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과연 그럴 수 있는 사람인가?
상담대학원 면접을 보러 갔을 때 같은 조에 속해 있는 분들과 대기실에서 잠깐 대화를 주고받았다. 연세가 지긋하신 분이 계셨는데 그분이 대화의 물꼬를 터주셨고, 다른 사람들도 긴장된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스몰토크에 동참했다. "상담 공부 너무 재밌지요? 진작에 이 공부를 했어야 하는데 말이지요." "상담공부 하다 보니 금쪽이 같은 프로 보면 금쪽이보다는 오은영 박사에게 눈길이 가더군요." 다른 분들의 대화였다. 그 대화를 들으면서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난, 금쪽이 같은 프로 보기 싫은데...'
가끔 유튜브 영상에 무슨 알고리즘인지 모르겠지만 "금쪽같은 내 새끼"나 "이혼숙려캠프" 같은 일반인들의 문제 해결 상담 프로가 뜰 때가 있어서 클릭해 볼 때가 있다. 매번 그 문제 정도의 심각성과 일반적이지 않은 행태에 기함하게 된다.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의 삶이고,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니 알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외면했던 프로그램들이다. 그런 프로그램의 순기능이 있다면, 문제 투성이인 그들에 비해 지극히 멀쩡한 나의 아이들과 남편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느끼게 한다는 것 하나뿐이다.
면접에서의 그 대화 이후, 나는 티브이 채널을 돌리다 그런 프로가 눈에 보이면 잠시 멈추고 보려고 애쓰는 중인데 여전히 보고 있기만으로도 불편하다. 가족들이 왜 갑자기 저런 걸 보고 있냐고 하면, "어, 엄마 공부 중이야. 이런 것도 이젠 봐야지"라고 대답하는데, 애들과 함께 보기 참으로 거시기한 장면들이 많다. 피차 정신건강에 좋지 않겠군 싶어 얼른 채널을 바꿔버린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 나는 타인의 고통스러운 삶을 대할 자신이 없는 사람이구나. 이런 내가 어떻게 상담 공부를 할 수 있을까? 과연 타인의 고통을 인내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이 드는데도 나는 왜 상담 공부가 하고 싶은 걸까? 이 부조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내 마음은 왜 이런 거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내게 질문을 던져보았다.
사실 내가 감당하기 힘든 건, 그 프로그램에서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장면들이다. 그런 장면의 필요성을 좋게 포장하자면 타인의 고통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장치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그걸 보여줘야만 엉망진창인 타인의 삶을 엿보며 손가락질하며 떠들어댈 수 있는 대중의 관음증을 만족시킬 수 있다는 제작진의 의도 같아 보인다. 화제성과 시청률에 죽고 사는 그들이니 타인의 삶이 더 자극적이고 더 일반적이지 않을수록 기쁨의 비명을 지를 것이다. 수잔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고통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고 움찔하는 것 자체도 쾌락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런 프로그램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리는 것도 일종의 말초적 쾌락일 것이다. 그걸 생각하니 더 보기 싫었다. 쾌락에 굴복하고 싶지 않다.
제작진의 의도가 어찌 됐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엮여 있으면서도 서로에게 상처를 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정도의 문제 이긴 하나 어느 가족도 이런 문제와 동떨어져 있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티브이 프로그램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지나치게 극단적인 것들 뿐이라 내 마음이 불편한 것뿐이다. 내가 피하고 싶은 것은 타인의 고통이 아니라 지나치게 극단적인 행태들일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일견 타당해 보인다.
이상한 건, 왜 영화나 소설 속에서 그려지는 타인의 고통은 그런대로 견딜만한 건지, 오히려 그런 것들이 내게 번뜩이는 성찰의 순간을 주기도 하고 주체할 수 없는 감동과 슬픔으로 울게 하는 건가 하는 점이다. 예술로 승화된 타인의 고통과 날것의 차이 때문이다. 앞으로 내가 하고자 하는 공부는 예술로 승화된 것이 아닌 날것을 접해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에 다다랐다. 심호흡을 깊게 내쉬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