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에게 필요했던 유형기
봄날이었다. 오전에 요가 수업을 다녀온 후 집 청소를 한바탕 끝내고 혼자 점심을 대충 때우고 나니 노곤해졌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거실 유리창으로 보이는 숲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바람에 뭉게뭉게 피어오른 송홧가루가 마치 연기처럼, 영혼처럼 움직였다. 순간, 숲이 나를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내게 어서 오라고 손짓하고 있는 듯했다. 벌떡 일어나 작은 가방에 물병 하나 넣고 휴대전화와 이어폰을 챙겨 집을 나섰다.
혼자 산책을 할 때면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음악을 듣거나 팟캐스트나 오디오북을 듣는다. 숲을 걸으며 들을 책을 골랐다.<나는 나무에게 인생을 배웠다> 책 제목만 보고서 산에서 듣기 딱 좋은 책이구나 싶었다. 나무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병든 나무를 보살펴 주기도 하고 수종에 맞는 환경을 조성하기도 하는 ‘나무 의사 선생님’의 책이다.
“막 싹을 틔운 어린나무가 생장을 마다하는 이유는 땅속의 뿌리 때문이다. 작은 잎에서 만들어 낸 소량의 영양분을 자라는 데 쓰지 않고 오직 뿌리를 키우는 데 쓴다. 눈에 보이는 생장보다는 자기 안의 힘을 다지는 데 집중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어떤 고난이 닥쳐도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을 비축하는 시기, 뿌리에 온 힘을 쏟는 어린 시절을 ‘유형기’라고 한다. 나무는 유형기를 보내는 동안 바깥세상과 상관없이 오로지 자신과의 싸움을 벌인다.”
‘유형기(幼形期)’라는 생소한 단어에 멈춘다. 몇 년 전 이사하면서 집에 올리브 나무를 들였다. 위로만 쭉쭉 뻗어 나가길래 삐죽 위로 뻗은 가지를 잘라냈고, 잘라낸 가지를 버리기 뭣해서 빈 화분에 그냥 꽂아 두었더니 놀랍게도 뿌리를 내렸다. 이파리도 아주 싱싱하여 한 가닥의 가지가 성목으로 성장하려나 싶어 기대하는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다. 시간이 지나도 나무의 외양이라기보다는 여전히 꺾꽂이해 놓은 가지일 뿐이다. 굵어질 생각도, 위로도 옆으로도 더 자랄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러니까, 온 힘을 뿌리에 쏟고 있는 유형기였구나! 나무마다 유형기는 제각각 다르지만 보통 5년 정도에서 길게는 수십 년에 달한다고도 한다. 베란다 한편에서 꿋꿋하게 살아남아 볼품없는 외양으로 지탱하고 있는 올리브 나무는 유형기를 견디고 있었다. 작은 이파리를 통해 겨우 얻은 양분을 뿌리내리는 일에 온통 쏟아붓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조바심을 냈던 셈이다. 꺾꽂이해 놓은 지 이제 겨우 몇 개월이다. 유형기가 끝나자면 아직 멀었다. 유형기라는 걸 알았으니 이젠 더는 조바심을 내지도 않고, 차분히 기다릴 수 있겠다.
유형기에 대해 생각하다 문득, 지금은 나의 유형기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졸업 후 여기저기에 이력서를 뿌렸고, 황송하게도 입사를 허락한 한 회사에서 바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0년 회사생활을 끝내자마자 바투 이어 사교육업에 뛰어들었다. 일을 그만두는 것이 마치 삶에서 패배자가 되는 것 같은 불안감이 있었다. 방황할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첫 아이를 낳고는 어찌어찌 양가 어머니의 손을 빌리기도 하면서 육아와 일을 병행했다. 열한 살 터울 나는 둘째를 낳았을 때는 두 분 어머니도 연로하셔서 육아를 돕기엔 버거우셨다. 그리고 나 역시 점점 버거워졌다. 육아 때문이다, 일에 매달릴 수 없으니 이젠 정말 퇴장할 때다 스스로 그렇게 변명하면서 일을 정리했다. 쉬어야 할 이유로 충분해 보여서, 언제든 다시 할 수 있다는 마음에 홀가분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이젠 무언가를 벌인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럴만한 열정도, 체력도, 능력도 없다는 걸 깨닫게 되면서 어쩌면 그 퇴장이 나의 실패라고 인정하기 싫어 자꾸만 이 핑계 저 핑계 가져다 붙이며 나를 합리화한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회사에서도 학원에서도 버틸 수 없었던 게 사실이고, 그렇게 나는 나의 일들에 실패한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감당할 수 없는 열패감에 빠지곤 했다. 처음 일을 그만뒀을 때는 매일 출근하여 처리할 일이 없다는 것이 믿을 수 없이 황홀했는데, 그 생활이 계속되자 이런 열패감에 빠지는 시간이 잦아졌다.
그리고 시작되었다. 젊어서도 경험해보지 못한 방황의 시기가. 내 마음은 매일 요동쳤다. 안주에 대한 만족감이 들어찰 때는 고요했다. 하지만 직장에서 승승장구하는 친구, 학교에 남아 계속 공부하는 친구, 외국에 나가 다이내믹한 삶을 사는 친구, 애들 다 키워놓고 뒤늦게 출퇴근하는 삶으로 돌아간 친구들의 얘기를 들으면 고요하던 마음이 폭풍을 만난 듯 출렁거렸다. ‘나는 아무것도 되지 못했는데, 다들 무언가가 되었구나. 나는 아무것도 못 하고 있는데, 다들 무언가를 하고 있구나’ 이런 생각까지 드는 순간은 바닥까지 나를 비하했던 순간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회사에 다니던 시절에도 학원 일을 하던 시절에도 내가 뭔가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도, 무언가가 되었다는 성취감도 없었다. 끝없이 되풀이되는 일상에 늘 쫓기며 지쳐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분명 지나친 자기 비하였다.
출렁대는 마음이 잦아드는 순간은 내 마음이 무언가로 차오르는 순간이었다. 책을 읽고, 필사하고, 서평을 쓰는 시간엔 대체로 괜찮았다. 한국사와 세계사를 다시 공부하고, 미술사를 공부할 때는 배움의 희열을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요즘은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내가 처한 상황이 제법 괜찮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옆에서 돌보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여유가 고마웠다. 회사 다닐 때도, 학원을 할 때도 느껴보지 못한 기쁨이다.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공부를 하는 것이 주는 충족감. 그것이 비록 단 한 푼의 수입을 가져다주지 못하지만 허기졌던 마음이 채워지는 든든함이다. 여전히 흔들릴 때가 많지만 내 나름의 방법으로 중심을 잡으며 살아간다.
지금의 시간은 내 인생의 유형기다. 학창 시절, 사회생활 그리고 이제야 맞은 유형기. 이 유형기가 끝나고 펼쳐질 내 삶은 어떨까? 아니, 다지고 다지는 이 시간이 계속 지속되는 삶이라고 해도 괜찮다. 나는 매일 뿌리를 조금씩 조금씩 내리고 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이 시간을 보내느냐에 따라 매일 조금씩 성장하는 유형기(幼形期)가 될 수도, 감옥에 갇힌 듯 갑갑하기만 한 유형기(流形期)가 될 수도 있다.
세상 구경을 막 나온 연하디 연한 이파리들이 오후의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산들 부는 바람에 이파리들도, 나도 경쾌하게 몸을 움직여 본다. 마음의 뿌리는 내려야 가벼워지고, 몸은 움직여야 가벼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