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활보다
지나는 오드리와 동갑이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동갑내기를 만나면 반갑다. 활보와 이용인으로 만나니 더 각별하게 여겨졌다. 두 사람은 담당자를 사이에 두고 오랜만에 만난 동창처럼 수다를 떨었다. 지나가 '조현병'이라 저어했던 사실도 잊어버릴 만큼 오드리는 마음이 풀어졌다. 미팅 전날까지도 오드리는 '조현병'이란 말 자체에 졸아있었다. 하필 그 무렵에 조현병 환자가 저지른 강력 사건들이 뉴스를 도배하고 있었다. 지나네 집까지 가는 차 안에서 오드리가 그런 불안감을 토로하자 담당자는 여차하면 밖으로 뛰쳐나오라고 했다. 해결책이랍시고 해준 그 말이 더 공포스러웠다.
걱정과 달리 지나의 첫인상은 엄살이 심한 아줌마 정도로 평범해 보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꽁꽁 싸매고 있다는 점이 좀 특이하긴 했다. 지나는 뜨개모자를 쓰고 목도리에 패딩 점퍼, 어그부츠까지 신고 있었다. 집이 추워서 그럴 수도 있고 방문객을 맞으려고 차려입었을 수도 있다. 지나는 담당자와 오드리를 붙들고 하소연을 시작했다. 십 년 전 교통사고를 당하고부터 이 고통이 시작되었다, 매일 이십사 시간 통증에 시달린다, 완치도 없고 온갖 약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잠 한 번 푹 자보면 소원이 없겠다 등등. 그 소리는 그 뒤로도 오드리가 매일 듣는 레퍼토리가 되었다.
"그래서 주민센터에 갔더니 활보 제도를 이용할 수 있다고 해서 신청한 거예요. 제가 몸이 아파서 집안일을 전혀 못하거든요."
오드리는 집 내부를 눈으로 훑었다. 방 두 개에 화장실 하나, 주방과 거실은 바닥이 시멘트로 돼있어 신발을 신고 생활하는 구조였다. 방에 들어갈 때만 신발을 벗었다. 몇 년 전에 침수 피해를 당해 나라에서 올 수리를 해준 게 그나마 그 상태였다. 지하라 어둡고 음습한 기운이 있지만 청소와 정리정돈을 잘하면 나아질 것이다. 오드리는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이 앉아있는 식탁은 현관문 왼쪽으로 곧장 꺾인 벽에 면해 있었고, 그 벽에는 크고 작은 사진 액자들이 걸려 있었다. 아가씨 때의 지나, 남편과 사귈 때 사진, 딸의 돌 사진, 친정엄마와 찍은 사진들이 과거의 행복을 말해주고 있었다. 지나는 인력사무소 경리로 일할 때 남편을 만났다. 오십이 넘도록 노총각 신세를 면치 못한 남편은 매일 아침 지나에게 자판기 커피를 뽑아주고 갔다. 몇 달 동안 말도 한 번 못 붙이고 커피만 주고 갔다. 보다 못해 지나가 먼저 데이트를 하자고 했다. 남편은 목수 기술도 있고 성실했다. 딸이 태어났을 때는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딸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에는 지나도 남편을 따라 현장일을 나갔다. 그리고 십 년 전 새벽 출근길에 빙판길 교통사고로 모든 게 끝이 났다, 고 지나는 자신의 역사를 술술 털어놓았다.
출근은 오후 두 시로 정해졌다. 지나가 밤새 뒤척이다 오전에 잠들어 깨어나는 시간이 그즈음이라고 그때 오라고 했다. 다음날 정확하게 두 시에 문을 두드렸는데 남편이 나왔다. 지나의 남편은 지나보다 스무 살이 많았다. 보육원에서 자랐다는 말을 들어서인지 지나와는 또 다른 결핍과 슬픔이 느껴졌다. 남편 역시 교통사고로 힘을 못쓰게 되어 목수일을 놓아야 했다. 나이 먹고 일을 안 하니 남편은 순식간에 늙어버렸고 딸은 손녀로 보였다. 오드리와 제대로 말을 주고받은 적도 없었다. 그저 문을 열어주거나 밖에 나갈 때 스치는 정도였다. 첫 출근날 역시 지나가 아직 자고 있다는 말만 하고 남편은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오드리는 멀뚱히 서 있다가 식탁 의자를 빼서 앉았다.
이십여 분쯤 흐른 뒤에야 지나가 비실비실 나왔다. 어제 입은 옷 그대로에 집에서 대충 자른 것 같은 커트 머리가 삐죽삐죽 치솟아 있다. 지나는 지난밤 잠을 못 잤다고 죽는 줄 알았다고 어제와 같은 하소연을 또 한참 늘어놓았다. 오드리는 전기주전자에 물을 받아 올렸다. 식탁은 약병과 약봉지, 컵라면, 믹스커피, 종이컵 등 온갖 잡동사니가 차지하고 있어 4인용임에도 쓸 공간이 없었다. 믹스커피 탄 종이컵 두 개를 놓으려면 물건들을 대충 밀쳐야 했다. 세 식구 사용하기에 좁지 않나 했는데 나중에 이해가 된다. 그들은 셋이서 같이 밥을 먹는 일이 없었다. 세끼 식사의 개념이 없이 각자 배고플 때 알아서 해결하는 식이었다.
오드리는 믹스커피를 끊은 지 오래됐지만 지나가 달고 산다는 말에 같이 마셨다. 마시면서 청소를 어떻게 할지 의논했다. 청소 도구는 뭐가 있으며 어떤 식으로 청소하는지. 지나는 청소기가 있긴 한데 여기는 지하라서 사용하면 안 된다고 했다. 청소기가 우선 눈앞의 먼지는 빨아들이는 것 같지만 미세먼지는 도로 내뿜으니까 더 안 좋다는 말이었다. 그러면서 구석에 처박혀 있는 먼지 쌓인 유선청소기를 보여주었다. 오래전 모델이라 고장이 났거나 작동이 된다 해도 효과는 없을 것 같았다. 요즘 나오는 청소기는 필터가 잘 돼 있어 괜찮다고 하면 새로 사라는 말이 될 것 같아 오드리는 그냥 알았다고 했다. 빗자루와 밀대 걸레만으로 청소를 하는 건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다.
빗자루 위치를 알려주려고 지나는 안방 외의 다른 방 문을 열었는데 오드리는 거기서 거대한 옷 무덤을 보았다. 청소 도구와 쌀이나 휴지, 라면 등 지원받은 물품들은 입구 쪽에 봉지나 박스 그대로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고, 그 뒤쪽으로는 엄청난 양의 옷들이 천정까지 쌓여있었다. 제일 안쪽에 서랍장이나 행거도 있는 걸로 보아 몇 년에 걸쳐 서서히 진행되다 포화상태에 이른 것 같았다. 멀쩡한 방이 창고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정작 고등학생 딸은 자기 방도 없이 안방에서 부모와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그 안방조차 각자의 침대 말고는 자유로운 공간이 없었다.
오드리가 청소를 하는 동안 지나는 커피 한 잔이 다인 빈속에 연신 담배를 피워댔다. 맨 안쪽에 위치한 거실은 흡연실이었다. 지상이 빼꼼 보이는 손바닥만 한 창문에 환풍기가 달려있었다. 남편이 음악을 좋아해 평생 모은 레코드판과 카세트테이프가 벽 한쪽을 가득 채웠고, 낡은 전축과 카세트 라디오, 스피커 등도 골동품처럼 맞은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침수로 대부분 고장이 나버렸고 작동되는 건 카세트 라디오뿐이었다. 어디서 주워온 것 같은 휴게소 탁자 위에는 재떨이와 라이터가 놓여 있었다. 부부만의 공간이라는 듯 의자 두 개가 나란히 붙어있었다. 부부는 골초였다. 둘이 밥은 안 먹어도 담배는 달고 살았다. 담배를 피울 때만큼은 잠시나마 통증을 잊을 수 있다고 했다. 두 사람은 교대로 들락거리기도 하고 함께 피기도 했다. 겨울임에도 환기 때문에 선풍기를 계속 틀어놓았으나 효과는 별로 없었다. 기본적으로 공기가 순환될 구조가 아니었다. 담배연기는 고스란히 지하 구석구석에 스며들었다. 그들은 담배를 피우며 음악을 들었다. 화장실 바닥을 닦으면서 '라스트 크리스마스'를 들은 오드리는 저도 모르게 음악이 너무 좋다고 외쳤고, 지나는 그래요? 그럼 크게 틀어줄게요, 하며 볼륨을 높여주었다. 그 순간은 지금도 벅찬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한 번은 남편이 약국에 간 사이 오드리는 지나한테 안방을 청소하자고 했다. 지나는 마지못해 안방을 개방했다. 안방은 침대 두 개와 이부자리로 꽉 차 있었다. 침대는 각각 지나와 딸이 쓰고 남편은 바닥에 요를 깔고 지냈다. 남편의 자리는 티브이 바로 옆이었다. 딸은 혼자 폰을 보고 가운데 침대를 쓰는 지나는 머리가 아파 아무것도 안 봤다. 안방에도 작은 창문이 있었지만 도로와 면해 있어 한 번도 열린 적 없이 시커멓게 변해 있다. 방 가장자리에는 책상과 의자가 있었다. 책상은 원래 딸이 쓸 목적으로 들인 것 같은데 온갖 물건들이 켜켜이 쌓여 뭐 하나만 잘못 건드려도 다 무너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바퀴 달린 묵직한 의자에는 옷들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 오드리는 지나한테 그걸 좀 정리해도 되는지 물었다. 지나는 네, 근데 어떻게 정리하실 거예요? 했다. "빨 거는 빨고 당장 안 입을 것들은 개서 놔둬야죠." 오드리는 상식선에서 대답했다. 그게 별 의미 없는 일이라는 건 곧 깨닫게 된다. 옷으로 이루어진 산의 꼭대기에는 가장 최근에 입은 점퍼나 외투가 있었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가을 스웨터나 운동복 바지, 제일 밑에는 지난여름에 입었을 반바지며 민소매 등이 숨도 못 쉬고 찌그러져 있었다. 몇 번 입다가 계절이 지나면 그걸 치우지 않고 그 위에 다른 옷을 포개는 식으로 쌓인 것이었다. 그 많은 옷을 지탱하고 있는 의자가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옷을 만질 때마다 먼지가 들썩거리고 쿰쿰한 냄새가 진동했다. 오드리는 꼭 마스크를 준비해야겠다고 다짐했지만 지나가 무안할까 봐 한 번도 착용하지는 않았다. 지나는 펼쳐놓은 옷 중 하나를 집어 아 이게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 있었네, 했다. 옷이 궁금해도 뒤져서 찾아볼 생각은 안 한다는 말이었다.
오드리는 일단 옷을 개서 한쪽으로 차곡차곡 쌓았다. 따로 넣어둘 옷장이 없으니 개 놓은 그대로 두어야 했다. 지나가 말한 어떻게 정리할 거냐는 말이 그제야 이해되었다. 그렇게 개서 쌓아두나 의자에 걸쳐서 두나 달라질 건 없었다. 버려야 해결될 일이고, 버려도 아무 지장이 없는 옷들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옷을 매일 갈아입지 않는다. 외출도 안 하고 옷차림에 관심도 없으니 아무 옷이나 두세 벌이면 충분하다. 쌓여있는 옷들까지 뒤져서 입을 일이 애초에 없는 것이다. 패기 있게 시작했던 옷정리에서 무력감을 맛본 오드리는 이불 먼지를 털려니 엄두가 안 났다. 춥다고 현관문 여는 것조차 지나는 반대 했다. 연다고 별 효과가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방에서 털면 그 먼지가 그대로 가라앉을 것이다. 할 수 없이 오드리는 세탁을 언제 했는지 모를 눅눅한 이불을 들고 화장실을 오가며 하나하나 털었다. 겨울이불이라 무거웠고 그런 식으로 터는 흉내만 내는 건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니 팔이 더 아팠다. 안방은 침대와 이불로 꽉꽉 들어차 빗자루로 쓸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지나 말대로 물티슈로 먼지만 슥슥 훔쳐내는 게 최선이었다. 그마저도 남편이 오기 전에 얼른 해야 했다.
안방 의자에만 있던 옷들도 그 지경인데 다른 옷방에 쌓여있는 옷들은 지나가 결단을 내리지 않는 한 손댈 영역이 아니었다. 몽땅 내다 버려야 해결될 일이었다. 옷은 대부분 어디서 얻어왔거나 남들이 입으라고 준 것들이라 의류수거함에 들어갈 수준의 옷들이었다. 오드리가 눈에 띄는 대로 몇 개 골라 이런 건 버리는 게 어떠냐고 하자 지나는 펄쩍 뛰었다. 딸이 어렸을 때 입던 원피스는 추억 때문에 못 버리고, 지나가 아가씨 때 입었던 민소매 티셔츠는 살 빠지면 입을 거라며 못 버린다 했다. 오드리는 정말 누가 봐도 못 입을 찢어진 팬티나 심하게 오염된 흰 티셔츠 같은 걸 골라 다시 버리자고 했고, 지나는 마지못해 몇 개는 버리고 몇 개는 도로 쑤셔 박았다. 못마땅해하는 지나의 표정을 보며 오드리는 더 이상 옷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안방과 옷방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니 청소 구간은 주방과 거실, 화장실로 좁혀졌다. 지나는 변기 테두리 백시멘트의 누렇게 변색된 부분을 지워달라고 특별히 요구했다. 그건 백시멘트를 깨서 없애고 다시 바르지 않는 한 없애기 힘든 오염이었다. 그럼에도 오드리는 락스를 들이붓기도 하고 세제를 뿌려뒀다 솔질을 하기도 하는 등 하는 데까지는 해봤다. 화장실은 그냥 깨끗하기만 하면 될 거 같고 정말 중요한 건 옷정리와 흡연 문제 같은데 지나는 생각이 달랐다. 오드리 생각이 아무리 옳아도 이용인이 싫다 하면 어쩔 수 없다. 주방도 녹슨 철제 선반의 묵은 때나 가스레인지는 철수세미로 닦으면 되지만, 한번 들어가면 나올 일이 없는 냉장고는 오드리의 손길을 거부했다. 싱크대 상부장 하부장에 꽉꽉 들어찬 살림살이 역시 지나는 손도 못 대게 했다. 지나는 컨디션이 좋으면 오드리를 붙들고 똑같은 레퍼토리를 늘어놓았고 두통이 심할 때는 그만 가라고 했다.
딸은 엄마를 닮아 키가 작았는데 덩치는 고도비만 수준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식품꾸러미가 지원돼 오는데 대부분 인스턴트식품이다. 딸은 컵밥이나 컵라면 같은 걸 먹고 빈 용기는 차곡차곡 쌓아두는데, 그 높이가 세탁기 키를 따라잡으려 하고 있었다. 냉장고에는 냉동만두나 동그랑땡, 아이스크림, 콜라 같은 것들이 가득했다. 배달 주기를 먹는 속도가 따라가지 못하니 발등 찍힐까 봐 냉장고 문을 열기가 겁날 지경이다. 한 달에 한포씩 지급되는 쌀도 몇 포나 쌓여 있었다. 부모가 제대로 된 식사를 안 하니 딸은 학교 급식과 인스턴트만으로 허기를 채운다. 딸은 앞머리가 길어 눈도 안 보였고 살에 파묻혀 목선도 안 보였다. 성격도 제 아빠를 닮아 말도 없고 폐쇄적이었다. 어쩌다 오드리와 마주쳐도 그냥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자기 침대에 누워 폰만 보았다. 남편도 자기 자리에 누워 티브이만 보았다. 지나도 종일 누워 있었을 건데 오드리가 올 때만 거실로 나와 앉아있었다. 어찌해 볼 수도 없는 체념과 무기력이 그들 가족을 지배하고 있었다.
지나의 하루는 많이 아플 때와 조금 덜 아플 때로 나뉘었다. 통증이 가장 심해지는 밤은 지나에게 지옥이었다. 밤새 뒤척이다가 날이 샐 때쯤이면 수면제 효과와 함께 지칠 대로 지친 눈을 겨우 감았다. 지나는 딸이 학교 가는 것도 못 보고 오전 내내 기절하듯 잤다. 그러다 오드리가 출근하면 억지로 깨어났다. 그때부터 오드리가 일하는 동안 잠을 깨고 정신을 차리기 위해 지나는 빈속에 믹스커피를 몇 잔이고 들이붓고 수시로 담배를 폈다. 지나가 유일하게 신경 쓰는 집안일은 딸의 교복을 빠는 일이었다. 딸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무조건 세탁기를 돌렸다. 다른 옷가지나 수건과 함께 돌릴 때도 있지만 대개는 달랑 교복만 넣은 채 하염없이 세탁기가 돌아가는 걸 보고 앉아 있었다. 모녀 사이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서로 말을 안 하니 부딪힐 일도 없었다.
지나는 십 년 전의 교통사고가 자기 인생을 다 망쳤다고 믿고 있었다. 차라리 어디 팔다리가 하나 없어지고 말았으면 좋았을 거라고도 했다. 뚜렷한 병명도 없으면서 만성적인 사고 후유증에 시달리는 것만큼 억울한 일도 없다고 했다. 실제로 지나가 호소한 통증은 두통, 눈의 피로, 팔다리 저림, 허리 통증, 발바닥 통증 등 온몸에 다 해당되었다. 통증 때문에 걷는 게 힘들어 산책이나 운동도 못하고 결국 악순환이다. 오죽하면 쓰레기 내놓을 때 잠깐 나가는 것이 외출의 전부였다. 그마저도 오드리가 해주게 되면 나갈 일은 더 없어진다. 남편은 마을 아래에 있는 약국에 가는 게 장거리 외출이었다. 지나는 정기적으로 먹는 조현병 약 말고도 수시로 진통제, 수면제, 소화제, 파스 등을 필요로 했고 그때마다 남편이 사 날랐다.
스물네 시간 약에 의존하다 보니 몸도 정신도 늘 몽롱한 상태이고 말도 어눌하다. 오드리는 지나를 보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통증의 무서움을 알았다. 조현병은 오히려 이 순위로 밀려난 셈이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새해를 맞이했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문자가 와 있었다. 지나였다. 딱 한 줄 적혀 있었다. [내일부터 오지 마세요.] 시각을 보니 전날 밤 열한 시 반쯤에 보낸 거였다. 오드리가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지나는 그런 문자를 날리고 있었던 것이다. 황당했다. 전날 퇴근할 때까지도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새해 복 많이 받으라며 서로 인사도 나누었다. 오드리는 황당한 심정을 주체할 길이 없어 손에 닿는 대로 물건을 치우며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 그 상황이 분명한 사실이라는 자각이 들자 어이가 없으면서 한편으론 소름이 돋았다. 웃으며 칼을 꽂는 사이코를 만난 기분이었다. 공포가 온몸을 휘감았다. 다시 몇 분간 마음을 다잡은 뒤 오드리는 지나한테 전화를 했다. 지나는 "아 왜요?" 하며 짜증스럽게 받았다. 잠이 잔뜩 묻은 목소리였다. "지나 씨, 잠을 깨웠다면 미안해요. 근데 이게 무슨 말이에요?" "아이 참 글자 못 읽어요? 내일부터 아니 오늘부터 오지 말라고요!" "갑자기 왜 그러세요?" "이유는 묻지 마세요!" 지나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고 더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오드리는 당장 지나의 집으로 달려갔다. 밤새 눈이 소복하게 쌓여있었다. 지하계단을 내려가려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날따라 계단이 더 깊어 보였다. 지나네는 초인종이 없어서 주먹으로 두드려야 했다. 쾅쾅쾅 세 번 두드리고 기다렸다. 기척이 없어 다시 두드렸다. 남편이 문을 열었다. 그는 자기 부인은 한번 결심하면 바꿀 수 없다고 말했다. "아니 그러니까 왜 갑자기 그런 결정을 하게 됐냐고요. 어제까지 별 문제없었잖아요." 오드리는 남편이 자기 말만 하고 문을 닫아버릴 것 같아 문 손잡이를 잡고 물었다. "저 사람이 냄새에 민감한데, 더는 못 참겠나 봐요." 그 말에 오드리는 두 번째로 뒤통수를 얻어맞는 것 같았다.
냄새로 치자면 오드리가 더 할 말이 많았다. 지하의 무겁고 눅눅한 공기, 퀴퀴한 곰팡이 냄새, 락스를 쏟아부어도 올라오는 하수구 냄새, 옷무덤에서 뿜어 나오는 먼지와 케케묵은 냄새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다 합친 것보다 최악은 찌들 대로 찌든 담배 냄새였다. 담뱃진으로 얼룩진 벽지에서도 고약한 냄새가 난다는 것을 이번에 알았다. 그들 가족이 옷을 언제 갈아입는지는 몰라도 볼 때마다 같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냄새는 또 어떤가. 그럼에도 오드리는 티를 내지 않았고 행여 자기도 모르게 표정에 나타날까 봐 신경을 썼다. 그랬는데 오드리 자신이 냄새 때문에 잘릴 줄은 몰랐다.
물론 본인들의 냄새는 익숙하고 오드리는 외부에서 들어온 새로운 냄새이니 거슬릴 수도 있다. 그러면 미리 말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대하다가 한 달을 채우자마자 그런 문자를 보내다니, 그 기계적인 일처리에 다시 소름이 돋았다. 냄새가 나서 싫다는데 더 뭐라고 할 것인가. 오드리는 알았다고 하고 돌아섰다.
지나의 집은 언덕 위에 있었다. 눈 쌓인 길은 바퀴 자국과 발자국이 뒤엉킨 채로 얼어붙었다. 오드리는 목도리로 얼굴을 감싸며 한발 한발 천천히 내디뎠다. 뒤에 누가 오는 기척이 나서 돌아보니 지나의 딸이었다. 여덟 시가 넘었으니 학교에 갈 시간이다. 딸과 얘기를 나눠본 적은 없었다. 오드리가 먼저 인사를 건네도 딸은 고개를 까딱 숙이는 둥 마는 둥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중요한 시기에 우울한 환경에서 자라는 딸이 짠했다. 오드리가 예상하는 딸의 미래는 어두웠다. 그나마 지금은 학교라도 가지만 졸업하면 딸은 바로 은둔상태에 돌입할 것이다. 더러운 침대가 세상의 전부가 될 것이다. 살은 더 찔 것이고 무표정한 얼굴은 더 이상 아무런 감정도 담지 못할 것이다.
오드리는 걸음을 멈추고 딸을 기다렸다. 딸은 오드리를 그냥 지나쳐갔다. "학교 가니?" 오드리가 말을 걸어도 제 갈 길만 간다.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 오드리는 종종걸음으로 딸과 보폭을 맞추며 이제 일을 그만하게 되었다, 너랑도 친해지고 싶었는데 아쉽다, 아픈 엄마 아빠 잘 보살피고 너도 잘 있어라 뭐 그런 얘기들을 두서없이 떠들었다. 버스정류장이 저만치 가까워졌다.
버스정류장에는 딸과 같은 교복차림의 아이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까지 오드리 말에 한 마디 대꾸도 없던 딸이 힐끔 뒤돌아보며 말했다. "아줌마, 입 닥치고 그만 떨어져요. 활보 주제에 오지랖 쩌네 정말." 저음의 굵은 목소리가 잘 벼린 칼 같았다. 오드리는 그 자리에서 얼음이 돼 버렸다. 찐따인 줄 알았는데, 완벽한 일진 포스였다. 딸은 삼삼오오 모인 무리 사이에 홀로 서 있었지만 전혀 위축돼 보이지 않았다. 오드리는 딸이 버스를 타고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움직일 수 있었다. 오드리는 다음 버스를 기다리며 제자리걸음을 했다. 발이 시린데도 입에선 히죽히죽 웃음이 났다. 기분이 나쁘긴커녕 안도감이 오드리를 포근하게 감쌌다. 저 정도면 학교건 어디서건 억울한 일은 당하지 않을 것이다. 지나네 일을 그만둔다고 생각하자 어이없게도 딸이 가장 눈에 밟혔는데 이제는 마음이 편했다.
나중에 담당자를 통해 들으니 지나는 외부인이 자기 집에 매일 출입한다는 것 자체로 이미 감당 못할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하루 중 상태가 비교적 괜찮은 시간대에 잠깐 보는 것임에도 지나의 두통은 더 심각해졌고 오드리가 퇴근할 때까지 벌서듯이 그 시간을 견뎠다고 한다. 냄새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한 번씩 병원 갈 때 차량을 이용하려고 활보서비스를 신청했던 것인데, 그렇게 어쩌다 한 번만 쓰는 활보서비스는 없으므로 장애인 택시나 뭐 그런 쪽의 다른 서비스를 찾기로 했단다. 무례하고 일방적이었던 지나의 문자는 여전히 가슴 아프지만 오드리는 동갑내기 친구 지나의 통증이 조금이라도 덜해지기를 바랐다. /