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를 위한 변명
35살 미혼의 ‘노라’가 있다. 방금 직장에서 해고 통보를 받았고, 반려견인 볼츠까지 죽었다. 무기력하고 고독한 삶, 자신의 무능력과 무가치를 더 이상 견디기 힘든 지경에 이른 소설 속 주인공 노라는 자살을 결심한다. 하지만 죽음조차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고, 노라는 죽음 직전에 머무는 곳에서 기이한 체험을 하게 된다. 후회로 가득 찬 인생의 어느 지점을 다시 살아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어려서 도서관에서 보낸 시간을 특별하게 기억하고 있는 노라에게는 그 죽음 직전 머무는 공간이 도서관이고, 노라의 안내자는 어린 시절 도서관 사서 엘름 부인이다.
과거를 되돌려 여러 가지 삶을 살아보는 중에 호주에 사는 절친한 친구 이지가 늘 바랬듯 노라는 호주에 가서 살아보게 된다. 노라의 그 선택은 뜻하지 않은 슬픈 사건으로 이어지는데 이지가 사고로 죽는다. 선택은 의지대로 할 수 있지만, 결과는 의지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이지가 사라진 호주에 남은 노라의 우울증은 깊어지고, 이지가 없는 호주에 머무는 자신을 텅 빈 수조를 떠다니는 물고기에 대입시킨다.
‘자극이 없으면 물고기도 우울증에 걸린다. 자극까지는 아니더라도 무엇이든 있어야 한다. 돌이나 나무, 수초가 없는 수조에서 그냥 둥둥 떠다니기만 하면 우울증에 걸린다’는 대목이 있다. 이 부분은 검색해 보니 실제로 앨라바마 트로이 대학 생물환경공학부 교수팀이 연구한 열대어 우울증 테스트 결과를 인용한 부분이다.
물고기가 우울하다고 대답한 것은 물론 아닐 텐데, 자극이 사라졌을 때 움직임이 줄어든 것을 가지고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단정 짓는 것이 맞을까? 그런 의문이 들었다. 걸리적거리는 것이 없어 편안한 마음으로 유유히 수조 속을 누비고 있던 것이라면 우울증에 걸렸다는 진단이 물고기로서는 조금 황당하지 않을까? 그렇게 진단 내리고 항우울제를 투여하여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고 우울증이 치료되었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인간 중심의 일방적인 실험이고 결론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우울제를 투여받고 텅 빈 수조를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이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 애초에 수조를 비워 두고 이런 실험을 한 것이 못마땅하기도 하다. 바다로 돌려보낼 것이 아니라면 수조 속 환경도 어느 정도 조성해 주는 것이 당연한 도리일 테다. 그리고 어쩌면 그 물고기는 극단적인 미니멀리스트라 텅 빈 수조를 퍽 마음에 들어 했을지도 모른다. 인간이 물고기의 마음을 어떻게 알겠는가?
이 실험이 도출하는 결론은 물고기도 그러할진대 인간도 자극이 없다면 우울증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자극 과잉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그 어떤 시기보다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우울증 환자 수를 생각해 보면 과연? 차라리 자극이 넘치면 우울증에 걸린다는 쪽이 더 설득력을 가질 수도 있다.
자라며 공부하고, 공부가 끝나자마자 취업하고, 취업하자마자 결혼하고, 결혼하자마자 아이를 갖고 맞벌이를 하면서 두 아이를 키웠던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면 넘어도 넘어도 끊임없이 나타나는 언덕을 앞에 둔 힘든 시간의 연속이었다. 언제나 무언가에 쫓겨 다녔던 시간이다. 나를 힘들게 했던 그 모든 것이 사실상 엄청난 자극이었다. 그렇게 통과해 온 십 대, 이십 대, 삼십 대. 행복했던 순간보다 힘들었던 시간이 많았고, 자주 우울했었다. 아무리 젊음이 찬란해도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까닭이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고, 붙잡혀 있는 직장도 없는 지금은 아주 가끔 언덕을 마주하기도 하지만 전처럼 무언가에 쫓겨 다니지는 않는다. 가만히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숨 가쁘지 않게 편안하게 걷는 시간이 좋다. 이런 시간이 좋아지면서 나이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내 앞에 놓여있는 자극이 많이 사라진 덕에 생긴 변화다.
더 구체적인 시간으로 보자면, 모두 함께 복닥대며 지내는 주말을 보내고 나서 가족들이 회사로 학교로 다 가버린 월요일 오전은 내게 있어 순도 100% 무자극의 시간이다. 복닥대며 고달팠던 몸과 마음을 가만히 내버려 두고 싶은 그런 순간이기도 하다. 나의 움직임은 자극이 없는 수조에서 둥둥 떠다니는 물고기처럼 느리다. 그건 절대로 우울해서가 아니다.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순간은 어쩌면 무자극의 순간이 아닐까? 우리는 너무 많은 자극에 이미 충분히 시달리고 있다. 우리의 눈과 귀와 입은 쉴 새가 없다. 자극 없이 가만히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시간을 가져야 한다. 나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강요대로, 누군가의 의지대로, 누군가의 시선에 의해 살아왔다면 특히나.
소설 속 주인공 노라에게도 분명 그런 시간이 필요했다. 결국, 노라는 자신이 살아본 모든 선택지가 그 어느 것도 자신이 진짜 원한 삶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헤어진 남자친구가 원했던 삶, 부모님이 원했던 삶, 오빠가 원했던 삶, 친구가 원했던 삶을 경험하면서 노라는 비로소 자신의 삶에 무엇이 결여되어 있는지 알아차린다. 노라에게 필요했던 것은 자극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귀 기울일 시간이었다. 자극은 이미 넘치도록 경험했다.
졸지에 우울증 환자로 진단받아 항우울제까지 투여받게 된 물고기의 입장에 감정이입이 되어 그 마음을 짐작해 보느라 애써봤다. 텅 빈 수조 속을 느릿느릿 유영해 다니는 물고기의 마음으로 오늘도 나의 마음을 가만가만 들여다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