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는 희망이 '악'이라지만...
야구 경기를 보고 있었다. 내가 응원하는 팀이 지고 있었다. 점수를 낼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살리지 못하고 연거푸 이닝이 끝났다. 대략 이런 식이다. 투아웃에서 안타를 치고 타자가 살아나간다. 뒤이은 타자도 안타나 볼넷으로 살아나간다. 투아웃 상황이라 불안 불안하면서도 내심 희망이 다시 살아난다. 드디어 투아웃 만루에 이르렀다. 희망은 이제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오른다. 그 순간 무기력한 삼진아웃, 땅볼아웃, 뜬공아웃으로 이닝이 끝난다. 잔뜩 부풀어 올랐던 희망이 피슈~~웅 맥없이 쪼그라든다. 잔루 만루는 보고 있기 힘겹다. 이게 계속되었다. 희망고문도 이런 희망고문이 없다.
상대팀은 사직이 떠나가라 축제 분위기였다. 얼른 중계를 꺼버렸다. 다른 어떤 패배보다 쓰라렸다. 차라리 희망고문이나 하지 말지. 왜 투아웃에서 자꾸 안타를 맞아 타자를 살려 내보내는 건가? 이게 혹시 전략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우리 팀의 전력과 열정을 꺾어놓으려고 계산된 고도의 심리적 전략이 아닐까? 희망이 잔뜩 부풀어 있는 상태에서의 좌절은 재기불능으로 사람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롯데가 상대팀으로 하여금 가장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줬다가 빼앗아 버리는 그런 고도의 심리적 전략을 구사할 만큼 강팀이 된 건 아닐 텐데 여러 이닝 이런 식이 반복되다 보니 별게 다 의심스러워졌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에는 F 이야기가 나온다. F는 아우슈비츠에 수감 중인 유대인이었다. 그는 수감자들에게 3월 30일에는 전쟁이 끝날 거라고, 우리 모두 자유의 몸이 될 거라고, 하느님의 예언을 들었다고 말했다. F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3월 30일이 점점 다가오면서 그는 시름시름 아프기 시작했고 3월 31일에 사망했다. 빅터 프랭클은 이 사건을 목격했고, 나중에 성탄절과 새해 무렵의 일주일간의 수감자 사망률이 급격히 증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성탄절 무렵에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사라져 버림에 따라 절망감으로 무너져 내린 것이다. 절망감으로 무너져버린 마음과 함께 신체의 저항력과 면역력도 뚝 떨어져 버린다.
그렇다면 희망은 마음에 품기에 해로운 것일까? 별다른 희망이 없는 사람들은 좌절감을 맛보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니체는 희망이야말로 '최후의 악'이라고 한 걸까? 그는 악 중에서도 최악의 악이 희망이라고 했다. 희망은 고통을 끝없이 연장하기 때문이다. 희망의 해로움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이것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그리고 바람직한 사유의 흐름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희망을 긍정적으로 그려낸 단편소설 한 편을 불러내었다.
셔우드 앤더슨의 <달걀>이라는 단편소설이 있다. 미국 중서부 농촌에서 양계업을 시작한 한 남자의 실패와 좌절을 다룬 소설이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부터 꿈을 꾸고 늘 새로운 아이디어를 시도하지만 번번이 실패하는 삶을 살아왔다. 작품의 종결부에서 표현된 ‘달걀의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승리’는 이야기의 흐름으로 봐서는 부모님이 결혼하고 아들을 낳은 후 갖게 된 소시민적인 야망으로 시작된 양계 사업과 식당 사업과 같은 생업에서 계속된 쓰디쓴 실패를 의미하는 듯하다. 화자의 부모님에게는 양계 사업의 실패, 달걀로 식당 손님을 즐겁게 하고자 했던 아버지의 좌절 즉, 아버지와 ‘달걀’의 대결 구도에서 ‘달걀’의 승리로 읽힐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은 다소 피상적이다.
이 글에서 ‘달걀’은 이 가족의 생계의 수단이기도 하고, 희망이기도 하고, 열정이기도 하다. 아이가 생기면서 경제적으로 성공하고자 하는 꿈은 특별한 꿈이 아니다. 지극히 평범한 소시민적인 사람일 뿐이다. 열심히 노력하고, 성실하게 일을 하지만 성공은 쉽지 않다. 이 가족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이 겪는 일이다. 운이 지독하게도 따라주지 않는 경우도 있고, 이 작품의 아버지처럼 사업수완이 없으면서도 사업을 하는 경우는 더욱 쉽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 가족에게 패배감을 맛보게 한 ‘달걀’은 깨어지기 쉬운 부질없는 희망, 과도한 열정이다. 가난한 이들에게는 이 희망과 열정은 더욱 절박하다. 그 절박함이 절망감의 낙폭을 더욱 크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부질없어 보이는 희망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은 살아있는 한 끝끝내 희망을 부여잡고 산다. 당장이라도 던져버릴 것처럼 흥분된 상태로 달걀을 가지고 이 층으로 올라온 아버지가 침실 테이블에 조용히 달걀을 놓고서 어머니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눈 후 잠자리에 든 장면이 인상적인 것은 그것이 여전히 희망을 버리지 않았음을, 상처받은 영혼에 회복의 시간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보통의 사람들이 그렇게 고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가족에게 위로받고, 잠으로 재충전하여, 새로운 날을 맞이한다.
이 작품이 발표된 시기는 1920년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쟁특수를 누리며 미국의 경제가 초호황을 맞이하기 시작했던 시기였다. 수많은 외국인이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향했을 뿐만 아니라 내국인들 역시 성공에 대한 꿈으로 한창 들떠 있었을 무렵이다. 성공할 기회도 많았고 그만큼 좌절할 기회도 많았을 것이다. 그런 시기였으니 이 작품 속 가족의 좌절이 비단 그들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이 전에 없던 꿈을 꾸고, 때로는 그 꿈에 좌절하며 세상살이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님을 절실히 느꼈음에 틀림없다. 세상살이가 녹록하지 않음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니 이 가족의 좌절은 여전히 공감을 자아낸다.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여전히 달걀이 던져준 문제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는 화자의 고백, 즉 ‘달걀의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승리’ 임을 또렷이 인식하고 있음은 부모님이 달걀로 인해 경험했던 꿈과 좌절을 이해하고 화자 역시 다른 도리 없이 꿈과 좌절을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음을 고백한 것으로 보인다. 가령 화자를 작가 자신이라고 봤을 때 ‘달걀’을 대신할 수 있는 구체적 대상이 ‘글’이 될 수도 있다. 작가 자신도 자신이 정복하고자 하는 ‘글’에 의해 비슷한 배신감 혹은 패배감을 맛보았기 때문에 아버지를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필사적인 노력으로 정복하고자 하는 그 대상은 정복의 대상으로 볼 것이 아니라 그냥 그 자체로 바라보는 편이 옳은지도 모른다. 삶이란 것이 정복의 대상이 아니듯 말이다.
결국, 이 작품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꿈을 꾸고, 좌절하더라도 다시 꿈을 꾸는 일의 반복은 필연적이라는 의미를 보여준다. 닭이 달걀을 낳고, 그 달걀이 닭이 되는, 닭과 달걀의 순환처럼 말이다. 그 꿈이 달걀처럼 깨어지기 쉬운 것일 수도 있고, 꿈이 이루어졌다 생각한 순간조차도 링컨과 가필드 대통령의 운명처럼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릴 수도 있고, 어떠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응답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우리는 희망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꿈을 꾼다. 그렇다면 ‘달걀의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승리’란 다름 아닌, 어떤 상황에서도 다시 살아나는 희망의 승리인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가 보여주는 끝내 꺾이지 않는 희망의 승리, 이것이 보통 사람들의 희망에 대한 기대이다. 삶이 계속되는 한 희망이 있어야 한다. 비록 때로는 좌절된 희망으로 인해 절망감을 느끼고 불행해지더라도 희망이 사라지는 순간, 삶의 의지도 사그라들 수밖에 없다. 다만 부질없는 희망에 대한 과도한 열정을 조심해야 한다. 부질없음과 과도함의 기준이 문제긴 하다. 분명한 건 빅터 프랭클의 F의 희망은 비합리적이고 부질없었다.
어제의 경기가 맥 빠지는 패배였지만 오늘 또 응원할 수밖에 없다.
밤새 달콤한 잠으로 재충전하여 새로운 날을 맞이하였으니.
니체는 잠을 통 이룰 수 없어서 새로운 날이, 희망이 그토록 버겁게 느껴졌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