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창살 안의 호랑이를 키우며

by 낮별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죽음에 대한 막연한 공포도 있다. 하지만 죽음이 아직은 나와는 먼 일이라는 것, 그러니 그 공포는 실제 우리의 삶을 위협하지는 않는다. 몇 해 전 돌아가신 이어령 작가님은 죽음을 앞두고 나서야 자신이 그동안 두려워했던 것은 창살 안의 호랑이였다고 했다. 정말 죽음이 자신에게 다가왔을 때, 호랑이가 창살을 뚫고 나와 자신 앞에 서있는 공포를 느꼈다고 했다. 그 비유가 죽음의 상상과 실제의 현격한 차이를 알게 해 준다. 나의 호랑이는 창살 안에 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지금 죽어도 요절이라 볼 수도 없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 나이에 가까워질수록, 창살 안의 호랑이가 점점 크기가 커지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실존주의 상담이론의 대가 어빈 얄롬은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죽음에 직면하게 되면 개인적 성숙이라 볼 수 있는 내적인 변화의 놀랄만한 움직임이 보인다."

그가 열거하는 여섯 가지의 변화는 다음과 같다.

첫째, 삶의 우선권에 대한 재조정을 하게 된다. 사소한 것은 사소하게 여긴다.

둘째, 자유의 느낌을 갖게 된다. 원하지 않는 것은 선택하지 않을 수 있다.

셋째, 은퇴 후나 미래 어느 시점으로 미뤄두기보다는 현재를 살아가는 감각을 갖게 된다.

넷째, 근본적인 삶의 현실들에 대해 생동감 있는 감사를 느끼게 된다.

다섯째, 전보다 사랑하는 사람과 더 깊은 대화를 나눈다.

여섯째, 전보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에 대한 걱정은 줄어들고, 모험에 대한 의지는 커진다.


이것을 읽고 처음 든 생각은,

죽음에 직면하지 않더라도 나이가 들면서 점점 이렇게 변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이 죽음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는 일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렇게 변해가는 것이 퍽 괜찮은 일이라는 것이다.


몇 달 전 손석희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질문들'이라는 대담 프로에 김은숙, 김은희 작가가 출연했다. 나이가 드니 노안도 그렇고 체력도 떨어져 힘들다는 작가들의 하소연 끝이었다. 손석희 아나운서가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팔십 대 어르신이 자신이 다시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다면 오십 대라고, 지나고 보니 그때가 가장 좋았다고 회고하신다는 말을 전했다. 오십 대인 여성 작가들을 격려하고 응원하려고 전달한 일화일 텐데, 그 얘길 듣고 나는 갑자기 눈물이 터져버렸었다. 그 무렵 막 만 오십을 넘기고 급격하게 떨어지는 체력과 건강상태로 인해 나이가 든다는 것은 이토록 슬픈 일이구나를 절감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오십 대가 된 서러움에 북받쳐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상태에서 손석희 아나운서가 한 얘기를 들으니 마치 나에게 건네는 위로이고 격려 같았다.


누군가가 그토록 돌아가고 싶어 하는 찬란한 오십 대를 시작하는 내 태도가 부끄러웠다. 내 마음 상태와 태도를 수정하기 시작했다. 기쁜 오십 대, 찬란한 오십 대, 나중에는 무척 그리워할 나의 오십 대.

나보다 몇 년 먼저 오십 대를 시작하셨고 자녀들을 다 키워놓은 분들과 대화하면서 손석희 아나운서의 얘기를 전했다. 그분들은 서로 눈빛과 미소를 주고받으면서 "맞아, 얼마나 좋은데"라고 맞장구쳤다. '넌 아직 모르지? 조금 더 있어봐'라고 하는 듯 비밀스럽게 서로를 보며 웃었다.


얄롬의 여섯 가지 변화를 읽으면서 나이가 들면 좋은 게 바로 이런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최근 몇 년 사이 저절로 인간관계를 대폭 축소하고, 꺼려지는 만남은 피하고,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먼 훗날 다른 어느 곳이 아닌, 지금 여기의 삶에 집중해야겠다 마음먹었다. 때가 되면 저절로 변화하는 자연이 경이로웠다.


창살 안의 호랑이가 몸집을 키울수록 이러한 인식은 점점 더 명료해질 것이다. 몽테뉴는 작가라면 묘지가 보이는 창문을 가진 서재를 가질 것을 권했다. 죽음에 대한 인식을 가지라는 말일 테다. 나이가 들면서 저절로 그 비밀에 다가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나이 듦이 기대된다.


얼마나 깊어질까,

얼마나 넓어질까,

얼마나 단단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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