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여도, 좀 못나도 괜찮아

소외감과 열등감에 대하여

by 낮별


"프로이트는 1873년 비엔나대학교의 의과대학에 입학하였다. 그 후 유태인으로서의 소외감과 열등감을 뼈저리게 느끼는 경험을 하였으며 이러한 경험은 독립적인 판단력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읽고 있는 '현대 심리치료와 상담이론'에서 눈에 들어온 한 구절이다. 이해하고 암기해야 하는 주요 이론보다 이런 구절이 더 와서 콕 박혔다. 그러니까 이 글 역시 '젯밥'에 관한 글, 즉 '내 마음의 콩밭'에 관한 글이다.


소외감과 열등감은 분명히 부정적인 감정일 텐데, 이 경험을 통해 한층 성장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프로이트의 추종자였지만 나중에 자신만의 개인심리학이론을 제창한 아들러는 심지어 인간 행동의 가장 기본적인 목적을 열등감의 극복이라고 보았다.


살면서 내가 느꼈던 소외감과 열등감은 나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고 괴롭힐 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보통의 사람들이 느꼈을 법한 수준의 사소한 정도였다. 저 문장대로라면 그러기에 독립적인 판단력을 키우는 계기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이 그랬다. 늘 나와 비슷한 무리에 둘러싸여 있었고, 무리의 의견이 나의 의견인 듯 보였고, 따라서 나의 의견은 무리와 상충하지 않았다. 대다수의 그들이 가는 방향으로 향했다. 그 무리에서 벗어나면 큰 일 날 것 같아서 늘 무리 안에 속했다. 대체로 안전했지만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크게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그렇게 살았는데 나이가 이만큼 들어서야 나를 돌아본 시간을 가졌다. 계기는 삐걱대기 시작하는 건강 상태, 그리고 소외감이었다. 오랜 세월 확고한 내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했던, 시시콜콜한 일상과 슬픔과 기쁨을 공유하던 무리 내에서 전과 다른 균열과 잡음이 생긴 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나는 무리에서 소외되었다. 우리는 심적으로 물리적으로 서로를 밀어내느라 안간힘을 썼다. 함께 한 시간이 너무 길었어서, 울고 웃던 추억이 너무 많았어서 쉽지가 않았다.


인간관계를 대폭 축소하고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졌을 때 고독을 찬양하는 글을 읽었다. 사람을 찾아 뛰쳐나가지 않으려고, 혼자인 시간의 달콤함을 즐기려고, 고독의 효용성을 진작에 체험한 위대한 선지자들의 글을 읽었다. 그게 효과가 컸다.


"마치 저토록 요란하게 웃어대는 호수의 저 아비새가 외롭지 않으며 월든 호수가 외롭지 않듯, 나도 외롭지 않다. 저 고독한 호수에 어떤 벗이 있단 말인가?" 소로에게서 고독은 외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 고독은 생명 있는 것들의 본질이라는 것을 배웠다.


"우리는 반드시 혼자 있을 수 있어야 하며, 거기서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는 나만의 방을 마련해야 한다. 고독을 올바르게 활용하는 법을 아는 사람들에게 그런 칩거란 세계 속에 또 하나의 세계가 있는 것과 같다." 몽테뉴는 내게 고독이 선사해 줄지 모르는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자기에게 있는 여러 왕국에 대해 잘 모르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이 고독이란 왕국에 대해 가장 무지하다. 그들은 모든 인간의 내면에 존중되어야 할 공간, 당당하고 자유로운 공간, 명쾌하고 본질적인 권리가 부여된 공간이 있음을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영국의 작가 엘리스 메이넬은 내 안에 숨겨있는 고독의 왕국을 찾아가 볼 것을 권유했다.


"지상의 모든 것은 변한다. 이곳에 원래 형태대로 남아 있는 것은 없으며, 사물에 집착하는 우리의 애정도 그 대상이 변하면서 같이 변한다. 거기에는 마음이 의지할 절대적인 것도 없고, 이승에서도 영원히 계속되는 즐거움은 없다." 루소는 한때 내가 집착했던 것, 인연의 부질없음을 일깨웠다.


"당신의 고립이 습관적이어서는 안 되고, 그보다는 마음을 고양하는 정신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그들의 혼란 속으로 뛰어들지 말라. 사람들이 나를 괴롭힐 수 있는 이유는 내 나약한 호기심이 나의 의지를 이겼기 때문이다." 에머슨은 습관적인 물리적 고독이 아닌 일상적인 정신적 고독을 중시했다. 마음을 어지럽히는 사람들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날 것을 말이다.


점차 고독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작된 것은 나란 존재에 대한 성찰의 시간이었다.

나는 어느 날 이런 글을 끄적이고 있었다.


"내가 견딜 수 없는 것은 나이기도 하고,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기도 하다. 내가 벗어나고 싶은 것은 나이기도 하고,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기도 하다. 견딜 수 없어도, 벗어나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견뎌야 하고 벗어날 수 없는 것은 나이기도 하고,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불쑥불쑥 화가 난다. 나에게, 그리고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 이런 존재인 나와,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또한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것은 믿을 수 없게 놀라운 사실이다. 나는 나를,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을 세상 그 누구보다 사랑하고 아끼고 지키려고 애쓴다. 누군가 나를, 나의 것을 훔치거나 해하려고 하면 그 또한 화가 난다.


이래저래 화를 내지 않고 살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다.

환멸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추앙의 대상이기도 한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 그 어느 쪽도 진실이 아니다. 진실일 리가 없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그들을 둘러싼 세상이 그래 보이지 않듯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해보면 그다지 화낼 일도 아닌 것이다."


바람직하게도 이런 생각에 이르렀다. 나를 견딜 수 없게 만드는 나의 열등감의 근원을 차근차근 돌아보았다. 그 무렵 마샤의 자아 정체감 지위 이론을 접했다. 청소년기에, 적어도 청년기에 알았어야 하는 이론이다. 정체감 위기의 경험, 성취를 위한 전념의 경험에 따라 정체감 성취, 정체감 유실, 정체감 유예, 정체감 혼미의 네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1. 정체감 성취 유형은 정체감의 위기를 경험하고 정체감의 성취를 위해 전념한 경험을 통해 삶의 방향을 능동적으로 선택한 유형이다.

2. 정체감 유실 유형은 스스로의 정체감에 대한 고민 없이 타인과 사회의 가치체계를 받아들이고 전념하여 마치 정체감이 확립된 것처럼 착각하는 유형이다.

3. 정체감 유예 유형은 정체감에 대한 위기를 경험하지만 성취에 도달하기 전의 과도기적 단계이다.

4. 정체감 혼미 유형은 정체감에 대한 위기 경험도 없고, 어떤 가치나 활동에도 전념하지 않는 상태를 뜻한다.


이 이론을 접하고 '나는 나이만 이만큼 먹었지 덜 자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정체감 지위는 정체감 유실 유형에 머무른 상태였다. 대학 졸업반인 큰 아이는 요즘 확실히 정체감 유예 상태에 있고, 중학교 1학년인 작은 아이는 정체감 혼미 단계에 있다. 이런 발견이 무척 흥미로웠다. 그리고 정체감의 위기를 겪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의 소외와 고독감, 정체감의 성취를 위해서는 일정 수준의 열등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소외감과 열등감이라는 일종의 결핍의 효능감이었다.


그러니 늦은 감이 있지만 소외감과 열등감을 기쁜 마음으로 맞이해 보자.

온전한 나로 살 수 있는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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