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과정'- 조문영
빈곤을 연구하는 인류학 학자가 쓴 책이라고? ‘빈곤 퇴치’를 연구한 경제학 학자가 몇 년 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한 적이 있지만 ‘빈곤 과정’을 연구한 인류학자가 쓴 책이라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조문영 교수가 이십여 년간 한국과 중국의 가난한 사람들, 그들 주변의 활동가들과 직접 접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학자적 통찰로 이뤄낸 귀한 기록이다.
‘빈곤 과정’이라는 책 제목이 갖는 중의성에 대해 조문영 교수가 서문에서 밝힌 것을 이해해 보자면 저자 자신이 빈곤을 연구해 온 과정을 의미하기도 하며,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온 과정을 포함하는 빈곤의 역사성을 의미하기도 하며, 빈곤은 계속해서 생성 변화하므로 ‘빈곤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내리기를 거부하는, 따라서 빈곤이 갖는 외연을 확장해 볼 것을 제안하기도 한다. 그 확장은 물질적 빈곤을 떠나 실존의 빈곤에 시달리는 젊은 세대들에게 이어지고, 마침내 인간이 주인처럼 군림하는 지금의 인류세 시대에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 심지어 지구를 포함한 비인간 자연이 겪고 있는 빈곤까지 다다른다.
빈곤에 대한 담론이 이렇게까지 확장될 수 있다는 학자적 통찰에 놀라기도 하고 감탄하기도 했다. 나 역시 ‘빈곤’을 그들의 일로 여기고 살았던 점을 인지했다. 하지만 ‘빈곤’이란 것이 빈곤 통치에 사용되는 어떤 수치나 정량적 지표만으로 특징지을 수 없으며, 따라서 어떤 정의로도 상태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이며, 끊임없이 생성되고 변화하며 이렇게까지 외연을 확장시켜 볼 수 있는 것이라면 ‘빈곤’은 우리 모두가 얽혀있으며 우리 모두가 관여해야 하는 일임에 틀림없다.
1. 빈곤 레짐에 포획된 사람들
책의 1장과 2장은 빈곤에 대한 논의와 대응이 ‘복지’라는 빈곤 레짐에 포획되면서 생겨난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복지’라는 빈곤 통치 수단을 통해 빈곤을 수치 정량화하여 수급자의 범주안에 들어간 가난한 사람들의 의존과 무기력, 그 통치 수단을 움직이기 위해 기계적 관료적으로 움직이는 시스템의 문제를 다루었다.
우리나라에서는 2000년 10월 국민기초생활 보장법이 시행되었고, 이에 따른 기준을 충족시킬 정도로 충분히 가난하다면 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되어 최저 생활을 보장할 만큼의 지원을 나라로부터 받는다. 하지만 ‘수급의 범위는 너무 좁고, 심사는 너무 까다롭고, 급여 수준은 너무 낮다. 간신히 수급자가 된 사람도, 자격이 안 되거나 심사에서 탈락한 사람도 모두 억울하다.’(25쪽) 이처럼 수급자가 되는 기준도 까다롭지만 그 기준이라는 것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수급을 받을 수 없으니 수급자가 된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수급자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고, 간발의 차이로 수급자가 되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만투성이다. 수급자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친다는 의미는 보통의 사람들이 살고자 발버둥 친다는 의미와는 완전히 상반된다. 수급자들은 수급 혜택을 유지하기 위해 소득활동을 최대한 피하거나 숨긴다. 수급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가난을 최대한 드러내야 한다. 가난을 드러내는 일은 수치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고, 가난의 정도를 측정하고 평가하는 일은 모질고 야박할 수밖에 없다. 즉, 수급자도 관공서의 복지수급 담당자도 몹시 괴로운 일일 것이다.
수급심사에서 탈락했지만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 연락이 두절된 상태의 가족이 있다는 이유 등으로 수급 심사 대상에 들지조차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 즉 복지의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의 사정은 더 딱하다. ‘수급의 밖은 어떨까? 상처가 곪았다 터지기를 반복하는 수급의 안을 굳이 들여다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계급정당도, 사회적 연대도 경험한 적 없이 가족 중심의 생존 전략을 도모해 온 사람들한테 남의 가난은 관심 밖의 일이다. 그래도 수급의 안과 밖이 잠시 접점을 찾을 때가 있긴 하다. 죽음이다.’(60쪽) 수급 밖의 가난한 사람들이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순간이 그들의 죽음뿐이라는 일갈에 연일 사회면을 채우는 일가족 동반 자살 사건들이 떠올랐다. 시스템에서 배제된 가족중심의 생존 전략은 각자도생만이 유일한 생존수단이며 그것이 통하지 않을 때는 여지없이 패배자로 낙인 될 뿐 아니라 더 이상 어떤 희망도 찾을 수 없어 극단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도록 몰아간다.
2장에서 작가는 의존이 과연 문제인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의존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삶이란 것이 원래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는 지속될 수 없는 것이다. 아이는 어른에게 의존하고 노인은 젊은이에게 의존한다. 우리 모두 아이였고, 언젠가는 노인이 될 것이 자명하다. 인간 대 인간의 의존뿐 아니라 인간 대 비인간(자연)의 의존 역시 당연한 사실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복지가 직업화 제도화 산업화를 거치며 성장한 역사란, 뒤집어보자면 사회복지 체제 구축에 관여해 온 종사자들이 가난한 사람들한테 의존해 온 역사다.’(67쪽) 사회복지 체제 구축에 관여해 온 종사자들은 가난한 사람들 덕에 그 직업을 갖게 되었고, 그들 덕에 살게 된 것이라는 상호의존의 관점은 완전히 새로웠다. 여기에 더해 3장에서 ‘구걸이나 절도도, 친척한테 도움을 청하거나 정부에 수당을 신청하는 일도 모두 분배노동이 될 수 있다’(104쪽)는 관점도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이런 저자의 설명들이 내게 빈곤 통치 이데올로기를 전혀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도록 만들었다.
지금은 고용 없는 성장의 시대이다. 여전히 고된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세계를 움직이는 다수의 자본은 최소한의 고용, 고도의 테크놀로지를 통해 생성되고 있다. 위에서 얘기한 수급자와 비수급자, 복지 시스템을 움직이는 기계화 관료화된 시스템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모두 느끼고 있는 문제들은 자연스럽게 ‘기본 소득’의 담론으로 나아가게 한다. 자칫 대책 없는 포퓰리즘이라고 비판받을 소지도 있지만, 지금처럼 고용 없는 성장이 계속될수록 반드시 거쳐야 할 담론일 것이다.
2. 과정으로서의 빈곤
3장과 4장은 저자가 오랜 세월 알아온 두 명의 중국 여성의 삶의 분투를 통해 그들의 삶이 어떻게 빈곤과 연결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문화기술지다. 폭스콘 공장에서 만난 젊은 노동자 쭤메이의 삶을 통해 그녀의 삶이 긴 세월 동안 어떻게 이동해 나가며 그녀를 변화시켜 놓았는지를 보여주는데, 한 편의 드라마처럼 그려지는 이야기이다. 중국의 젊은 여성의 삶이지만 우리나라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부푼 꿈을 품고 고향을 떠나 대도시 선전에서 월급 노동자로 살며 결혼을 거부하는 당당한 직업인으로서 보람과 긍지를 느끼지만 그 삶에는 자유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보험 설계사로 전직, 그 일이 잘 풀리지 않자 고향으로 돌아가 주요소에서 일하다 적당한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다시 선전 폭스콘 공장으로 돌아가지만 아픈 딸을 돌보기 위해 결국 고향으로 돌아간다. 쭤메이의 고향-선전-고향-선전-고향으로, 공장노동-자원노동-서비스노동으로 이어지는 궤도는 크게 낯설지 않다. ‘폭스콘 공장에서의 조립 공정, 커뮤니티 센터에서의 자원봉사, 보험 판매, 가사와 돌봄 노동의 전 과정에서 쭤메이는 부단히 가치를 만들어냈지만, 그러는 동안 소외의 경험도 동시에 누적됐다. 그래도 삶은 질기게 이어졌다.’(142쪽) 이 나라에서 주부이자 엄마로, 사회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별반 다르지 않은 이야기이다. 우리는 부단한 가치를 만들어냈지만 다양한 소외의 경험도 함께 쌓이고 있다. ‘빈곤과 불평등은 숫자로 축약할 수 있는 조건도, 스냅숏으로 관찰할 수 있는 현상도 아니다. 부단한 과정이고, 고된 분투에 가깝다.’(144쪽) 더 이상 빈곤을 그들의 문제라고 외면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4장에서 잃어버린 땅을 되찾기 위한 쑨위펀의 여정에 동참했던 경험 역시 부단한 과정이고 고된 분투였다. 이것은 빈곤으로 인한 것이며, 빈곤을 벗어나고자 함이었지만, 그 과정 자체가 빈곤이었다. 끊임없이 요구해야 했고, 요구에 대한 응답은 없었다. 그런 면에서 고된 분투인 삶은 그 자체가 빈곤의 과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다면 누구도 빈곤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3. 실존의 빈곤
저자는 빈곤의 외연을 넓혀야 한다고 했다. 물질적 빈곤과 어느 정도 연결이 되어 있긴 하지만 젊은 층에 만연해있는 젊은 청년들의 실존의 빈곤에 다다른다.
5장과 6장은 저자가 학교에서 만난 젊은 청년들과 글로벌 빈곤이 기회를 주는 해외자원봉사활동을 경험하는 젊은 청년들의 이야기이다. 청년의 문제를 담는 무수한 담론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문제는 청년들의 불안이다. 부모세대만큼 살아내는 것이 그들의 목표이지만 기회는 현저히 적고, 요구되는 자질은 너무나 높다. 국내 100대 기업이 표방하는 인재상이라는 것이 창의성, 전문성, 도전 정신, 팀워크, 글로벌 역량, 열정, 주인의식, 실행력이라는데 해외자원봉사활동이 추구하는 가치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불안한 청년들이 기업에서 요구하는 스펙을 위해, 혹은 도피처럼 해외자원봉사활동에 몰두하게 만드는 이유이다. 앞에서 설명했던 의존성의 개념으로 보자면, 세계의 극빈국들은 다양한 해외원조기관에 의존하고, 불안한 청년들은 글로벌 빈곤에 의존하는 셈이다. ‘해외 자원봉사가 타국의 경제적 빈곤에 대한 적극적 개입이라기보다는 신자유주의 시대 실존의 빈곤을 보듬는 치유 기제가 된 것이다.’(263쪽) 여기에서도 상호의존성을 엿볼 수 있다. 젊은 청년들의 담론은 뒤에 나오는 8장에서도 이어진다. ‘프레카리아트’라는 생소한 단어를 이용하여 ‘말할 수 있는 프레카리아트’ 문제를 다룬다. 교육 자본과 문화 자본을 갖춘, 하지만 경제 자본 수준은 천차만별인 고학력 청년들이다. 실존의 빈곤에서 이어지는 고민, 우울, 분노의 인식은 청년들을 좌절하게도 만들었고, 동시에 변화를 추동하는 원동력으로도 만들었다.
책에서는 따로 다루지 않았지만 고령화 시대에 마주할 노년층의 실존의 빈곤 문제도 점점 더 큰 사회적 문제가 될 것이다. 노년층의 경우 실존의 빈곤에 더해 물질적 빈곤이 양방향으로 가해져 더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젊은 층의 빈곤과 노년층의 빈곤, 억세게 운 좋은 소수를 제외한 모두가 거쳐 갈 수밖에 없는 과정이다. 빈곤을 내버려 두면 그들은 외로워지고 위험해질 것이다. 모두가 함께 살아가기 위한 인류애적, 제도적 고찰이 필요한 이유다. ‘어떤 경우든,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어떤 무리가 안전할 권리를 외치는 우리 바깥에 머무는 한, 그들은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는 존재로 언제든 출몰할 수 있다는 점이다.’(341쪽)
4. 빈곤의 모호한 경계
7장에서는 중국 둥베이 선양의 한인타운에서 살아가는 한국인 이주자, 조선족, 탈북민들의 부침 속에서 살펴보는 빈곤의 불안정성을 보여준다. 서로 편 갈라 적대시하며 자신들의 이익만을 구축하려고 애쓰며, 상대를 비정상성의 범주에 넣으려는 편협함 속에서 빈곤 전염의 공포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갈등은 경계인 집단끼리 폭발했다. 단일민족국가를 전제한 채 살아온 한국인이 중국 국적이면서 동포인 조선족의 불분명한 지위에 의문을 던지며 그들을 집요하게 차별했고, 다시 조선족은 우월한 위치를 당연시하나 현실은 지극히 불안한 한국 이주자를 희화화했다. 경계인이 경계인을 공격했다. 이들이 그나마 적대를 거두고 의견의 일치를 보이는 순간은 자신보다 열위에 있는 다른 경계인-탈북민을 지목할 때였다.’(293쪽) 현지에서 오랜 시간 관찰자로서, 생활자로서 현지 사람들과 부대끼지 못한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미묘한 관계이다. 그곳에서 직접 만난 많은 사람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생생한 이야기들이 이 책이 학술지를 뛰어넘는 서사를 전해준다. 가령 ‘조선족은 한국 사회에서 충분히 한국적이지 않아 비난의 대상이 됐지만, 중국 사회에서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싶어 하는 한국인들은 거꾸로 조선족을 충분히 중국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비판하고 있었다’(297쪽) 라고 직접적으로 한국 이주자들의 이중성을 꼬집는 부분은 날카롭다. 이 책을 읽고 있는 나는 이주자가 아닌데도 조선족을 바라보는 내 마음 어딘가에 이런 마음이 있지 않나 내심 찔렸다. ‘이들이 아귀다툼과 구별 짓기를 넘어, 위기와 불안을 영속화하면서도 무한 경쟁을 강요하는 자본의 통치에 맞서고, 이러한 통치(성)에 우리 모두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공통 감각을 형성하는 일은 가능할까?’(308쪽) 저자가 던져놓은 이 물음이 쉽게 돌아서지 못한 채 자못 큰 울림으로 남는다.
5. 인류세 시대 비인간의 빈곤
이제 빈곤은 그 지평을 넓혀 비인간이 겪고 있는 빈곤으로 확장된다. 인류가 주인처럼 군림하는 현시대의 지질시대에 대한 명명이 인류세가 된 것은 그만큼 인류가 이 지구와 비인간 자연계에 끼치는 영향이 막대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팬데믹, 기후위기, 자본주의나 산업주의의 명분 하의 무차별적인 개발 등 인간은 그 어떤 것에서도 유죄다. ‘버려지고, 내쫓기고, 착취와 약탈에 내던져지고, 수동적 존재로 취급받고, 재현 권력에 포획된 존재는 인간 빈자에 국한되지 않는다. 지구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생명체는 인간 생명체와 접촉하는 순간 삶이 뒤틀린다.’(357쪽) 지구상의 생명체에 국한되지 않고 지구 자체로도 위기이다. 인간 빈자가 자본의 힘이 막강한 자본주의, 신자유주의가 부추기는 경쟁 사회, 불평등한 사회구조, 심각한 빈부격차 등으로 생겨난 것이라면 비인간 빈자 역시 그러하다. 인간의 빈곤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치부할 수 없듯 비인간 빈곤 문제는 더 큰 담론을 필요로 한다.‘발전의 꿈이 아무리 집요하고 중독성 강하다 한들 누구도 삶의 취약성과 유한성을 피해 갈 수 없다면, 지금 우리한테 필요한 것은 취약성과 유한성을 개별 인간의 불행으로 남겨두기보다 지구생활자의 공통 인식과 감각으로 받아들이도록 돕는 제도, 교육, 운동일 것이다.’(386쪽) 인간뿐 아니라 유한성과 취약성에서 자유로운 생명체는 없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구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을 바르게 인식했을 때, 인류가 향해야 하는 방향과 속도에 변화가 생길 수 있다. 빈곤 담론은 이렇게 거대한 담론으로 확장된다.
더 이상 빈곤이 나와 상관없는 가난한 나라의 일, 가난을 검증받은 수급자의 일이라는 생각을 할 수 없다. 또한 어떤 수치나 정량적 기준으로 구분 지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것도 이해했다. 누군가에게는 경제적 빈곤이, 누군가에게는 실존적 빈곤이, 누군가에게는 건강의 빈곤이, 누군가에게는 관계의 빈곤이 있을 수 있다. 인간 대 인간, 인간 대 비인간으로 이어지는 상호작용 속에 단지 어떤 이는 운이 좋아 빈곤을 모르고 살고, 어떤 이는 운이 나빠 척박한 환경 가난한 부모에게 태어나 평생을 빈곤 속에 살기도 한다. 우리는 운이 좋아 동물이 아닌 인간으로, 최빈국을 벗어난 대한민국에 태어났다.‘부자는 왜 부자이고, 가난한 사람은 왜 가난한가?’라는 질문에 세대별로 다르게 답변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중장년층에서는 이 질문에‘부자는 젊어서 열심히 일했고 젊어서 열심히 일하지 않은 사람은 가난한 것’이라는 답이 우세했고, 젊은 층에서는‘부자는 부모가 부자인 사람이고, 가난한 사람은 부모가 가난한 것’이라는 답이 우세했다. 중장년층의 답변은 열심히 일하는 노동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한 자기 세대 기준의 답변이며, 젊은 세대의 답변은 아무 희망도 없어 보이는 운명론을 신봉하는 무기력한 답변이다. 빈곤이 끊임없이 생성되고 변화하는 것이라면 유한하고 취약한 모든 생명체들에게 그저 근면만이 미덕이라는, 부자 부모를 만나는 운 만이 최고라는 이야기는 통하지 않는다. 빈곤을 나의 문제로, 우리의 문제로 받아들여 숱한 ‘마주침’을 통해 ‘동거(同居)’하는 활동가들의 선택에서 방향을 모색해 보는 저자의 결론이 무척 인상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