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남다름이 버거웠다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 를 읽다가 문득

by 낮별

"학교 선생은 자기가 맡은 반에 한 명의 천재보다는

차라리 여러 명의 멍청이들이 들어오기를 바라게 마련이다."

헤르만 헤세의 자전적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는 독일 작은 시골 마을 출신 한스의 성장소설이다. 한스는 어려서부터 명석한 두뇌를 가진 뛰어난 학생이었고, 그 마을에서 유일하게 신학교 입학시험에 응시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다. 신학교에서 만난 하일너라는 친구와 특별한 교감을 하게 되는데, 하일너는 남다른 문학적 감수성을 지닌 천재다. 신학교의 보수적인 분위기와 교육이 하일너에게 맞을 리 없다. 아웃사이더처럼 밖으로만 돌며 수업에 비협조적인 하일너는 학교 선생들에게 문제아처럼 인식되고 만다. 너무나 독특한 하일너와 그런 하일너를 힘겨워하는 선생들을 보면서 나는 내 삶의 어떤 한때에 가닿았다.

아침 일찍 출근하여 야근을 밥 먹듯 하는 회사 생활은 아이를 키우면서 하기에는 무리였다. 10년 회사 생활을 마감하고 방향을 완전히 틀어 사교육 업계로 뛰어든 건, 그런 이유였다. 전공이 영어였고, 회사에서 영어로 밥 벌어먹고 살았다는 경력 하나 믿고 초중등이 타깃인 작은 영어 학원을 오픈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땐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일을 벌였을까, 과거의 나의 결단력과 실행력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삼십 대 젊음이 담보였고, 무모함이 밑천이었다. 즐겁고 보람된 순간도 많았지만, 견디기 힘든 순간도 무수했다. 하지만 무슨 일을 하면 10년은 해봐야지 하는 고집으로 10년을 버텼다.

학원을 하며 많은 아이들을 만났다. 배우고 싶은 의지로 눈빛이 반짝이는 아이도 있었지만, 엄마가 가라니까 마지못해 끌려와 눈에 빛을 잃고 앉아만 있는 아이도 있었다. 고백하건대, 가장 감당하기 힘들었던 아이는 의욕 없이 눈에 빛을 잃고 앉아만 있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런 아이는 최소한 조용하긴 해서 수업에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가장 감당하기 힘들었던 아이는 쓸데없이 말이 많은 아이였다. 그 아이는 수업 흐름에 맞지 않는 질문을 던져 흐름을 끊어놓고, 분위기를 산만하게 했다. 아무리 질문을 자제하라고 해도 자제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런 질문은 늘 수업과는 관계없는 이야기이기 일쑤였다. 질문 하나쯤에는 응대를 해준다 치더라도 그 아이의 질문은 끝없이 이어졌다. “선생님은 왜 영어 선생님이 되었어요?”, “영어는 왜 배워야 해요?” 이런 질문부터 시작해서 “선생님 일하면 애는 누가 봐요?”, “선생님, 학원 하면 돈 많이 벌어요?”, “선생님 남편은 뭐 하는 사람이에요?” 이런 질문까지 이어진다. 그야말로 호기심 천국이다.

<수레바퀴 아래서>의 하일너는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시를 비롯한 문학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하일너를 감당하기 힘겨워하는 학교 선생들을 보면서 호기심 천국이었던 그 아이가 떠올랐다. 그 아이는 영어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 대신 세상일에, 사람들에게 엄청난 관심을 가진 아이였다. 그리고 그 아이가 가진 또 하나의 강점이자 관심사는 수학이었다. “저는 수학이 제일 좋아요. 예외가 없으니까요. 영어는 왜 이렇게 예외가 많아요? 영어 진짜 짜증 나요. 제일 즐거운 시간은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 때예요.” 이런 말로 수학을 배운 이래 수포자였던 나를 완전히 주눅 들게 하기도 했다.

어린이 독서 강사가 쓴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을 때도 그 아이가 떠올랐었다. 그 아이의 무수한 질문들을 묵살하고 시키는 과제나 해 오라고 면박만 주던 내가 떠올라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내가 학원을 시작했던 해 5학년이었던 그 아이는 5년을 내 옆에 붙어 앉아 질문을 퍼붓고, 구박받고, 또 질문하고, 구박받았다. 고등학교에 가서도 학원을 옮길 낌새가 보이지 않아 어머님과 상담하여 그 아이를 내보기에 이르렀다. 그 아이가 학원을 관뒀을 때 날아갈 것 같은 홀가분함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그 정도로 감당하기 힘들었던 아이였다.


그런데, 그 아이가 했던 질문들을 떠올려보면 수업을 방해하겠다는 저의보다는 진심으로 내게 인간적인 관심을 가졌었구나 싶다. 그 아이가 가진 호기심들에 진저리 치지 않고 그 질문들을 하나씩 대화로 엮어 나갈 수 있었다면, 어쩌면 아주 특별한 인간적 교류를 이뤄낼 수도 있었겠구나 싶기도 하다. 나도 독서 선생이었다면 말이다. 불행히도 나는 영어 선생이었다.

여러모로 인상적이었던 그 아이는 내가 살던 아파트 바로 앞 동에 살았다. 그래서 그 아이가 학원을 관둔 후에도 잊을만하면 한 번씩 마주치곤 했다. 볼 때마다 놀랐다. 점점 키가 쑥쑥 자랐고, 멀끔한 청년이 되어갔다. 어느 날엔 대학에 진학한다고 해서 놀랐고, 수학교육학과를 선택했다고 해서 당연히 그래야지 싶었다. 어느 날엔 자신이 나온 모교에 가서 후배들 멘토가 돼준다며 잔뜩 상기된 얼굴로 말하기도 했다. 어느 날엔 운동하다 다쳤다면서 통깁스에 목발을 짚고 나타나기도 했다. 어느 날엔 그때 다친 다리 때문에 군대가 면제되었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더니 또 어느 날엔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한다고 해서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했다. 쭉 학교에 남아 박사과정까지 할 거라고 웃었다. 나에게는 미지의 세계인 수학이라는 학문에 푹 빠진 아름다운 청년이 되었다.

다시 그런 아이를 맡아 가르친다고 한들, 그때보다 내가 더 인내심이 늘었다거나, 호기심 천국인 아이를 다룰 스킬이 늘었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여전히 나는 고분고분하고 말 잘 듣는 아이들이 편하다. 다만, 어딘지 모르게 특이해서 가르치는 사람이 버겁다 싶은 아이, 그 아이는 어쩌면 자신만의 세계가 구축돼 있는 아주 특별한 아이일 수도 있으니 어느 정도는 경외심을 가지고 그 아이를 바라볼 것 같다. 요즘은 아이가 별나서 힘들다는 얘기를 들으면 그저 웃음이 나온다. 그 별남이 특별함일 수 있다는 걸 알아서다. 남다르게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세상은 앞으로 나아가고 발전하는 것일 테니까. 다 고분고분하고 말 잘 듣기만 해서는 무슨 변화가 생기겠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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