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을 손질하는 마음을 기릅니다

처음으로 보풀을 제거해 보았습니다

by 위시

1년 전에 산 가디건이 있습니다. 한 벌에 3-4만 원만 되어도 벌벌 떨며 사는 제가 무려 10만 원 가까이 주고 사들여 그야말로 부둥부둥 애정하며 입어 왔지요. 넉넉한 품에 다소 두께가 있어 외투로도 걸치기 좋고 코트 안에 입어도 좋아 무척이나 유용한 '휘뚜루마뚜루' 템으로 입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불과 1년 사이에 보풀 투성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동안은 니트 따위에 보풀이 일어도 무시한 채 계속 입거나 쉽게 버리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 옷은 처음 살 때부터 오래오래 관리해 가며 입으려던 생각이었기에, 처음으로 보풀제거기를 사 볼까 하고 인터넷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비싸게 느껴져 여태껏 미뤄 온 탓에 아무 조치도 취하지 못한 채 어느덧 두 번째 겨울이 찾아왔습니다. 이제는 어디 걸치고 나가기 부끄러울 정도로 복슬복슬해져, 슬슬 주변에서도 한 두 명씩 보풀에 대한 지적을 건네기 시작했지요.


그러다 설을 맞아 본가에 내려왔는데 마침 보풀제거기가 있다는 엄마의 말에, 기회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오늘 할머니 댁에서 돌아온 저녁, 안방에서 엄마 옆에 앉아 가디건을 바닥에 조심스레 깔았습니다. 처음 쥐어 보는 보풀제거기에 긴장도 되고 설레는 마음도 들었어요. 하지만 엄마가 건네준 보풀제거기는 두 번도 채 쓸어 보지 못하고 방전되고 말았습니다. 김이 새려고 하던 순간, 면도기로도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아빠에게서 안 쓰는 면도기를 받아, 다시 준비태세를 갖췄습니다.


그렇게 호기롭게 스타트를 끊었지만, 한쪽 팔 부분만 다듬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리는 거 있죠. 점차 지쳐 "내가 잘 하고 있는 게 맞는 거야? 원래 이렇게 수고가 많이 드는 일인지..." 의심을 품고 물었더니, 엄마가 새삼스럽다는 듯 그럼, 당연하지, 이럽니다. 그 말에 금세 수긍하는 마음이 들어 일단 묵묵히 계속하기로 했습니다. 그래, 1년 동안 그렇게나 입었는데 10초 만에 끝을 보려는 건 무슨 심보야. 드라마틱하진 않지만 손길을 반복할수록 점차 깔끔해지는(당시의 말로 '추접스럽지는 않을 정도'로) 모습을 보니, 점점 의욕이 불타올랐습니다. 대충 서둘러 끝내보려던 마음가짐도 어느새 점차 정성스럽게 존중을 표하며 하자는 마음으로 바뀌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두했어요. 마치 양치기가 된 듯한 기분도 들었습니다. 그동안 보풀이 생겨 버렸다는 이유로 쉽게 버려 온 지난날의 옷들이 떠오르면서 미안하고 서운한 마음도 들기 시작했습니다.


"비싼 걸 사면 이런 점이 좋은 것 같아. 만약 2만 원 정도 되는 가디건을 샀다면 그냥 버리고 새로 샀을 텐데, 어쨌든 비싸게 주고 샀다는 생각에 이렇게 손질을 해서라도 오래오래 입게 되니까." 이런 소감도 엄마에게 들리게 말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간과 수고를 들여가며 옷을 손질하는 과정에서 옷에 대한 감사함과 애틋한 마음도 생겨, 더욱 아끼며 오래 입어야지 하는 마음이 자연스레 들더군요. '좋아, 나랑 앞으로도 계속 함께 가자'하는 마음으로요. 그렇게 우여곡절을 거쳐 보풀이 정리된 가디건과 실밥 한 뭉텅이를 바라보니, 뿌듯함과 함께 다시금 새로워진 이 가디건을 잘 입고 다닐 앞으로의 일상이 기대가 되었습니다. 살림에 문외한인 내가 손수 옷의 보풀을 제거하는 날이 오더니! 감명 깊어 인증샷도 남겼답니다.


사실 오늘은 제 생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전 문득 발견한 생일의 징크스가 하나 있는데요. 바로 생일날 입었던 옷은 돌이켜 보니 다 몇 년 안 되어 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구태여 생일날 챙겨 입었을 만큼 아끼는 옷이었는데도 말이에요. 하지만 오늘은 공교롭게도 아끼던 옷에 다시 새 생명을 불어넣어 준 소중한 의식을 치렀습니다. 너무 앞서간 의미부여일지도 모르겠지만, 오늘 이 옷을 정성껏 손질한 것 덕분에 이 징크스를 깰 수 있을 것 같은 좋은 예감이 듭니다.


꼭 보풀이 아니더라도 옷을 입다 보면 다양한 문제들과 마주칩니다. 그런 옷들을 우리는 어쩔 수 없다는 마음과 이 기회에 새로 사고 싶다는 마음으로 종종 쉽게 떠나보내곤 하지요. 물론 모든 옷을 일일이 과하게 수고를 들여 가며 수명을 연장할 필요는 없지만, 정말로 오래오래 잘 입고 싶은 옷이라면 이따금 이렇게 손수 정성껏 손질을 하며 옷과 더욱 가까워지는 시간을 가져 보면 어떨까요? 이왕이면 '그냥 하나 새로 사지 뭐!'하는 마음이 들게 하는 저렴한 옷 10벌 보다, 아까워서든 마음에 들어서든 인생을 오래 함께 가고 싶은 질 좋은 옷 1벌을 신중히 구매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도 가치 있을 것입니다.


해브해드에서 구매한 네이비색 가디건에게, 새로 태어난 것 축하해!

내년 생일 때도 잘 부탁할게.




<오늘의 기본> 2023 연재를 시작합니다

기본은 늘 중요합니다. 나다운 중심을 지키는 오늘의 질서가 되어 줍니다.

일상 속에서 문득 느꼈던 소소한 깨달음과 교훈, 생활의 규칙과 태도 등 삶을 더욱 슬기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라이프마인드(Lifemind)'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일본의 작가 마쓰우라 야타로 씨가 일상에서 느꼈던 생활의 힌트들을 틈틈이 기록한 <생활의 수첩>에서 영감을 받아 연재하는 시리즈입니다. 우리 함께 나다운 기본을 찾아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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