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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d Apr 16. 2021

Bottletalk, 한 병 정도의 이야기. 01

nonfiction. 의외의 선택, 초봄의 샤도네이와 일대종사

(nonfiction) Bottle 01: 의외의 선택, 초봄의 샤도네이와 일대종사.

추웠던 날씨가 슬그머니 풀리기 시작하면 보통 미세먼지와 황사가 활개를 친다. 하지만 그 먼지 소굴을 뚫고도 봄은 오게 마련이고, 어떻게든 오는 봄을 알아채고 꽃이 피기 시작한다. 살짝 따스해진 공기와 꽃이 만개한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나는 …입에 침이 고인다. 와인을 알기 이전엔 그저 시간이 또 흐르고 때가 되어 꽃이 피었거니 했지만, 이제는 다르다. 봄이 다가온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꽃망울이 터지듯 톡 쏘는 샴페인과, 나무와 땅에서 솟아나는 새싹과 꽃들이 뿜어내는 향기를 여민 화이트 와인을 연상하고 마는 것이다. 


3월 말이었다. 직장이 여의도 근처에 있어서 출퇴근길마다 서강대교를 건너고 한강변을 지나곤했는데, 그날따라 벚꽃이 잔뜩 휘날리는 파스텔 톤의 한강변을 보고 있자니 버스에서 내려 근처 와인샵이나 마트에서 화이트와인을 집어 들고 강변에 앉아 낮술이나 마시고 싶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날 샤도네이를 한 병 깠다. 물론 출근길 중간에 내려서 깐 것은 아니고. (마음으론 낮술이었지만….) 퇴근 후 셀러에서 샤도네이를 꺼냈다. 출근길 한강변의 벚꽃과 퇴근길 밤벚꽃이 그득한 불광천변의 풍경을 떠올리며 적절히 칠링을 해둔 라로쉬 생 마르땡 샤블리 샤도네이를 기세 좋게 한 잔 따랐다.

콧속으로 퍼져나가는 상큼한 라임,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파인애플의 달콤함, 거기에 풍미를 더하는 버터의 향. 와인은 정말 희한한 음료여서 가끔 그 향이 좋을 때면, 잔을 입보다는 코끝에 계속 대고 있게 되는데 그날의 샤블리가 그랬다. 코끝에 잔을 대고 있다 보니 심상으로 그려보는 봄 풍경만 안주 삼아 술을 마시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무엇을 볼 것인가?(이때 좀 더 고민했어야 했다. 그래도 샤도네이인데!) 최근 왓챠에서 왕가위 리마스터링전을 하고 있었고 예전에 보았던 액션신이 우아했다는 기억과 지금 마시는 샤블리가 나름 우아하다는 접점 단 하나로 나는 그날 와인과 함께 할 영화로 일대종사를 골라버렸다. 

오늘 영화 픽 망했네에서 마음이 바뀌는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엽문이 궁선생과 대결을 벌이는 신에서 볼 수 있는 섬세한 쿵푸 철학과 아름다운 장면들이 화이트 와인과 기묘하게 어울리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새하얀 설원의 장례식 장면, 엽문과 궁이의 대결에서 보여주는 단호하고도 아름다운 동작들, 한겨울의 기차역, 피어오르는 증기 속에서 벌어지는 마삼과 궁이의 복수전 등등. 기억에 남는 장면들을 되새기며 샤블리를 천천히 음미했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어떤 점을 떠올려 본다면 역시 시간의 흐름과 그리움일 것인데, 시간이 흐름에 저항하지 못하고 변하는 것들과 훗날 그것을 어깨 너머로 돌아보는 듯한 영화 속 인물들 (궁선생, 궁이, 엽문 모두) 시선이 느껴졌다.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장면은 궁이의 회상이었다. 어린 시절 눈이 쌓인 마당에서 쿵푸를 연마하는 아버지의 아름다운 동작들을 몰래 바라보는 어린 딸, 그리고 딸이 혼자 자신의 모습을 따라 연습하는 것을 지켜보는 아버지. 상큼한 시트러스와 높은 산도, 그리고 파인애플과 흰 꽃의 달콤함만 존재하는 샤블리였더라면 아마 일대종사와 미스매치일 것이었지만, 그것을 잠잠히 눌러주는 부드러운 버터향의 잔잔한 존재가 어쩐지 내게는 과거를 회상하게 만드는 그리운 향기로 작용했던 것 같다. 흰 꽃의 향, 적절한 산미와 어울리는 설원의 장면에 버터향이 더해지니, 모든 자신의 일을 정리하고 누워 아편을 피우고 미소 짓는 궁이의 얼굴에서 어쩔 수 없이 아버지를 보고 쿵푸를 따라했던 어린 시절 그녀의 회상을 읽어낼 수밖에.

그날, 영화를 모두 보고 잔을 치우려다 괜히 여운에 취해(사실 술에 취해) 베란다로 나갔다. 달을 보면서 입맛을 다시니 좀 전에 마신 샤블리의 뒷맛이 여전히 입 안에 남아 있었다. 아직 쌀쌀한 감이 있어도 봄이 온 것 같았다.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그날의 빈 잔을 치웠다.





일대종사의 의미가 뭔지 찾아보니, 무술의 문파에서 한 시대에 나올까 말까한 위대한 스승, 실력으로 널리 이름을 떨친 고수에게 붙여지는 명예로운 칭호라고 한다. 뜻을 알고나니 영화보다는 샤도네이의 훌륭한 생산자, 일대종사를 찾아 마셔보고 싶다는 생각만 그득해졌다. 정말 좋은 생산자의 등급 높은 샤도를 (언젠가..... 마시기 위해서는 열심히 노동해서 지갑을 채워둬야 한다) 마시게 된다면, 그때 또 한 번 일대종사를 봐도 좋을 것 같다. 

무협 영화와 샤도네이는 얼핏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지만, 왕가위의 영화였기에 샤도네이와 꽤나 재미있는 조합이 되었다. 의외의 시도가 먹히다니 다음에도 또 의외의 영화(혹은 책?)와 와인의 조합을 시도해보겠다는 위험한 마음에 설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와인 소개 [Domaine Laroche, Chablis Saint Martin2018] / 구매 : 여의도 이마트 


도멘 라로쉬는 9세기 샤블리 와인이 처음 만들어진 로베디엉세리(L’Obediencerie) 건물에 위치하고 있으며 프랑스 성인 생마르떙의 유물, 13세기 만들어진 포도 압착기 보존, 9세기에 만들어진 지하 저장고를 그대로 사용하는 등 샤블리 1000년의 역사를 그대로 담고 있는 와이너리이다. 라로쉬의 플래그쉽 와인 '생 마르땡'은 로마의 군 장교였던 성 마르땡이 추운 밤 길거리의 걸인을 보고 자신의 망토를 잘라 덮어 준 후, 꿈 속에 예수님이 자신의 망토를 입고 있는 모습을 보고 성직자가 된 스토리를 담은 와인이다.  


출처 : 와인 21  (https://www.wine21.com/13_search/wine_view.html?Idx=139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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