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치유로서의 글쓰기
내 플레이리스트 중 올드팝 카테고리에 Poco의 "Sea of heartbreak"가 있다. 자주 흥얼거리는 곡이기도 하다. 아침 일찍 브런치에 게재되는 글을 읽다가 문득 브런치가 마치 '상심의 바다'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처받은 영혼들이 이렇게 많구나. 어디에도 내놓을 수가 없어서 이 공간에 비밀스럽게 펼쳐놓는 이야기들이 이렇게 많구나. 그런 글을 만나면 차마 어떤 말을 건네기가 힘들어 그저 소심하게 라이킷을 남길뿐이다.
"달은 우리에게 늘 똑같은 한쪽만 보여 준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삶 또한 그러하다. 그들의 삶의 가려진 쪽에 대해 우리는 추론을 통해서밖에 알지 못하는데 정작 단 하나 중요한 것은 그쪽이다."
장 그르니에의 '케르겔렌 군도'의 한 문장이다. 현실에서의 우리의 모습은 글을 쓰고 있는 지금처럼 이렇게 진지할 수도 없고, 솔직할 수도 없다. 적당히 가볍고, 적당히 감춰야 한다. 물론 공개적으로 글을 쓸 때에도 백 퍼센트 나의 가려진 저쪽을 보여줄 수는 없지만, 현실의 삶에서 드러내지 못한 많은 부분을 공개한다. 더 중요한 그쪽 말이다. 내가 했던 행위, 경험보다는 그 행위와 경험을 통해 느꼈던 감정과 사유를 말한다. 누구에게도 차마 표현하지 못한 슬픔, 아쉬움, 서운함, 후회, 외로움 같은 감정들도 내놓는다.
글쓰기를 통한 자기 치유 효과가 있을까? 나는 경험으로 있다고 확신한다.
몇 년 전, 요가 수업을 처음 배울 때였다. 단단하게 뭉친 몸으로 익숙지 않은 동작들을 하느라 안간힘을 쓰며 애쓰고 난 후 마지막 사바 아사나 수련을 할 때마다 나는 자꾸 돌아가신 엄마 생각이 나고 눈물이 나왔다. 강사는 몸의 긴장도 빼고 머릿속에서 모든 생각도 없애라고 했는데 나에게는 불가능한 미션이었다. 불을 끄고 송장 상태로 누워 있으면 어김없이 엄마 생각이 찾아왔다.
그때의 감정을 글로 남겼었다.
엄마가 떠난 지 벌써 두 해가 지났다. 시간이 갈수록 엄마를 생각하는 일이 점점 줄어들고 있어서 어느 때에는 갑자기 화들짝 놀라기도 한다. 엄마 생각을 이렇게 오랜만에 하다니 하고...
그러던 내가 요즘은 아주 규칙적으로 엄마를 떠올린다. 일주일에 두 차례, 화요일과 목요일 오전 10시 45분 경이다.
요가 수업이 끝날 때쯤이면 항상 마무리로 온몸의 긴장을 풀어버리는 '사바 아사나(송장 자세)' 시간을 갖는다. 불을 끄고 어두워진 가운데 매트 위에 누워 있는 시간이다. 요가선생님은 늘 몸의 긴장을 다 풀어버리고 모든 생각을 떨쳐버리라고 하는데, 나는 몸의 긴장을 풀어내면서 머릿속으로는 늘 엄마를 떠올린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요가 수업이 무지 고되다 느껴졌던 어느 날이었다. 비틀기, 꼬기, 당기기, 뻗기 등등 평소에 쓰지 않던 몸의 관절들을 모조리 다 써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완전히 탈진 상태로 수업이 진행된 날이었다.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고 마침내 사바 아사나 시간이 되었을 때 엄청난 편안함을 느꼈다.
어두운 실내에서 마스크를 쓴 채 눈을 감고 누워 있는데... 그때 불현듯 삶의 마지막 순간이 이럴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게 주어진 모든 날들을 소진하고 난 다음 마지막으로 누웠을 때 이렇게 편안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 엄마의 마지막 순간이 떠올랐다.
산소호흡기를 낀 채 눈을 감고 누워 있던 엄마는 이런 기분이었을까? 이렇게 누워서 우리가 하던 얘기들을 다 듣고는 계셨을까? 분명 그랬을 것 같다. 밤새 혼수상태였다는 간호사의 말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갔던 아침 일찍, 나는 엄마를 안고 대성통곡을 했다.
"엄마, 엄마, 눈 좀 떠봐, 내가 왔어."
다시는 뜨지 못할 것처럼 감고 있던 눈이 나의 통곡 소리에 일순간 번쩍 떠졌다. 그건 아주 찰나였다. 엄마는 마지막 온 힘을 다해 눈을 떠서 나를 한 번 보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 뒤 만 하루를 채 못 넘기셨다.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한 채 호흡이 점점 힘을 잃어갔다.
엄마의 마지막 시간이 생각난 그 수업 이후로는 늘 그 시간이면 엄마가 떠오른다. 눈을 감고 엄마 생각을 하다 보면 이내 눈에 눈물이 고인다. 땀과 눈물이 뒤섞여 축축해진 눈으로 늘 요가 시간을 마무리한다. 그러고 나면 엄마를 만난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사바 아사나 시간은 엄마를 만나는 시간이다.
이 글을 쓰고 난 후에는 사바 아사나를 하면서 눈물을 흘린 적은 없다. 글을 쓰면서 나의 감정을 허물처럼 벗어놓고 가만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내 감정을 이해하게 됨으로써 더 이상 사무치게 슬프지는 않았다. 다만 사바 아사나 시간은 엄마를 만나는 시간으로 남았다. 기다려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사바 아사나 시간에도 엄마를, 그리고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날이 더 많아졌다.
쓰고 나니 더 이상 상처가 아닌 것 같은, 나에게서 슬픔이 분리되는 희한한 효과를 체험했다.
그 무렵 읽은 이윤주 작가의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라는 책에서 만난 구절이 정확하게 이 현상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인간의 뇌에는 감정을 관장하는 부위와 이성을 관장하는 부위가 따로 있다. 전자가 편도체, 후자가 전전두엽이다. 슬픔에 빠지면 편도체가 과로한다. 그런데 그 슬픔을 '슬프다'라고 쓰는 순간 편도체가 쉬고 전전두엽이 일한다. 슬픔의 진창에서 발을 빼고 '슬프다'라는 언어를 가만히 응시할 수 있는 것이다. 슬픔이 언어가 되면 슬픔은 나를 삼키지 못한다. 그 대신 내가 슬픔을 '본다'. 쓰기 전에 슬픔은 나 자신이었지만 쓰고 난 후에는 내게서 분리된다. 손으로 공을 굴리듯, 그것은 내가 가지고 놀 수 있는 무엇이 된다."
왜 저 글을 쓰고 난 후에는 더 이상 사바 아사나 시간에 엄마 생각에 슬퍼지지 않는 것일까? 왜 더는 땀과 눈물이 범벅이 되는 일이 없어진 걸까? 의아했는데, 나의 편도체가 일을 멈추고 전전두엽이 일하기 시작한 것이다.
슬픔도 그랬고 다른 다루기 힘든 감정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화가 나고 마음 상한 일도 글로 한바탕 풀고 나면 한풀 꺾이는 효과가 있었다. 글을 쓰면서 내 마음에 예민하게 귀를 기울였기 때문이다. 나 스스로에게 내 마음을 정성껏 들어주는 상담사가 되어 준 셈이다.
글을 쓰며 자신의 감정을 돌아보는 일이야 말로 가장 건강하고 효과적인 심리치유가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상심의 바다'인 브런치라는 이 공간은 거대하고 위대한 '심리치유센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