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맛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2005년 히트 친 한국 영화 <달콤한 인생>의 대사인데 예능이나 광고에서 패러디되면서 전 국민이 다 알고 있는 유명한 말이 되었다. 이 영화의 영어 타이틀은 <A bittersweet life>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한국말로 다시 바꾸면 ‘달콤 쌉싸름한 인생’이 되겠다. 한국어로는 ‘달콤 쌉싸름’, 영어로는 ‘bittersweet’. 달콤하고 쌉싸름한 순서는 다르지만 같은 뜻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선우(이병헌)는 조직의 보스 강 사장(김영철)의 신임을 얻어 승승장구한다. 강 사장은 젊은 애인 희수(신민아)가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 같다며 선우에게 희수를 감시할 것을 지시했는데, 선우는 희수를 보고 한눈에 반해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망각하고 만다. 이에 분노한 강 사장이 선우에게 한 말이 바로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이다. 강 사장은 모욕감을 되갚기 위해 선우를 응징하고, 그 응징 과정은 ‘달콤함’ 따위는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이 쓰디쓰다. 그러니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한 단어로 압축해서 보여주는 쪽은 영어 타이틀이다.
‘달콤 쌉싸름’, 이 표현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고대 그리스의 시인 사포(Sappho)라고 한다. 사포는 서양 역사 최초의 여류 시인이기도 한데 남아있는 시가 많지 않지만, 그녀의 시가 인용된 고대 문헌들이 다수 남아있어서 반짝이는 재능을 엿볼 수 있다. 플라톤이 사포를 ‘나의 열 번째 뮤즈’라고 칭송했을 정도이다. 그녀의 남아있는 시 파편 중에서 ‘달콤하다’와 ‘씁쓸하다’를 합친 ‘달콤 씁쓸하다’라는 표현이 최초로 등장한다. 사포의 삶이 자세히 전해지지는 않지만, 사랑으로 치열하게 고민했던 흔적이 글 곳곳에 묻어있으며 결국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고 알려져 있다. 사포의 인생 역시 ‘달콤 쌉싸름한’ 인생이었던 것만큼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생각해 보면 ‘달콤 쌉싸름’ 하지 않은 인생이 있을까? 인생의 유년기, 청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를 통틀어 ‘달콤 쌉싸름’이란 수식어가 어울리지 않는 시기는 없어 보인다. 또한 탄생, 성장, 학업, 일, 연애, 사랑, 육아, 권력, 명예, 예술 등과 같이 우리가 살면서 사력을 다해 매진한 것들, 혹은 숭상해 마지않는 가치들 어느 것에 붙여놓아 보아도 ‘달콤 쌉싸름’하다는 말은 너무나 잘 매치된다.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하는 ‘여행’ 조차도. ‘달콤 쌉싸름한 여행’, 전혀 이질감이 없다.
물론 인생과 여행은 출발부터 다르긴 하다. 여행은 자의로 시작하지만 인생의 시작은 내 의지가 아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느끼는 시련과 즐거움은 유사하다. 누군가의 도움에 기대는 패키지여행이 아닌 스스로 선택하고 만들어가는 자유여행을 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여행은 절대 설레고 즐겁고 달콤하지만은 않다. 낯설어서 두렵고, 말이 안 통해 불편하고, 헤매느라 몸이 고된 순간이 비일비재하다. 돈은 또 얼마나 많이 드는지. 돈 들여 개고생 하기. 자유여행은 정말이지 그렇다.
그런데 묘한 건, 여행에서 더 센 강도로 남아 기억에서 수시로 소환되는 일들은 달콤하고 행복한 순간들이 아니다. 오히려 헤매고 실수하고 난감했던 순간들이다. 특히 국내에서라면 별일 아니게 치부될 수도 있는 일도 해외에서라면 때론 공포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스위스 그린델발트에서 비는 오고 날은 저무는데 숙소를 못 찾아 헤맸던 일, 독일 튀빙겐 강에서 보트 타다 아홉 살 아이가 물에 빠져 혼비백산했던 일, 오스트리아 잘츠감머구트 펜션에서 홍콩 여행객과 사소한 트러블이 생겨 경찰까지 출동했던 일, 등등. 이런 일들이 일어났던 당시에는 마음이 너무나 힘들고 괴로웠었다. 뭐 한다고 여행을 와서는 이렇게 생고생을 하는지 후회되는 마음이 가득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면 그 어떤 즐겁고 유쾌한 순간보다도 웃으면서 추억하게 된다.
출산과 군대의 추억처럼 과거의 고생담을 무용담으로 승화시키는 것도, 해피엔딩의 연애보다 가슴 아프게 헤어진 연애담이 더 아름답게 느껴지고 오래 기억에 남는 것도, 승승장구한 성공담보다 시련과 역경을 이겨낸 인물 스토리가 더 감동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모두 같은 맥락이다.
또한, 달콤한 과일들도 좋아하지만 내가 또한 자몽을 좋아하는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이지 않을까? 상추도 약간 알싸한 맛이 나는 것이 더 맛있고, 살짝 달게 양념한 씀바귀 무침은 밥도둑이며, 단 커피와 단 술을 싫어하는 이유도 어쩌면 다른 음식들이 너무 달아서 쓴 맛의 균형이 필요해서인지도 모른다.
달콤 쌉싸름, 그 묘한 매력이 강력하다. 어쩌면 그 매력을 알아서 우리는 고생을 사서 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이렇게 글을 써 내려가는 과정도 사서 하는 달콤 쌉싸름한 고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