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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정 Mar 03. 2021

발달과업

오르가즘

  경영난이 지속되면서 모두가 예상했던 대로 구조조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온갖 소문과 추측이 난무했으며 각자 원하는 결말에 도달하기 위한 시나리오를 써서 사람들에게 흘리기 시작했다. 갈등과 혼돈의 연속이었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남을 물어뜯고 죽이기 위한 음모를 꾸미는 것도 서슴지 않았고 여기저기서 서로에 대한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렸다. 수년의 세월을 매일같이 한솥밥 먹으며 가족같이 지내던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서로에게 잔인해질 수 있다는 것을 체험했다. 사람을 상대하는 일을 했지만 사람이 무서워졌다. 

  밤마다 불면증에 시달려야 했으며 약간의 대인기피증도 왔다. 사람을 피하기 위해 점심시간마다 외부로 나가서 혼자 밥을 먹었다. 식사 후 근방의 수목원을 걷거나 아무도 없는 뒤뜰에서 혼자 산책을 했다. 잠깐이나마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었다. 퇴근 후에는 목공을 배우러 갔다. 쇠톱과 절단기가 돌아가는 소리에 둘러싸여 온갖 위험한 공구를 다루다 보면 괴로운 현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목공을 배우면서 처음으로 안과에 가게 되었다. 눈이 가렵고 따가워서 미세한 나무 톱밥이 눈에 들어간 줄 알았다. 의사는 아무리 봐도 눈에 이물질이 들어간 것 같지는 않아 보이고 단순 결막염으로 면역력이 떨어진 것 같다고 했다. 결막염이 쉽게 낫지 않아 수개월 동안 지속적으로 안과를 다녀야만 했다. 결막염이 괜찮다 싶어 지니 외음부가 따갑고 분비물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다 말겠거니 생각했으나 정도가 점점 심해졌고 가렵기까지 했다. 인터넷에 증상을 검색해보니 질염인 것 같았다. 네이버 지식인의 조언을 참고하여 약국에 가서 세정제를 샀다. 사용 후에도 크게 차도는 없었다. 며칠이 지나도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아 병원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산부인과 방문은 안과 진료보다 큰 결심을 해야만 했고 질염 진료에 대한 인터넷 후기를 찾아봤다. 여러 가지 치료 방법이 있는 듯했으나 내과처럼 약을 처방받아먹는 방향으로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이전에 알아봤던 여의사가 있는 1차 병원으로 갔다. 병원은 피부과 레이저 시술을 받고자 찾아온 수많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진료를 보기까지 한참을 대기해야 했다. 진료실에 들어가니 여의사는 증상을 물었다. 외음부에 세정제를 사용해도 가렵고 따끔거리는 정도에 차도가 없어 약을 처방받고자 왔다고 말했다. 의사는 외음부 상태를 보자고 하면서 탈의실에 가서 옷을 갈아입은 후 진료 의자에 앉으라고 말했다. 나는 성 경험이 없기 때문에 성생활과 관련된 감염성 염증으로 병원에 온 것이 아니며 소독 등의 외음부 진료는 원하지 않고 내복약과 연고만 처방받기를 원하기에 굳이 진료 의자에 앉을 필요가 없다고 의사에게 설명했다. 의사는 자신이 직접 눈으로 상태를 보지 않고는 처방을 내려줄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몇 번의 실랑이 끝에 옷을 갈아입고 진료를 보기로 결정했다. 근거리의 여의사가 있는 산부인과는 이곳밖에 없었으며 직장인이 퇴근 후 멀리 있는 타 지역까지 내원하기에는 시공간상으로 불가능했기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의사는 찬찬히 살펴보더니 간호사에게 진짜라며 큰소리로 다 들리게 대화를 나눴고 “이게 어떻게 가능하냐.”며 굉장히 황당해했다. 성 경험이 없기 때문에 다른 처치는 할 수 있는 것이 없고 소독만 해야 한다며 신경질적으로 소독약이 묻은 솜으로 외음부를 세게 문질러서 깜짝 놀랐다. 

  진료 의자에서 내려와 옷을 갈아입고 다시 의사를 마주했다. 여의사는 대학생도 아닌 직장인이 그 나이까지 성 경험이 없는 것은 정상이 아니라며 큰소리로 막말을 했다. 나도 인지하고 있기는 했으나 이렇게까지 크게 소리치며 사람을 무안 줄 정도로 내가 잘못 살았나 싶었다. 그러나 의사의 표정이 사뭇 심각했고 나를 노려보면서 쏘아붙이는 말투로 한참을 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서 몹시 당황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서서 계속 듣고만 있었는데 말이 너무 빠르고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 전개라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사람의 신체 발달과업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사람은 탄생과 동시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성장과 성숙을 거치면서 그에 걸맞는 신체적인 발달 과제를 수행하게 되는데 나는 일반적인 속도에 발맞춰 따라가지 못하고 있기에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벙쪄서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알아듣지 못하는 게 느껴졌는지 쉽게 풀어 설명해주기도 했다. 

  “환자분은 지금 비정상이십니다.” 

  그녀의 비아냥거림이 느껴졌다. 기분이 매우 나빴으나 나도 나름의 자기변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릴 때 부인과 수술력이 있어서 성과 관련된 부분은 항상 조심하고 있었다고 말하자 여의사는 더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 질환은 성 경험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데 어느 병원에서 어떤 의사에게 수술을 했기에 조심을 해야 한다고 알고 있는 것이냐며 나에게 잘못 알고 있다고 따지듯이 일러주었다. 그녀가 많이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 수술했던 의사의 소견이 아니라 내가 어릴 적 수술을 받으면서 경험한 고통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하에 결혼 전까지 발생할지도 모르는 각종 질병에 대해 스스로 조심하고 있는 것이라 해명했다. 여의사는 조금 진정한 듯하더니 수술할 당시 많이 힘들었냐고 물었다. 초경 전이고 워낙 어릴 때라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들었다고 말했다. 의사는 나에게 정신과 진료를 받아보기를 권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급작스러운 진료 전개에 매우 당황스러웠지만 여의사의 말투가 히스테릭해서 빨리 약을 처방받아 진료실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진료를 끝내기 위해서는 모두가 납득할만한 결론을 도출해야 했고 집에 가겠다는 일념 하에 차분하게 나의 생각을 정리해서 의사에게 전달해야만 했다. 

  “정신적인 문제가 있을 수도 있으나 제 개인의 생각으로는 그보다 신체적인 문제가 더 큰 것 같아요. 부인과 수술 이외에 다른 수술도 받을 정도로 잔병치레가 많았고 기본적인 체력이 좋지 않습니다. 아까 발달단계를 말씀하시던데 기초 체력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는 성장도 느릴 수밖에 없어요. 발달은 생존, 생장, 생식의 순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성장도 미숙한 상태에서 생식까지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신체 건강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성욕도 없는 겁니다.”

  산부인과에서 인체의 발달단계에 대해 이렇게 장황하게 썰을 풀 날이 올 것이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으나 내가 아는 생물학적인 지식을 총동원해서 그녀를 이해시켜야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앞서 이야기한 발달과업을 인용해서 설명하자 이해가 되었는지 한층 누그러져 보였고 드디어 무사히 집에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그녀는 나에게 본인의 성장이 미숙한지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다. 

  “형제들 중에서 제 키가 제일 작아요.” 

  한 부모에게 같은 유전자를 물려받아 삼시세끼 같은 음식으로 영양분을 섭취했는데 신체적인 발육에 크게 차이가 있는 것은 체력으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여의사는 납득이 된 것 같았으나 뜬금없이 나에게 초음파 검사를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했다. 내 뱃속 장기들의 상황이 궁금했던 것 같은데 초음파 검사는 얼마 전 대학병원에서 받았고 크게 이상소견이 없었다는 불필요한 개인정보까지 유출했다. 여의사는 갑자기 뭔가 깨달은 표정으로 한마디 했다.

  “이건 체력적인 문제도 있겠지만 오르가즘을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거야.”

  열세 살에 산부인과 진료실에서 처음 들은 오르가즘이라는 단어를 성인이 되어 찾은 산부인과 진료실에서 또다시 듣게 되니 반복되는 데자뷰를 경험하는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산부인과에 약 좀 처방받으러 왔다가 예상치 못한 전개에 급작스럽게 말을 많이 하고 나니 피곤이 몰려왔다. 진료실 밖으로 나오니 여전히 피부과 레이저 시술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의 대기 줄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진료실 안에서 일어난 상황들은 전혀 예측하지 못한 전개였으나 결론은 내가 예상한 대로 이루어졌다. 여의사는 내복약과 연고를 처방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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