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우울감이 찾아와도 매번 새롭게 당황하는 우리를 위해
일상을 더 나답게! 더 즐겁게!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위해 다양한 리추얼을 제안합니다.
리추얼 앤솔로지 #3
<클라우드 루틴>
흐린 날씨 탓에 이유 없이 우울감이 찾아드는 날이면, '뭐야, 왜 지금 축 처지지. 어떻게 해야 기분이 풀리지?'하며 허둥지둥댄다.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닌데 매번 흐린 날씨 앞에서 난 초짜가 된다. 이쯤 되면 '또 이러네. 이럴 땐 이렇게 하면 돼'하며 익숙하게 대처할 법도 한데, 구름이 낄 때마다 어김없이 마음에도 구름이 낀다.
나는 주로 날씨가 흐린 날에 쉽게 우울해진다. 날씨를 많이 타는 사람이라 흐린 날엔 불가항력으로 기분이 축 가라앉는다. 뭘 해도 텐션이 업 되지 않고, 쉽게 즐거워지지 않고, 마음에 구름이 낀 듯 유쾌하지 못한 고민만 하게 된다. 스스로 무엇을 하면 즐겁고 행복한지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흐린 날을 마주하면 당장에 어떻게 기분을 풀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한참을 허둥지둥댄다.
그러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 하루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적어 두는 To do list나 어떤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지 정리해 둔 스케줄러처럼, 우울한 날에 찾을 수 있는 나만을 위한 기분 해소 방법을 미리 정리해 둔리스트가 있다면 매번 당황해 하지 않고도 내 감정을 잘 다룰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흐린 날은 이렇게 시간을 보내자' 하는, 나만의 '흐린 날 루틴'을 만들었다. 언제 또 우울감이 불쑥 찾아 와도, 당황하지 않고 익숙하게 내 마음 속 서랍에서 '흐린 날 루틴 리스트'를 꺼내어 이행할 수 있도록. 이른바 '클라우드 루틴'을 소개한다.
My Cloud Routine
1. 날씨에 어울리는 음악을 튼다.
음악은 때로 선박의 방향키 같다. 어떤 음악을 듣냐에 따라 펼쳐지는 장면이 좌지우지된다. 그림자 졌던 어두컴컴한 방도 재즈를 틀면 따라 비 오는 날 이국의 카페가 될 수도 있고, 클래식을 틀면 영화 속 분위기 좋은 작은 도서관이 될 수도 있다.
또는 우울한 기분을 방해하지 않는 잔잔하고 느린 노래도 좋다. 우울한 기분을 방해하지 말라니, 우울한 기분은 어떻게든 내쫓아야지! 라고 한다면 우울감과 평생 친구가 될 수 없다. 우울은 언제든 당연하게 찾아올 수 있는 나의 감정의 일부이니 소중히 들여다 보고 쓰다듬을수록 가치를 발한다. 축 처진 기분을 억지로 끌어올리려 애쓰는 대신, 제대로 가라앉을 수 있도록 서포트해 줄 수 있는 노래를 한 번 들어보자. 마음 속 앙금처럼 끼어있던 불편한 우울이 시냇물처럼 졸졸 흘러가 자연스레 또 고요하게 저 멀리 가버릴 수도 있다.
흐린 날을 어떻게 할 수 없다면, 흐린 날만의 감성을 온전히 즐겨보자. 해가 쨍쨍한 청량한 날에 신나고 경쾌한 음악을 듣듯, 흐린 날엔 흐린 음악을 들을 뿐이다.
2. 적당히 생산적인, 그러나 부담 없는 취미를 즐긴다.
온전히 힐링을 주면서도 생산적인 활동, 나에게는 독서가 그렇다. 가장 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면서도 하릴없이 유튜브 영상을 볼 때와 같은 죄책감은 느끼지 않아도 되는 효자 취미다. 하루를 생산적이고 보람차게 보냈다는 뿌듯함이 곧 행복인 나 같은 사람은, 우울하답시고 다 던져버리고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되려 하루를 나태하게 보냈다는 사실에 더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러므로 적당히 생산적이되 취미인 독서를 한다.
3. 조명과 캔들, 향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향과 빛은 무드를 조성하는데 드라마틱한 효과를 준다. 내겐 밝기와 색을 조절할 수 있는 스탠드와 캔들워머가 있다. 스탠드를 최대한의 밝기와 가장 따뜻한 빛으로 설정하고, 캔들 워머까지 켜면 딱 좋은 따뜻하고 아늑한 무드가 흐른다. 양초가 녹으면서 은은하게 풍기는 향은 마음을 부드럽게 달랜다.
한편, 좀 더 중후하고 경건한 분위기를 느끼고 싶을 땐 인센스 향을 피운다. 향은 그 자체로 '침전'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듯해, 지금 축 가라앉아 있는 내 마음이 비정상적이고 부정적인 상태가 아닌 그 상태로도 충분히 괜찮고 숙성시켜도 될 마음이라며 위로 받는 느낌이 든다. 가라앉은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왕 조금 누려봐야겠다 싶을 땐, 향을 추천한다.
4.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
그 어느 것보다 맛있는 음식은 즉각적으로 기분을 좋게 만든다. 귀찮답시고 대충 끼니를 해결하지 말고, 이럴 때일수록 정말 맛있는 식사가 필요하다. 식탁 앞에 앉기 전까진 반신반의할지 모르나, 한 입 먹는 순간 본능적인 행복감을 얻을 수 있을 테니.
요리에 어느 정도 흥미가 있다면 직접 요리 해 먹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천천히 식재료를 손질하고 조리하는 과정에서 잡생각은 조금씩 덜어내고, 일상적인 행위에서 오는 충만함을 팬 위에서 함께 익혀나갈 수 있을 것이다.
5. 따뜻한 우유를 마신다.
난 흰 우유를 무척 좋아한다. 주로 차갑게 마시지만 우울한 날이면 꼭 데워 마시고 싶어진다. 전자렌지에 1분 혹은 30초 더 데운 우유를 한 모금 마시는 순간 따뜻하고 부드러운 기운이 온몸에 퍼져 몸이 축 녹아내리는 기분이다. 그렇듯 기분이 멜랑꼴리 할 때면 우유를 찾게 된다. 얼마 전 정말 노곤했던 날에 포도주스를 마실까 우유를 데워 마실까 고민하다 결국 후자를 택했는데 한 모금 마시는 순간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다. 자칭 얼죽아라고는 하지만 축 처진 몸과 마음엔 무엇보다 따뜻한 게 최고인가 보다.
6. 스트레스 받지 않고 할 수 있는 생산적인 공부
2번과 맥이 통하는 이야기지만, 난 기분이 가라앉으면 생산적인 공부에 눈을 돌리는 타입이다. 디자인을 전공하며 평소 창작의 고통을 느껴야 하는 일들에 휩싸여있다 보니, 공부하는 것에 묘한 힐링과 재미를 느낀다. 그중에서도 특히 외국어에 관심이 많아 요즘은 영어와 중국어를 공부하고 있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것 보다는 머리를 굴려야 하나, 우울한 와중에 적당히 머리를 굴리며 공부에 몰두하는 것도 꽤 괜찮다. 오늘 하루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죄책감에 더 침울해하지 않을 수 있다.
7. 좋아하는 영화를 감상한다.
우울한 날엔 항상 좋아하는 영화를 본다. 평소 보고 싶지만 아직 보지 못했던 영화도 좋고, 이미 봤지만 두고두고 내게 위로와 응원이 되는 영화를 다시 꺼내 보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마음이 싱숭생숭한 날 다시 찾게 되는 영화는 가장 좋아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그중에서도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라든가, 내게 있어 인생 지침서와도 같은 <일일시호일> 등 차분한 일본 감성을 즐길 수 있는 영화다. 혹은 시청각적으로 매번 나를 매료시키는 <Call Me By Your Name>도 좋아한다. 영화는 이왕이면 나를 위로하거나 다시 북돋아주는 메시지가 담긴 것을 선호한다. 우울한 날 우울한 음악을 듣는 것은 괜찮지만, 왠지 우울한 날 우울한 영화를 보는 것은 기운이 나지 않는다.
클라우드 루틴에 앞서 중요한 것은 마음이 가라앉았다는 걸 알았을 때 그 마음을 어떻게든 떨쳐내거나 업시키려고 안간힘을 쓰기 보다, 일단 '아, 지금 내가 기분이 꿍하구나'라는 걸 차분히 받아들이고 그 지점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마음이 가라앉은 상태를 부정적으로 치부하지 말고, 그냥 '이런 날도 있지. 그럼 오늘은 어떻게 보내면 좋을까?' 마음 먹는 것에서부터 진정한 클라우드 루틴은 시작된다.
우울한 감정은 어느 때나 갑자기 찾아올 수 있다. 깜짝 손님의 방문에 가차없이 내쫓으려 하기 보다, '안녕?' 하고 인사를 건넨 뒤 어떻게 대접할지, 뭐 하고 함께 놀지 고민한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내게 찾아 온 우울 손님의 손을 잡아 보자. 내게 찾아 온 감정 중에 의미 없는 감정은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