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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정 Jan 06. 2022

도보 출·퇴근

마음의 여유

  버스로 출·퇴근을 해보니 여러 가지 단점이 보였다. 첫째는 소요 시간이 일정하지 않았다. 버스 배차 간격이 정확하지 않아 버스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이 들쑥날쑥했고 그날의 교통 상황도 변수로 작용했다. 또한 버스를 갈아타야 하는 상황에서 환승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은 2배가 될 수도 있다. 둘째는 출·퇴근 시간의 버스는 인구 밀집도가 상상 이상으로 높다. 테크노파크에 종사하는 근로자는 그 수를 전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무수히 많기 때문에 마스크를 쓰고 버스에 탑승하더라도 안전거리가 확보되지 않아 코로나19 방역에 취약한 공간이었다. 

  4월에 들어서면서 완연한 봄기운이 느껴졌다. 나무는 푸른 잎사귀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길가에 이름 모를 꽃들과 풀이 눈에 띄게 자라나기 시작했다. 걷는 속도와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는 시간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것 같다는 의심이 점점 피어오르기 시작할 즈음 대로변을 따라 걸어보기로 했다. 테크노파크 1단지에서부터 송내대로를 따라 직선으로 걷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경로가 어렵지 않아 시도해볼 만했다. 쌀쌀한 날씨였음에도 10분 뒤 등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드라이클리닝으로 세탁해야 하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기에 걸어가기로 결정한 것에 대해 살짝 후회했지만 생각보다 걸어서 퇴근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어 나쁜 시도는 아니었다고 위안했다. 

  시작이 어려웠을 뿐 집까지 걸어서 퇴근하는 것이 일종의 운동처럼 느껴졌다. 하루 종일 앉아서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사무직에 종사하다 보니 허리가 좋지 않았는데 걷기는 척추 관절에 좋은 운동인 것 같았다. 한 시간이라는 긴 시간을 걷다 보니 그 시간 동안 하루에 있었던 일들을 정리해보기도 하고 명상도 할 수 있었다.

  대로변을 따라 걸어가니 걷는 시간보다 신호 대기 시간이 더 걸리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자전거나 전동 킥보드를 타고 나를 지나쳐갔던 사람들도 몇 분 뒤 신호등에서 모두 만날 수 있었다. 도서관에서 굳이 큰길로 나오지 않고 시내의 보도블록을 따라 걸어보기로 했다. 시내를 따라 걸어보니 백화점, 관공서, 아파트, 노점상, 교차로, 대학병원, 중앙공원 속 사람들의 일상을 마주할 수 있었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할 때는 보이지 않던 풍경들을 느린 속도로 걸으니 만날 수 있었고 차비도 아낄 수 있었다. 

  걸어서 퇴근을 몇 번 해보니 걸어서 출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생겼다. 바쁜 아침 한 시간 걷기는 마음의 여유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아침에 걸으면서 매일 마주치는 익숙한 택배 화물차량, 병원 셔틀버스, 테니스 치는 사람들, 출근하는 사람들의 루틴을 통해 현재 시각을 예상할 수 있었고 버스 정류장 실시간 화면에 제시되는 시간과 병원과 백화점 같은 공공건축물 벽면에 부착된 시계를 보며 걸음의 속도를 조절할 수 있었다.

  3개월 정도 걸어보니 내가 얼마나 마음의 여유가 없는 사람인지를 알게 되었다. 신호등에서 대기하지 않기 위해 보행 신호를 맞추기에 급급했고 오로지 목적지 도달만 생각하며 지금 걷고 있는 길에서 반경 10m 밖도 내다볼 줄 몰랐다. 출근 시간보다 30~40분 정도 일찍 도착할 수 있도록 출발해서 급할 것이 하나도 없었는데도 서둘러 걸었다. 아주 사소한 것에서도 내 성격이 묻어나고 있었다. 나를 위해 시간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나를 알아가게 되었다.

  5월이 되자 벚꽃이 하나둘 피어나기 시작했다. 출근길에 사람들이 하나둘 멈춰서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벚꽃이 만연한 것이 아니라 이제 막 피기 시작한 상태라 사진으로 담기에는 민망할 정도인데도 꽃은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고 발걸음을 멈춰 세우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야외 공원에서 테니스를 치는 중장년층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중앙공원에서 조깅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다. 걷다 보면 어느 사이에 나와 같은 경로에 합류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부 경로가 겹치는 것 같은데 관공서나 테크노파크 단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가끔 직장 동료 같은 느낌도 받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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