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으로써의 심리학

이 좋은 걸 왜 이제야 알았을까?

by 낮별

아래 글은 2년 전, 교양으로 들은 심리학 강좌에서 작성했던 중간과제물이다. 시간이 지나 심리학에 대한 관심은 여전하고, 그 관심이 상담심리학에 대한 관심까지 이어졌다. 서론, 본론, 결론의 형식을 지니고 있지만 목차를 빼버리고 내용만 옮겨놓는다. 이 과제 덕분에 나는 처음으로 나의 사랑의 경험을 차근차근 떠올려봤었다. 남편과의 관계에 대해 한발 떨어져 객관적이고도 이성적인 접근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서로의 모자람, 차이, 그로 인한 불만조차 감사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나는 심리학이 이렇게 유익하고도 실용적인 학문인 걸 미처 몰랐었다.




몇 해 전에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읽고 이 책을 좀 더 일찍 읽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사랑도 일종의 ‘기술’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어야 했다. 어떤 기술을 익히려면 책임, 관심, 지식을 동반한 끈질긴 노력과 긴 시간이 요구되는 것처럼 사랑 역시 그런 것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다. 사랑은 그저 운명처럼 마주치는 황홀경 같은 막연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던 시절에는 사랑에 대한 이론적 지식이 쓸모없다고 여겨졌었다. 하지만, 사랑이란 기술을 연마하기 위해서는 사랑의 이론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는 이상적이고 건강한 남녀 관계를 구축해 나가는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1) 스턴버그(R. Sternberg)의 사랑의 삼각형 이론이란?

스턴버그는 사랑의 3요소를 친밀감(intimacy), 열정(passion), 의사결정/개입(commitment)으로 보았다. 친밀감은 서로가 가까이 연결되어 있고 결합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열정은 두 사람 사이에 신체적 매력을 느껴 성적으로 강하게 이끌리는 기본적인 욕망과 관련된 것이다. 의사결정/개입이라 함은 단기적으로는 그 사람을 사랑하겠다는 결심이고, 장기적으로는 그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 실행하고 헌신하고자 하는 결심을 말한다. 이 사랑의 3요소 중 일부 요소가 결핍되거나 충족되면서 사랑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스턴버그는 총 7가지 형태의 사랑을 설명하고 있다.

1. 좋아함(liking) : 친밀감만 있는 사랑

2. 얼빠진 사랑(infatuated love) : 열정만 있는 사랑

3. 공허한 사랑(empty love) : 의사결정만 있는 사랑

4. 낭만적 사랑(romantic love) : 친밀감과 열정만 있는 사랑

5. 동반자적 사랑(companionate love) : 친밀감과 의사결정만 있는 사랑

6. 백치 사랑(fatuous love) : 열정과 의사결정만 있는 사랑

7. 완전한 사랑(consummate love) : 친밀감, 열정, 의사 결정 모두 있는 사랑


(1-2) 스턴버그의 사랑의 삼각형 이론으로 분석해 본 본인의 경험

스턴버그가 말한 사랑의 3요소 친밀감, 열정, 의사개입/개입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요소가 아닌 서로 연결되어 있는 요소들이다. 보통의 남녀관계의 경우, 친밀감이 생겼을 때 열정이 생겨나고 의사 결정에 이르게 된다. 간혹 친밀감과 열정의 순서가 바뀌는 경우고 있다. 하지만 현대에서 남녀관계가 발전하려면 이 세 요소가 어떤 요소가 더 크게 작용하는가 하는 차이는 있겠지만 대체로 만남, 연애, 결혼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세 요소와 무관한 케이스는 거의 드물 것이다.

스턴버그의 사랑의 삼각형을 앞에다 두고 본인이 한 사랑을 대입해 보았다. 아주 어렸을 때 친밀감 혹은 열정만으로 시작했다 끝난 사랑은 사랑이라 말하기도 어려운 미숙한 경험이었다. 오래 지속되지도 않았고, 일방적으로 둘 중 누군가는 상처를 입거나 무시당했다는 모욕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런 미숙했던 경험들 뒤에 이 세 요소가 서로 결합되어 미래를 함께해도 좋겠다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 결혼을 했다. 물론 결혼 적령기라는 시기적 이점이 아주 크게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먼저, 서로가 절친한 친구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내적 친밀감이 들었고, 내가 살던 집과 그가 다니던 학교가 가까워 물리적 친밀감이 크게 작용했다. 대화를 나누어보니 시골이라는 공통된 성장 환경을 가지고 있어서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느꼈던 이질감에 대한 느낌이 일치하기도 했다. 대화를 통해 알게 된 세상에 대한 가치관 역시 거의 유사했다. 정치, 교육, 종교 등 갖은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 가치와 삶의 방식에서 논쟁할 일이 거의 없었다. 한편으로 완벽하게 문과 성향이었던 나는 완벽하게 이과 성향이었던 그를 보며 어쩌면 서로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가 가능하리라는 기대도 했다. 때로는 이렇게 다른 성향이 충돌한 적도 없진 않지만, 여가 시간을 보내거나 나중에 아이들을 키울 때에도 대체로 잘 작동했다. 이런 면에서 남편과 나 사이의 친밀감은 비슷한 부분은 비슷한 대로, 서로 다른 부분은 다른 대로 잘 결합되었던 것 같다.


친밀감이 먼저였는지, 열정이 먼저였는지 그 둘이 동시에 작용했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친밀감이 깊어갈수록 이성적인 호기심도 커졌다. 그것은 음극과 양극의 자석이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다가가듯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확실한 건 열정이 커질수록 친밀감은 더욱 깊어졌다. 2년의 연애 기간을 거쳐 23년의 결혼 생활을 유지하면서 열정은 전과 같지 않지만 친밀감은 여전히 굳건하다는 걸 느낀다.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말이 보여주듯 친밀감이란 단어가 오히려 부족할 정도가 되었다.

열정이 동반되어 견고해진 친밀감은 저절로 그와의 미래를 꿈꾸게 했다. 남들처럼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살아가는 방식의 삶 이외의 방식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어쩌면 다른 방식의 삶이 있다는 걸 간과하고 그저 남들의 경로를 별생각 없이 따라갔던 것 같다. 결혼 자체를 후회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부분에서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을 내렸어야 한다는 생각은 든다. 그와 함께하는 인생을 선택한 의사결정을 전적으로 자의로 했다기보다는 사회의 통념과 관례를 따른 것이다. 결혼 적령기에 만나 연애를 했으니 결혼은 수순이었다. 결혼으로 인해 따라오는 책임과 헌신 같은 것을 그다지 크게 고려하지 못했다. 어쩌면 정신적으로 충분히 준비가 되지 않은 결합이었다.

스턴버그의 사랑의 삼각형을 들여다본다. 내가 했던 사랑은 성숙한 의사결정이 다소 미흡했던 낭만적 사랑에 가까웠다. 낭만적 사랑으로 시작한 결혼 생활은 시댁과의 갈등이나 예정에 없던 갑작스러운 임신 같은 현실적인 문제들이 하나씩 닥칠 때마다 결혼 전에는 예상치 못했던 갈등이 생겨났다. 그런 고비들을 하나씩 넘어가며 아이 둘을 낳아 키워내며 지금에 이르렀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사랑의 시작은 낭만적 사랑이었으나 현실의 문제와 시간의 세례를 받아 책임과 의무를 다해가며 점차 견고해지는 완전한 사랑에 가까워진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2-1) 펙(M.S. Peck)이 제시한 참사랑은?

M.S. Peck 박사는 낭만적 사랑의 대안으로 참사랑을 말한다. 참사랑이란 자기 자신이나 타인의 영적 성장을 도울 목적으로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라고 볼 수 있다. 참사랑은 자신이나 상대를 후퇴시키거나 파멸시키지 않는다. 서로의 존재가 있어 영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성장할 수 있어야 한다. 펙이 말하는 참사랑은 흔히들 말하는 사랑에 빠진다는 느낌이나 애착과는 다르다. 오히려 사랑은 의지이다. 책임 있고 지혜로운 행동을 요구한다. 누구를 사랑할 것인지, 어떻게 사랑의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인지 결정하고 의지를 모아야 한다. 심사숙고한 끝에 사랑하기로 결정한 대상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관심을 가지고 상대의 말을 잘 경청하는 것이 사랑의 첫 단계이다. 그리고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경청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수고와 노력을 요하는 일이다. 또한 지나치게 상대에게 의존적이거나 혹은 상대를 소유하려고 하는 것은 참사랑이 아니다. 자신과 타인의 경계를 유지하고 독립성이 존중받아야 한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는 상담자와 내담자와의 관계처럼 신뢰가 구축되어 있어야 한다. 이러한 것들이 펙이 말하는 참사랑이 성립될 수 있는 조건이다.

(2-2) 본인이 추구하는 사랑과 펙의 참사랑의 공통점 및 차이점

스턴버그의 사랑의 삼각형 이론을 먼저 살펴보면서 뭔가 빠진 요소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펙의 참사랑을 공부하며 사랑의 요소가 좀 더 구체화됨을 느꼈다. 친밀감, 열정, 의사결정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부분들이 펙이 말하는 참사랑의 조건들에서 충족되었다. 이상적인 사랑은 사랑의 당사자들의 삶에 모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한다는, 적어도 상대 때문에 후퇴하거나 파멸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된다고 늘 생각했었다. 사랑이 의지와 책임감을 갖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란 깨달음은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읽고 절실히 느꼈던 바이기도 하다. 사랑은 사랑에 빠진 상태가 아니라 능동적인 행위이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나와 분리된 독립된 존재임을 인정하고 그 경계를 지키는 일도 중요하다. 이런 사랑의 전제 조건들은 비단 남녀 간의 사랑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부모-자식, 친구, 형제, 동료 등의 모든 인간관계의 성패의 조건이기도 하다.

하지만 펙의 참사랑에서는 이성과의 사랑에서 필연적으로 동반할 수밖에 없는 강렬한 열정에 대한 언급이 없다. 저절로 이끌리는 감정은 완전히 무시하고, 인간의 감정을 의지로 제어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취급한다. 하지만 제어할 수 없는 감정 또한 얼마나 많은가?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이 역사를 만들었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만들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펙의 참사랑은 너무 교과서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펙이 말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대상을 의지로 선택하여 책임감을 갖고 관심을 기울여 사랑하는 것이 이상적일 수는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떤 계기로 인하여 사랑에 빠지고, 사랑을 하는 그 과정에서 갈등하고 화해하는 동안 관계가 견고해지기도 하고 의미 없는 관계로 변질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영적, 혹은 정신적 성장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는 점 또한 의구심을 갖게 한다. 그렇게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관계가 되겠지만 그것이 관계에 있어서 목적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 영적 스승을 찾는 일도 아닌데 그런 관계가 목적이 돼 버리면 공허해질 관계가 얼마나 많을까? 영적, 정신적 성장이 목적이 되기보다는 서로의 존재로 하여금 긍정적인 삶의 변화를 추구하고 과거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을 갖는 것, 그런 영향을 서로 주고받으면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영적, 정신적 성장은 타인이 아닌 자기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3) 위의 분석과정에서 느끼거나 배운 점

스턴버그의 사랑의 삼각형 이론으로 나의 경험을 분석해 보면서 내가 한 사랑이 낭만적 사랑에 가깝다는 결론을 도출해 냈을 때 다소 놀랐다. 결혼에 대한 통찰, 변화할 가족 구성원, 내게 요구되는 역할의 변화 같은 것을 생각해보지 않고 그저 남들이 하니까, 결혼 적령기가 되었으니까 결혼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갔듯이,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했듯이 그렇게 결혼을 했다. 그래서 결혼 초 예상치 못하게 생겨나는 갈등들로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나도 남편도 각자 나름대로 의지를 갖고 책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한 시간이 있어서 우리의 사랑이 견고해졌음을 깨닫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결국 참사랑이려면 길고 긴 시간이 필요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인내하고, 노력하고, 깨달아가며, 성장해 가는 길고 긴 과정이 사랑의 과정이다. 그것이 완전한 사랑에 가까워지는 길인지도 모르겠다.

사랑의 다양한 형태가 있다. 스턴버그가 말한 7가지 형태의 사랑도 모두 사랑이다. 뭔가 결핍된 미숙한 사랑일지라도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성숙된 사랑, 완전한 사랑, 참사랑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훈련을 거듭해야 한다. 사랑은 순식간에 마법처럼 빠져버리는 감정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신기루에 가까워 금세 사라지고 만다. 오래 지속되는 관계 안에 남는 것은 서로에 대한 친밀감, 책임감, 신뢰와 같은 감정이다.




젊은 날의 뜨거운 열정이 사라져 버린 지금 남편과 나 사이에 사랑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열정은 사랑이 시작되기 위해 필요했던 요소일 뿐 사랑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오히려 세월의 더께를 얹은 친밀감과 우리가 속해있는 가정을 잘 이끌고 가려는 동지의식, 아이들에 대한 공동의 책임감으로 똘똘 뭉쳐 살아가고 있는 지금 우리는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 나이 든 부부가 두 손을 꼭 잡고 산책하는 뒷모습은 너무나 아름답다. 그들이 함께 헤쳐나갔을 그 길고 긴 이야기들이 들려오는 것 같기 때문이다.

“모든 일에는 (이루어지는) 때가 있다. (그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인내하고) 억지로 할 필요가 있다.” -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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