져 얼굴이 찌푸려졌지만, 그 떫은 감각은 곧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전의 향기보다 더 그윽하고 새콤달콤한 맛이 입안을 메웠다.

-언니. 이거 딱 과일 농장. 라즈베리랑 딸기 같은 거 쌓아놓고 먹다가 떫은맛 나는 과일 한 번씩 씹는 것 같아. 

내 말을 들은 언니는 활짝 웃었다. 수영은 라즈베리? 하고 중얼거리며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셨다. 

-나는 감기약 맛이 나는데.

수영의 말에 지명 언니가 으하하, 하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그랬다. 수영의 말처럼 어린 시절 감기에 걸렸을 때 엄마가 숟가락에 따라준 주황색 감기약의 맛이 느껴졌다. 

-그래도 맛있어 이거. 감기약 맛이라고 하니까 그 생각만 나지만. 라즈베리가 원래 감기약 맛 비슷한 느낌이 있지 않아? 한겨울에 매번 엄마 말 안 듣고 목도리도 안 하고 놀다가 감기 걸리면 열 펄펄 끓어서 밤새 앓았거든. 그때 엄마가 싫다는 나 일으켜서 감기약 떠먹여 주던 거 생각난다. 목이랑 코랑 부어서 맛을 거의 못 느꼈어도 그 약 단맛은 기억이 나네. 

지명 언니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와인을 마셨다. 우리는 남아 있는 자투리 음식으로 만들어낸 피자를 안주 삼아 와인을 비워나갔다. 한 병밖에 없는 와인이 아까워 조심스럽게 한 모금씩 마시다 보니 속도가 무진장 느려 아무도 취기를 느낄 수 없었다. 

-눈 온다. 

-나가자. 한 대 꼬스를겸. 

우리는 잠옷 차림 위에 패딩 점퍼를 입고 슬리퍼를 신은 채 집 앞에 옹기종기 모여 섰다. 수영과 지명 언니는 담배를 피웠고 나는 그들 옆에서 옆집 차 위에 어느새 조금씩 쌓이기 시작한 눈을 긁어모아 작은 동그라미로 뭉쳤다. 

-딱 이러다가 감기 걸렸는데. 맨손으로 눈 뭉치고 목도리도 안 하고, 맨발로 뛰어나가 놀고. 

수영이 열심히 눈 뭉치를 만들어 일렬로 나열하는 나를 보며 말했다. 그 말을 듣자 입안에서 방금 마신 와인의 감기약 같기도 하고 붉은 딸기와 라즈베리로 가득 찬 바구니 같기도 한 맛이 떠올라 침이 고였다. 

-와인 남았지?

-반 병 정도 남았지. 

-언니 저 와인 많이 비싸? 나 월급 나오면 저거 또 먹자. 찔끔거리니까 아쉬워. 두 병 사놓고 실컷 먹음 좋겠어. 

-그렇게 안 비싸. 근데 은근히 생각나는 맛이지? 떫긴 한데 뭔가 잘 넘어가고. 달달한 감기약 맛도 나고. 

지명 언니는 담뱃불을 발로 밟고 꽁초를 주우며 대꾸했다. 

-그러게 한겨울에, 입이 쓸 때 먹기 딱 좋네.

수영이 중얼거렸다. 나는 입맛을 다시며 맨손으로 동그랗게 뭉친 눈 뭉치를 지명 언니와 수영에게 하나씩 던졌다. 아직 와인이 반 병이나 남아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Viberti Langhe Nebbiolo 2018.

와인 소개


이탈리아 와인이라면 키안티밖에 몰랐던 내게, 자주 가는 와인샵 매니저님이 조심스럽게 추천해주셨던 와인.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 지역에서 생산되는 네비올로 품종으로 만들어졌으며, 이탈리아 3대 와인 중 하나인 바롤로(역시 네비올로 품종으로 만들어진다)와 비슷한 캐릭터를 맛볼 수 있어 베이비 바롤로라 불린다고도 한다. 가격도 바롤로보다 훨씬 싸서 접근하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았다. 


와인을 막 열었을 때엔 네비올로 품종 특유의 강렬한 타닌이 느껴졌지만, 병을 열어놓고 조금씩 지나면 타닌이 부드러워지며 숨겨두었던 체리 라즈베리와 같은 붉은 베리류와 장미의 향기와 맛이 화사하게 후각과 미각을 자극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시시각각 열리며 변화하는 와인의 맛과 향을 즐기는 재미와 더불어 나를 네비올로라는 품종에 빠져들게 만든 첫 와인이다. 


구매정보 : 뱅가드와인머천트

이전 01화 Bottletalk, 한 병 정도의 이야기. 01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