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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영 Feb 20. 2022

식물 킬러가 꾸준히 식물을 기르는 이유

게으름뱅이의 식물 외사랑

난 자칭(?) 식물 킬러다. 내 손에만 닿으면 남들 다 키우기 쉽다던 다육이 화분 마저 죽고, 검색창에 '키우기 쉬운 식물'을 쳐서 나오는 식물 종류 대다수를 죽인 악명 높은 전적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꾸준히 식물을 키운다. 왜냐고? 아이러니하게도 식물을 잘 키우고 싶은 마음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 초록 빛깔의 산뜻한 이파리들을 보고 있는 걸 좋아했고, 식물들이 주는 싱그럽고 파릇파릇한 분위기를 너무나 사랑했다.


그 마음의 시작이 언제부터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확실한 건 내게 식물 사랑의 불을 지핀 하나의 원인은 알고 있다. 바로 2013년도에 개봉한 영화 '마담 푸르스트의 비밀정원'이다. 영화 내용은 잘 기억나진 않지만 두 가지는 분명히 내 머릿속에 또렷이 박혀있었다. 바로 마담 푸르스트가 만든 노란 빛깔 마들렌과 각종 허브, 채소, 꽃들이 자라나는 그녀의 집안 풍경. 천장에서도 주렁주렁 달려 있는 덩굴 식물들과, 바닥에서 자라나는 무성한 채소들. 따사로운 햇볕들을 골고루 쐬여주기 위해 조명이 있는 자리에는 각종 손거울들을 달아나 빛이 반사되도록 설치해 두었다.


마담푸르스트가 잡힌 컷 안에는 초록빛이 없는 순간이 거의 없다. 특히 난, 선반마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덩굴 식물들이 가장 좋았다.

그리고 그녀는 집안에서 자신이 키운 식물들로 손수 요리도 하고, 주인공 폴에게 기억을 되살리게 하는 차도 직접 허브를 따 만들어 준다. 이렇게 마담 푸르스트가 열심히 가꾼 식물들로 하나하나 특별한 것들을 만들어 내는 일들이 내게는 신비하고 아름답게만 느껴졌다. 원래부터도 식물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나였지만, 이 영화를 보고서부터 식물 사랑에 대한 마음이 더욱 확고해졌다. 그렇다면 혹자는 '식물을 이렇게 사랑하면서 왜 자주 죽이냐.'라는 말을 할 수도 있다.


민망스럽게도 내가 답해줄 말은 딱 하나였다.


"그러게나 말이다."


하필 나란 인간은 감정과 소유욕에는 열정적이면서, 행동력에 있어서는 꽝인 게으름뱅이였다. 원하는 화분을 데려온 첫 하루에는 '절대 이번에는 죽이지 말아야지.' 다짐을 하면서도, 일상에 치여 권태로움이 찾아오면서 머리로는 물을 줘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몸이 도통 따라주지 않았다. 또한 식물 저마다 특징들을 무시하고 이때만큼은 공평한 평화주의자로 각자의 상태를 확인하지도 않은 채, 한날한시에 똑같은 양의 물과 햇볕을 주니 제대로 자랄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난 식물을 사랑했지만, 그 사랑에 있어 꾸준히 노력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언제나 외사랑만 하나보다.


그나마 다행인지 불행인지 마음만은 언제나 지고지순했기 때문에 난 게으름뱅이들도 식물을 오래 키울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었다. 그때, 회사 동료였던 사슴님께서 수경재배를 추천해 주셨다. 수경재배란, 토지에서 재배하는 방법이 아닌 물만 넣어 키울 수 있는 방식으로 나같이 키우는 족족 식물을 죽이는 사람들에게는 최적의 방법이었다. 분갈이, 물 주기, 햇볕 쐬기 등을 따로 해주지 않아도 잘 자라난다는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실행해 보았다. 아이비와 스킨답서스를 화분 가게에서 사 와 흙을 모두 걷어내고 물이 가득 든 화병에 뿌리만 잠기게 하여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다 시들어가는 벤자민 화분이 조금 뻘쭘하다. 그래도 화병에 넣은 아이비와 스킨답서스는 잘 자라주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결과는, 대성공. 5개월이 지난, 오늘까지 잘 자라고 있는 것을 보면 나에게 딱 맞는 방법이 맞는 듯하다. 그렇게 수경재배로 식물 키우기에 대한 자신감이 조금 차올랐을 때, 화분에서 키우는 감성 또한 도저히 포기를 할 수 없는 나였다. 잘 구워진 토분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초록빛 잎사귀들이 주는 싱그러운 느낌들은 투명한 물속에 잠겨있는 수경재배와 또 다른 느낌이었다.  게으름뱅이인 주제에 식물들을 사랑했고, 외사랑을 하는 주제에 욕심이 많은 인간이었다. 그래서 지난 금요일, 용인에 있는 화훼단지를 찾아가 텅텅 비어있는 화분에 새로 채워 넣을 수 있는 아이들을 몇 개 입양해 왔다.


왼쪽부터 올리브와 수박페페, 아스파라거스, 알로카시아 오도라. 화분은 집에서 가져왔고, 식물과 분갈이 값만 내면 싸게 구입할 수 있었다.

올리브는 한번 죽였던 전적이 있지만, 이번만은 다를 거라는 헛된 희망을 버릴 수 없었다. 여기서 '이번만은 다를 거라는' 헛된 희망의 중독이 내가 식물을 자꾸 죽임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기르는 이유다. 사람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걸 알지만 그때의 다짐만은 영원할 것처럼 또 과거의 일을 반복하고, 실패하고, 후회한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내가 식물들에 대해 알아가고, 고쳐야 할 점들 또한 꾸준히 느끼고 있으며 점점 내가 키우는 식물들의 수명이 연장되고 있었다.


그래, '발전'이라는 게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또 실패하더라도 앞으로 더 나에게 맞는 방법을 찾고 잘 키울 수 있도록 도전해봐도 나쁘지 않지 않을까. 식물킬러에서 식물닥터가 되는 그날까지. 사랑에 대한 마음을 놓는 것보다는 잘 지낼 수 있도록 꾸준함을 갖는 게 나에게는 더 맞는 방법인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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