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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d Oct 16. 2021

Bottletalk. 한 병 정도의 이야기. 09

fiction.  박명의 맛

(fiction) Bottletalk.09   박명의 맛. 


어디야? 나는 출구 앞 도착.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 사이로 남자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려온다. 여자는 계단을 오르다 말고 숨을 고른다. 

나 올라가고 있어. 자기 보인다. 

여자의 말이 끝나자 지하철역 출구에 서 있던 키 큰 남자가 여자를 향해 몸을 돌린다. 눈썹을 치켜올리는 남자. 마스크 덕에 웃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남자의 양손에는 짐이 한가득 들려 있다. 

코로나 감염자 수 봤어? 이천 명 넘었대. 

근데도 사람 되게 많네. 거봐 내가 이래서 나오지 말자고 했잖아.

휴대폰을 보던 남자가 내뱉듯이 말하자 여자의 표정이 살짝 굳는다. 여자는 남자의 말을 듣지 못한 척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코로나 감염자 수가 높음에도 토요일의 한강변은 가족과 친구, 연인들과 놀러 나온 사람들로 제법 북적인다. 여자가 걸음을 옮기자 남자도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여자의 뒤를 따라간다. 

어디 가는지는 알고 가는 거야? 

응. 저기 자리 펼 곳 많아 보여서. 

너무 멀지 않아? 그냥 가까운데 아무 데나 앉자. 

저기가 그래도 경치가 좋잖아. 한강도 더 잘 보이고. 

여자의 말에 약간의 짜증이 섞여 나오자 남자는 흘끗 여자의 표정을 살핀다. 그리고는 여자가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래…. 뷰는 저기가 더 낫겠다. 

두 사람은 말없이 여자가 가리킨 장소로 걸어간다. 자리를 펴고 앉은 두 사람은 양손에 가득했던 짐들을 꺼내 부려놓는다. 얇은 담요와 블루투스 스피커, 김밥과 치킨, 쿠키와 과자를 꺼내고 작은 와인 잔을 두 개 꺼낸다. 그러자 남자가 쇼핑백에서 오렌지색 액체가 가득 찬 와인 병을 꺼내 옆에 둔다. 가져온 것을 모두 꺼낸 남자는 한쪽 팔로 머리를 받친 채, 옆으로 눕는다. 여자는 남자 곁에 음식을 보기 좋게 펼쳐놓고 와인 잔에 오렌지 색 와인을 따른 뒤, 휴대폰 사진기를 켠다. 

아. 나 나오게 찍지 마.

왜?

오늘 옷 대충 입고 나와서 별로란 말이야. 

연어 색 니트 카디건에 곱게 다려진 와이드 팬츠를 입은 여자는 무릎이 나온 조거 팬츠에 맨투맨 티셔츠 차림으로 누워서 휴대폰을 하는 남자를 흘끗 쳐다보고는 작게 한숨을 내쉰다. 여자는 휴대폰 속에서 자신과 손을 잡고 선 남자의 모습을 본다. 깔끔한 슬랙스에 셔츠를 단정히 입은 채 해사하게 웃는 모습. 여자는 사진을 찍으려다 말고 휴대폰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와인 잔을 집어 든 여자는 향을 맡고는 와인을 한 모금 입에 머금는다. 

날씨 좋다. 그래도 한강 나오니까 설레고 좋네.

여자의 말에 남자가 비로소 몸을 일으킨다. 그 역시 와인 잔을 집어 든다. 여자의 잔에 제 잔을 부딪치며 짠, 하고 중얼거린다. 두 사람은 와인을 마시고 평화로운 한강변을 바라본다. 

산뜻하네. 

남자가 말한다. 상큼하고 언뜻 달콤하기도 한 향이 코끝을 맴돈다. 여자는 남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살짝 탄산이 튀는 느낌과 진하지 않은 새콤달콤한 맛이 입안을 맴돈다. 알코올 도수도 높지 않아 부담이 없는지 여자는 혼자서 홀짝홀짝 와인을 연이어 마신다. 


있잖아. 지윤이 결혼한대.

여자가 입을 연다. 

지윤이가 누구였지?

왜, 나 대학 동창 중에 제일 친한 친구. 저번에 청첩장도 같이 받았잖아. 우리 커플 잠옷도 사줬던.

아아. 그 센스 없는 친구? 

남자는 피식 웃으며 닭다리를 집어 든다. 여자는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문다. 

다음 주 토요일이 식이야. 갈 거지? 

나도 꼭 가야 돼? 축의만 내면 안 돼?

왜 그날 무슨 일 있어?

아니.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고….

남자가 치킨을 베어 무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여자는 말없이 와인을 한잔 더 따른다. 오렌지와 살구, 자몽의 새콤하고 달큰한 향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 사랑스러운 맛과 향은 길게 이어지지 않고 한순간에 사라진다. 이런 초가을의 날씨에 어울리지만, 인상적이지는 않다. 밋밋하다. 칠링을 하지 않아 온도마저 올라가버렸다. 굴곡 없고 두근거림도 없는 맹숭맹숭한 맛.  

여자는 남자를 바라본다. 더 이어질 말이 있어야 하는데 이어지지 않는다. 

같이 갔으면 좋겠어. 

의기소침해진 목소리로 여자가 웅얼거린다.

응….

응인지 음인지 애매한 남자의 대답. 여자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남자는 이제 블루투스 스피커로 음악을 켜고 있다.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어쿠스틱 기타 소리에 잠깐 입안에 단향이 도는 것 같다. 여자가 좋아하는 노래다.

해지기 시작하니까 분위기 괜찮은데? 

남자는 여자를 보며 씩 웃는다. 여자는 마주 웃음 짓지만 눈은 웃지 못한다. 지난 8년간의 연애가 갑자기 여자의 머릿속을 스쳐간다. 여자는 또 한 번 와인 잔을 들어 올린다. 남자는 팔을 등 뒤로 뻗어 땅을 짚은 채 노래를 흥얼거린다. 

아참. 엄마가. 

여자는 고개를 든다. 남자의 시선은 여전히 강을 향해 있다. 잠시 뜸을 들인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여자는 남자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요즘 잔소리가 너무 많아졌어. 갱년기인가? 자기 약 좋은 거 아는 거 없어?

여자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고 먼 한강변을 바라본다. 나올법한 이야기라 기대했던 것은 무참히 뜯겨나가고 남자의 입에서 나온 그저 그런 단어들이 여자의 귓가에서 벌떼처럼 맴돈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싸늘한 여자의 말에 남자가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잔소리 많다고 다 갱년기는 아니거든? 

하긴. 그럼 너도 갱년기겠다. 

내뱉듯이 말하며 남자는 피식 웃지만, 그의 말에 여자의 얼굴이 굳는다. 

아니. 자기가 나 엄청 많이 챙기니까. 그런 의미지. 

여자의 표정을 본 남자가 서둘러 뒷말을 덧붙인다. 여자는 말이 없다. 입을 열려다가 너무 길어질 것만 같은지 다물어버린다. 괜히 마른침을 삼킨다. 

어느새 하늘은 붉은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딱 지금 마시는 와인의 색이다. 손으로 잔을 쥐고 있어서였을까, 와인의 온도는 미지근해지고 탄산도 가라앉고 말았다. 편안함이 더욱 풀어져버린 맛이다. 여자는 남은 와인을 모두 마시고 남자가 틀어둔 음악을 듣는다. 남자가 시답잖은 농담을 던지며 화제를 돌리는 데에 발을 맞춰 준다. 

사위가 어두워졌을 무렵, 램프를 찾아 뒤적이는 남자에게 여자가 한 번 더 묻는다. 어둠 속이라 여자의 얼굴이 또렷하지는 않지만 진지한 목소리 덕에 얼굴 표정은 유추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자기야. 다음 주 토요일. 갈 거야?

어어… 가야지.

여자에게서 등을 돌린 채, 계속 가방을 뒤적이며 남자가 대수롭잖게 대꾸한다. 여자는 눈을 내리 깐다. 듣고 싶었던 말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그 안에 숨겨진 어떤 것들이 너무 또렷하게 느껴지는 탓이다. 아무도 그녀를 보고 있지 않지만, 여자는 희미하게 씁쓸한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인다. 짙어지는 어둠 속에서.   





와인 정보


Gonc Grape abduction company Orange 1000ml


공크 그레이프 어브덕션 컴퍼니 오렌지/ 피노 블랑, 옐로우 머스캣
 

요즘 핫하다는 내추럴 와인이 궁금해서 내추럴 와인 바에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그날 거기에서 먹은 와인은 너무 내 취향과 거리가 멀었고, 많이 생소한 맛이어서 그 뒤로 내추럴 와인엔 손도 대지 않았었다. 최근 한 와인샵 대표님의 권유로 내추럴 입문자 용 와인을 두세 병 마셔보았고 특유의 쿰쿰한 향이 심하지 않은 것들부터 찬찬히 적응해 가던 중, 공크 오렌지 와인을 마셔보았다. 

살구나 오렌지, 허브향이 섞여 올라오면서 부담스럽지 않았다. 내추럴 초심자뿐만 아니라 와인 초심자가 마시기에도 부담이 없달까. 늦은 봄에서 초가을까지 낮엔 따스하고 밤엔 선선해지는 날씨나 더운 날씨와도 매칭이 잘 되는 그런 와인이었다. 편안하고 마시기 쉬운. 하지만 컨벤셔널을 주로 마셔서 그런 것인지 내게는 조금 심심하게 느껴지기도 했던 와인이었다. 


구매처 : Hera’s Viney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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