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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ee Apr 19. 2021

Bottletalk. 한 병 정도의 이야기. 04

nonfiction.왼손잡이 복서가 크립톤인을 만났을 때.

(nonfiction)Bottle 04. 왼손잡이 복서가 크립톤인을 만났을 때.

*맨 오브 스틸의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의 반려인인 권 군은 나와 영화를 볼 때마다 날 놀라게 만든다. 워낙 영화를 잘 안 보는지라 대중적으로 크게 인기를 끌었던 영화조차 모를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와 권 군은 주로 집에서 맛있는 술을 마시며 넷플릭스와 왓챠로 (내 기준) 명작들을 함께 몰아보며 데이트를 해왔다. 나도 권 군도 워낙 칩거형 인간이어서 우리 두 사람은 (코로나 시대 이전에도) 이 데이트 방식에 대체로 크게 만족해왔다.

2019년 개봉한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보며 권 군은 마블의 히트작들을 대부분 섭렵했고, 나는 그에게 이제 해리포터와 반지의 제왕을 감상시켜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그 계획에는 큰 차질이 생겼다. 잭 스나이더 버전의 저스티스 리그가 세상에 나온 것이었다.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가 꽤 재미있어서 권 군에게 영업을 하려고 보니…. 예상대로 권 군은 DC 코믹스의 영화를 단 하나도 보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슈퍼맨을 다룬 잭 스나이더의 명작 (물론 내 기준이다) 맨 오브 스틸로 권 군에게 DC 히어로물을 소개하려는 나름의 계획을 짰다.


우리가 맨 오브 스틸을 보면서 (나는 벌써 네 번째 감상이었다….) 마시려고 고른 것은 몰리두커의 더 복서 (Mollydooker, The Boxer 2018)로 호주의 쉬라즈 품종으로 만들어진 와인이었다.



와인을 처음 마시기 시작했을 때 맛보았던 품종이 호주의 쉬라즈였다. 내게 호주 쉬라즈의 인상은…. 앙리 마티스의 그림 같았달까. 진하게 풍겨오는 단맛 덕에, 호주의 쉬라즈는 굵직한 선과 짙고 강렬한 색감으로 대담하게 그려낸 마티스의 스케치와 그림을 떠올리게 했다. 맨 오브 스틸과 몰리두커 더 복서를 매치한 이유는 아무래도 굵직하고 대담한 호주 쉬라즈의 느낌이 히어로물, 특히 그 강렬한 힘의 액션신으로 유명한 잭 스나이더의 맨 오브 스틸과 잘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해서였다. 약 일 년 반 동안 와인을 마셔오며 호주 쉬라즈는 내 취향과 거리가 멀다고 느껴 거의 마시지 않았었는데, 이번에 다시 마셔본다면 어떻게 느껴질지 궁금하기도 했다.





몰리두커의 더 복서는 알코올 도수가 굉장히 높다. 레드와인의 도수가 보통 13.5에서 14.5도 사이를 오가는데, 더 복서는 알코올 도수가 16도나 된다. 강렬하고 묵직한 바디의 와인이 예상되었다. 다른 사람들의 시음 후기를 보니 병 브리딩을 하는데 시간이 꽤 필요할 것 같았다. 영화를 보기 한 시간 반 전부터 몰리두커를 열어두었다. 열어놓은 지 30분 정도 지났을 때 첫잔 맛을 보았는데, 짱짱했다. 가죽과 삼나무, 스파이스와 알싸한 민트향이 주로 느껴졌다. 호주 쉬라즈답게 진한 단맛도 있었다. 복싱으로 치자면 막 스파링을 시작했는데, 상대가 방어를 너무 잘해서 가드 올린 곳에만 내 주먹이 가 닿는 기분이랄까? 단단하고 봐주지 않을 것 같은 느낌. 맨 오브 스틸의 조드 장군의 눈빛과 흡사하단 기분이 들었다. 굽히지 않는 자신의 신념이 눈빛에 그대로 밴, 강렬한 인물.

맨 오브 스틸의 주요한 장점은 액션이지만, 또 다른 장점은 등장인물들의 매력이다. 조드 장군은 서사 속에서 결국 안티 히어로의 자리에 있지만, 크립톤을 재건하겠다는 그의 신념과 열망은 조드 장군을 그저 악당이 아닌, 나름의 탄탄한 서사와 이유를 지닌 안타고니스트로 만들어 준다. 굽히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 조드 장군의 강렬한 모습이 만들어진 데에는 조드 역을 맡은 배우 마이클 섀넌의 공이 굉장히 크다. (그의 눈빛은 정말…!)






몰리두커는 호주 방언으로 왼손잡이란 뜻이다. 우리의 왼손잡이 복서가 초반에 보여준 단단하고 강렬한 캐릭터는 영화 초반부 조드 장군이 영원한 죽음의 형벌을 앞두고도 굽히지 않는 자신의 의지가 담긴 눈빛과 맞먹었다. 시간이   흐르고 우리의 주인공 슈퍼맨이 드디어 등장한다. 나는 헨리 카빌의 슈퍼맨을 보면서  스나이더 감독이 캐스팅을 너무 찰떡같이 했다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는데, 슈퍼맨 특유의 선함과 강인한  등을 표현하기에 헨리 카빌이 너무 알맞았기 때문이었다. (앞서 언급한 조드 장군은 말할 것도 없으며, 양아버지 역할의 케빈 코스트너와 로이스 레인 역의 에이미 애덤스 역시 완벽한 캐스팅이라고 생각한다.) 웬만한 사람 얼굴만  팔뚝에 태평양같이 넓은 어깨를    있는 헨리 카빌의 몸만 본다면 인간 병기와 같은 강인함을 느낄  있을 테지만, 그의 눈빛은 복잡한 자신의 서사를 너무나  표현한다. 일하던 펍에서 양아치 같은 손님에게 모욕을 당하지만 때리지 않고  분노를 참아낼 ,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계속 정체를 숨길  있도록 희생하는 양아버지를 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지구인들을 지키느라 어쩔  없이 자신의 동족을  손으로 죽인  좌절하며 울부짖을 , 등등.

몰리두커가 시간이 흐르며 열리자 초콜릿, 감초, 블랙베리 등의 진한 단맛과 흑연과 허브계열 (유칼립투스) 등이 부드럽게 올라왔는데,  복합적인 맛들, 특히 부드럽고 진한 단맛이 헨리 카빌의 섬세하고 복합적 감성의 클락, 그리고 슈퍼맨과 너무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슈퍼맨은 선한 마음을 지닌 것으로 유명한 히어로다. 그래서 언제나 남을 도우며 살아왔고, 지구인들을 지키고 싶어 했으며, 자신의 동족인 크립톤인과 대치하는 것에 괴로워했다. 대형견미를 지닌 헨리 카빌의 눈빛 연기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 바로 이 지점이었다. 그리고 한결 더 부드러워진 우리의 왼손 복서 와인이 영화와 어우러지는 순간 역시 이 지점이었다.






몰리두커 더 복서는 모두 열린 뒤에도 그 맛이 여전히 진해 선이 굵다고 느꼈지만, 마실 때의 느낌 자체는 부드러운 맛있는 와인이었다. 와인 자체만 놓고 본다면 맨 오브 스틸이라는 영화 전체보다는 선하고 부드러운 눈빛을 가졌지만, 동시에 강인한 히어로인 슈퍼맨 그 자체와 닮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담 하나, 몰리두커의 도수가 높기도 하고, 솔직히 말하자면 호주 쉬라즈가 (좋은 와인이었음에도) 여전히 내 취향의 와인은 아니어서 (진한 초콜릿과 감초의 단맛이 강한 게 내게는 좀 부담스러웠다) 와인을 다음날, 그리고 이틀 뒤까지 뒀다 조금씩 마셔봤다. 하루가 지난 뒤에 마신 몰리두커는 굉장히 훌륭했고, 이틀 뒤에는 허브향들이 사라지고 초콜릿과 감초 같은 단 향만 남아 복합적인 맛이 주는 기쁨이 조금 사라져 있었다. 하루를 꼬박 열어둬도 살아남는 강인한 왼손잡이 복서와 지구에 홀로 남은 크립톤인을 만나게 해보는 것은 꽤 재미있었다.


+여담 둘, 영화가 끝난 뒤 권 군에게 영화가 재미있었는지, 그리고 몰리두커가 마음에 들었는지를 물었다. “나쁘지 않았어”라는 대답이 나왔기에, 나는 둘 다 별로였나 싶어 재차 확인했고 (그렇다… 나는 확실하게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속이 터지는 편이다) 이에 권 군은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자기는 충청도식 어법을 좀 배워야 할 것 같아….” (권 군은 대전 출신이다.) 나쁘지 않았다는 말은 재미 있었다와 맛있었다는 의미라고 권 군은 이어 말했다. 평생을 직진으로 살아온 나는 도무지 저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고 권 군은 내게 유튜브에서 충청도 출신 연예인들이 대화하는 영상을 찾아보라는 조언까지 덧붙였다…. 어쨌든, 충청도식 표현을 파헤친 끝에 알아낸 바로, 권 군은 몰리두커도, 맨 오브 스틸도 모두 맘에 들었다고 한다.


이제 나는 권 군에게 원더우먼과 아쿠아맨, 그리고 배트맨 대 슈퍼맨을 보여주고, 함께 잭 스나이더 판의 저스티스 리그를 볼 생각이다. 다른 영화들도 어울리는 와인을 찾아낼 수 있을까? 맨 오브 스틸은 히어로물치고는 꽤 진지한 철학과 어두운 면을 담고 있어서 겹이 여러 층 쌓인 서사가 만들어졌고 그 덕에 와인을 고르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다음 DC 영화에도 알맞은 와인을 찾을 수 있길 바라본다.  




 와인 소개

몰리두커 더 복서 2018 (Mollydooker, The Boxer 2018)

생산 지역은 호주, South Austrailia의 맥라렌 베일McLaren Vale이다.

몰리두커 와이너리는 2005년에 설립되었고, 호주의 대표적인 와이너리중 하나이며 가족 소유로 운영되고 있다. 몰리두커는 호주 방언으로 왼손잡이라는 의미인데, 실제로 몰리두커 와이너리의 오너 부부도 왼손잡이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일반적인 와인의 제조 과정에는 이산화황이 첨가 되는데, 몰리두커는 이산화황의 첨가를 최소화하는 대신 질소를 넣어 제조한다고 한다. 그래서 와인을 마실 때 질소가 과실의 향을 누르지 않게 제거하는 “몰리두커 쉐이킹”를 권장한다. 이것은 빈티지로부터 2년 내에 오픈할 경우 한잔을 따라내고 다시 스크루캡을 닫은 뒤 병을 흔들어 질소를 날려주는 방법이다.

내가 마신 빈티지는 2018이어서, 역시 몰리두커 쉐이킹을 하고 마셨다.


와인 구매 정보 : 신세계 백화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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