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로움의 함정
얼마 전 어느 차분하고 고요한 카페를 다녀왔습니다. 초여름에 어울리는 말차 케이크를 함께 주문했더니 동그란 그릇이 하나 놓였습니다. 그 위에는 단 두 가지가 정갈하게 놓여 있었습니다. 숲을 네모난 모양으로 정직하게 썰어 온 듯한 녹색의 테린느와 구름을 떼온 듯 둥그렇게 얹은 하얀 생크림. 그 주변으로 일정한 여백을 두고서 단정하게 놓인 그 모습에서는 편안한 단조로움과 약간의 긴장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원래 그릇에 디저트가 담겨 놓이면 케이크에만 눈길이 쏠리는 법입니다. 그러나 그릇을 너무 꽉 채워 담지 않은 이 플레이팅에서는 그릇이라는 여백이 함께 보였습니다. 숲이 떠오르는 테린느와 하얀 크림, 흰 그릇이 서로 공존하며 하나의 풍경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 플레이팅을 잠시 천천히 바라보며 문득 파인다이닝의 음식이 떠올랐습니다. 파인다이닝 음식을 본 적이 있나요? 접시가 우주선처럼 커다란 것에 비해 막상 음식은 중앙에 조그맣게 놓여 있거나 띄엄띄엄 장식적으로 플레이팅되곤 합니다. 그 주변의 넓은 여백에는 소스가 절제되어 뿌려져 있거나 혹은 그릇의 디자인을 살리기 위해 오롯이 비워두기도 합니다.
그릇에 음식을 담을 때 여백을 둔다. 그런 개념이 처음 다가왔던 순간이었습니다. 셰프에게 있어서는 그릇의 여백까지 디자인의 일부인 것입니다. 음식이 아니라 음식이 놓일 풍경을 함께 바라보며 설계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니 건축 수업에서 배웠던 것이 떠오릅니다. 건축에는 ‘솔리드(solid)’와 ‘보이드(void)'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솔리드란 다른 말로 매스(mass) 즉,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덩어리된 물체(벽, 기둥 등)를 말하고, 보이드란 다른 말로 볼륨(volume) 솔리드가 있음으로써 생겨난 주변의 여백 즉, 사람과 바람과 소리 등이 통할 수 있는 공간을 뜻합니다. 우리는 솔리드를 만들면 보이드는 절로 생겨나는 법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실은 보이드를 먼저 설계해야 적절한 곳에 솔리드를 놓을 수 있습니다.
다시 음식 이야기로 돌아와, 우리는 보통 음식을 담을만한 딱 맞는 크기의 그릇을 준비합니다. 쟁반만 한 그릇 위에는 갖은 음식을 다 채워 담습니다. 서양의 화려한 브런치나 모닝 플레이트를 떠올려 보면 하나의 원형 접시에 빵과 버터, 샐러드, 콘, 소시지, 과일이 알차게 담겨 있곤 합니다.
준비된 공간을 꽉 채운다는 것. 그것은 얼핏 풍요로워 보입니다. 음식을 한가득 담은 그릇이나 바구니, 물건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 진열장 같은 것 말입니다. 또는 공간의 크기에 물건을 딱 맞춰도 횡재한 것 같이 기쁩니다. (딱 들어가네!) 하지만 과연 풍요로운 감정이란 가득 채워진 상태에서 느끼는 것일까요?
풍요로움은 꽉 채워진 상태가 아니라 여백까지 풍경으로 품을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사물과 여백. 솔리드와 보이드 이 두 존재가 서로의 풍경이 되어주며 조화를 이루어 공명하고 있는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안정감과 여유로움을 느낍니다. 무엇이든 생겨나거나 더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는 포용성, 그러한 ’열린 만족‘에서 우리는 편안한 쉼과 유연한 질서를 느낍니다.
이는 비단 그릇 위의 음식만이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통하는 말입니다. 꽉 채우는 수납이 아니라 빈 공간을 적절히 남겨두는 수납, 바쁜 일정이 있으면 그 후로 얼마간은 평온한 나날도 함께 적어둔 스케줄표, 몰아치는 만남들 사이의 혼자만의 데이트. 모든 풍경은 늘 솔리드와 보이드가 공존하는 모습입니다. 무릇 유심히 챙겨야 하는 것, 소중히 여기고 싶은 것,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만을 주인공으로 앞세우기 쉽지만 그것의 존재감을 오롯이 감상하거나 누리기 위해서는 그것을 품는 넓은 ’빈자리(間)‘가 필요합니다. 공간이든 시간이든 말입니다.
풍요로움은 필요한 것을 두고도 남는 여유에서 옵니다. 그러니 오히려 ‘보이드’를 디자인해 봅시다. 내가 품을 수 있는 풍경을 어떤 것들로 가능한 만큼 꽉 채운 상태가 아니라 빈 공간을 함께 염두에 둡시다. 오롯이 느끼고 싶은 여유로움과 집중의 분위기를 먼저 상상하고 그 안에 두고 싶은 것을 적절히 배치합니다. 숲에는 나무만 있지 않습니다. 바람도 불고 새소리도 들리고 햇살도 드리워집니다. 그것들은 만져지지 않지만 숲 안에 분명히 존재합니다. 삶도 그렇습니다. 나무가 아닌 숲을 바라본다는 것은, 풍경을 바라보는 연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